한 달 후, 일 년 후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최정수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7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한 달 후, 일 년 후, 우리는 어떤 고통을 느끼게 될까요?
주인님, 드넓은 바다가 저를 당신에게서 갈라놓고 있습니다.
티투스가 베레니스를 만나지 못하는 동안,
그 얼마나 많은 날이 다시 시작되고 끝났는지요."

 소설의 도입부분에서 배우인 베아트리스가 읊은 <베레니스>의 한 구절이다. "한 달 후, 일 년 후"라는 시간과 감정의 유한함에 대한 강조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알랭 말리그라스의 집에 모이는 사람들-알랭과 파니, 베르나르와 니꼴, 조제와 자크, 에두아르와 베아트리스-는 겉으로는 멀쩡해보이지만 모래 위에 쌓은 집처럼 위태로운 관계로 얽혀있다. 그들은 권태와 외로움을 "유한한 사랑"이란 감정과 치환해버린 것이다.

 
p136
 나는 공중전화용 토큰을 요청하기 전에 카운터 좌석에서 코냑 한 잔을 마셨다. 그는 조제에게 이렇게 말할 생각이었다. '당신이 필요해요.' 그 말은 진실일 테지만,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못할 터였다. 그가 그녀에게 그들의 사랑에 대해 말하자, 그녀는 그에게 사랑의 짧음에 대해 말했었다. "일 년 후 혹은 두 달 후, 당신은 날 사랑하지 않을 거예요." 그가 알고 있는 사람 중 오직 그녀, 조제만이 시간에 대한 온전한 감각을 갖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격렬한 본능에 떠밀려 시간의 지속성을, 고독의 완전한 중지를 믿으려고 애썼다. 그리고 그 역시 그들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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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랭과 에두아르의 베아트리스에 대한 사랑은 격렬한 본능에 떠밀려 그 자신들을 망가뜨리고 곁에 있는 파니까지 슬픔의 나락으로 떨어뜨린다. "한 달 후, 일 년 후"면 희미해질지도 모르는 열정때문에 그들의 현실은 발목이 꺾인 새처럼 절뚝거리며 나아가지 못한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한 달 후, 일 년 후"면 그칠 감정이기에 우리는 지금 거기에 더 몰두하는지도 모르겠다.아스라니 사라져가는 것들은 유독 더 아름답고 더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p186-187
 그녀는 거실 다른 쪽 끄트머리에 있는 자크를 바라보았다. 
 베르나르가 그녀의 시선을 뒤쫓았다.
"언젠가 당신은 그를 사랑하지 않게 될 거예요. 그리고 언젠가 나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게 되겠죠."
 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고독해지겠죠. 그렇게 되겠죠. 그리고 한 해가 또 지나가겠죠......"
 "나도 알아요."
 조제가 말했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 그의 손을 잡고 잠시 힘들 주었다. 그에게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그가 말했다.
 "조제, 이건 말이 안 돼요. 우리 모두 무슨 짓을 한 거죠?......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죠? 이 모든 것에 무슨 의미가 있죠?"
 조제가 상냥하게 대답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안 돼요. 그러면 미쳐버리게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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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은 알랭의 집에 다시 모인 사람들을 바라보는 베르나르와 조제의 대화로 마무리되는데 이 소설의 결정체라할 만하다. 베르나르는 한 편의 우스꽝스런 연극을 본 것처럼 알랭의 집에 모인 사람들의 그릇된 관계와 그들의 허망한 감정에 대해 깨닫는다. 그렇지만 사강의 소설은 쿨하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안 돼요. 그러면 미쳐버리게 돼요."라는 조제의 경쾌한 낙관은 사강의 목소리가 아닐까싶다.

 이 소설의 희극적인 엔딩은 불현듯, 셰익스피어의 <한여름밤의 꿈>에서 퍼크의 마지막 대사를 떠올리게 했다.  
"배우들의 그림자 노릇을 한 저희들 때문에 기분이 나쁘셨다면 그냥 이 모든 것을 '한 여름 밤의 꿈'이었다고 생각하십시오. 허황되고 초라한 연극이긴 합니다만 한낮 꿈일 뿐이니 괜찮으실 겁니다. 용서하신다면 다음번엔 더 잘하겠습니다 .저 퍼크는 여러분을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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