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파티 드레스
크리스티앙 보뱅 지음, 이창실 옮김 / 1984Books / 202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는 가끔, 꿈꾸었지만 꿈꾸는지도 몰랐던 하나의 세계를 완벽하게 보여주는 책을 만나기도 한다. 프랑스 시인 크리스티앙 보뱅의 <작은 파티 드레스>가 그렇다. 거기에는 침묵이 일상인 사람들이 있다. 작고 낡은 식탁 앞에 앉아 식탁보의 주름살을 펴는 시인이, 모두가 잠든 밤 부엌에서 글을 쓰는 여인과, 백마를 타고 달리며 바람으로 음악을 만드는 아이가, <닥터 지바고>를 읽는 중년의 남자와 ‘사랑’을 이야기하다 눈동자의 초점을 잃어버리는 사람이. 온통 검은색인 세상에서 그들 주변으로만 하얀 침묵이 고인다.

 

 

 

나는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그들 맞은 편에 앉아 물끄러미 쳐다본다. 그들이 잠겨 있는 침묵의 빛을 황홀하게 빨아들이면서. 그러다 기어코 슬며시 나를 포개어 보는 것이다.

 

 

 

 

"그녀는 글을 쓴다. 온갖 색깔의 노트에다, 온갖 피로 만들어진 잉크로. 글은 밤에 쓰는데, 그렇게밖에 할 수 없다. 장을 보고, 아이를 씻기고, 아이의 학과 공부를 돌봐준 뒤이다. 그녀는 저녁상을 치운 뒤 같은 식탁에서 글을 쓴다. 밤늦도록 언어 속에 머무른다. 아이가 깜박 잠이 들거나 놀이에 빠진 사이, 그녀가 먹이는 이들이 그녀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 없게 된 순간에 글을 쓴다. 이제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그녀 자신이 되어 있는 순간 그녀는 홀로 종이 앞에 앉는다. 영원 앞에 나와 앉은 가난한 여자이다. 수많은 여성들이 얼어붙은 그들의 집에서 그렇게 글을 쓴다. 그들의 은밀한 삶 속에 웅크리고 앉아."

p.83 <작은 파티 드레스, 크리스티앙 보뱅, 이창실 옮김, 1984books>

 

 

그녀는 글을 쓴다. 빨간색 표지의 몰스킨 노트에다, 하얀 몸통에 검은 뚜껑이 달린 빅(Bic) 볼펜으로. 글은 새벽에 쓰는데, 그렇게밖에 할 수 없다. 저녁을 준비하고, 아이를 씻기고, 책을 읽어주고 잠을 재우느라 밤에는 시간이 없다. 그녀는 새벽마다 발소리를 죽이고 침실에서 빠져나온다. 그리고 서재방으로 들어가 책 상 위 작은 등을 밝혀두고 글을 쓴다. 아이가 깰 때까지 언어 속에 머무른다. 아이와 남편이 꿈 속을 헤매이는 사이, 세계가 아직 잠의 장막에 덮여 있는 사이, 그녀는 홀로 존재한다고 느끼는 순간에 글을 쓴다. 이제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그녀 자신이 되어 있는 순간 그녀는 종이 앞에 앉는다. 영원 앞에 나와 앉은 가난한 여자이다. 수많은 여성이 얼어붙은 그들의 집에서 그렇게 글을 쓴다. 그들의 은밀한 삶 속에 웅크리고 앉아.

 

 

 

 

 

"내가 책을 읽는 건, 보기 위해서예요. 삶의 반짝이는 고통을, 현실에서보다 더 잘 보기 위해서예요. 위안을 받자고 책을 읽는 게 아닙니다. 난 위로받을 길 없는 사람이니까. 무언가를 이해하려고 책을 읽는 것도 아니에요. 이해해야 할 건 하나도 없으니까. 내가 책을 읽는 건 내 삶 속에서 괴로워하는 생명을 보기 위해섭니다. 그저 보려는 겁니다."

p.88 <작은 파티 드레스, 크리스티앙 보뱅, 이창실 옮김, 1984books>

 

 

내가 책을 읽는 건, 나를 잃기 위해서예요. 내 존재가 지워질 때 더 잘 보이는 것들이 있어요. 삶의 반짝이는 것들, 현실에서는 볼 수 없는 것들이 그제야 보이지요. 위안을 받자고 책을 읽는 게 아닙니다. 책에는 위로 이상의 것이 있으니까. 거기엔 또 다른 삶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 있어요. 여기서는 눈을 씻고 바라봐도 볼 수 없는 세상이요. 내가 책을 읽는 건 발견하기 위해섭니다. 나를 잃어야 열리는 그 길을 발견하려는 겁니다.

 

 

 

 

"우리는 사랑하듯 책을 읽는다. 사랑에 빠지듯 책 속으로 들어간다. 희망을 품고, 조바심을 낸다. 단 하나의 몸 안에서 수면을 찾고, 단 하나의 문장 속에서 침묵에 가닿겠다는, 그런 욕구의 부추김을 받으며, 그런 욕구의 물리칠 수 없는 과오를 저지른다. 조바심을 내며, 희망을 품는다. 그러다 때로 무슨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어둠 속에서 들리는 이 목소리처럼, 일체의 조바심을 몰아내고 일체의 희망에 딴죽을 거는 무언가다. 그것은 위로하려 하지 않고 마음을 진정시키며, 유혹하지 않고 황홀감을 준다. 자체 안에 자신의 종말과 죽음의 슬픔, 어둠을 품고 있는 무언가다."

p.108 <작은 파티 드레스, 크리스티앙 보뱅, 이창실 옮김, 1984books>

 

 

 

 

 

많은 페이지를 옮겨 적고 고쳐 쓴다. 그 속의 침묵이 내 삶으로 번져나오길 갈망하면서. 이 책을 내 삶 위에 포개어 두면 '작고 하얀 드레스'가 내 것이 될 수도 있을까, 상상하면서. 시인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때로 무슨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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