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항 - 기획 29주년 기념 특별 한정판 버지니아 울프 전집 7
버지니아 울프 지음, 진명희 옮김 / 솔출판사 / 201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버지니아 울프의 첫번째 소설 <출항>은 스물 네 살의 레이철이라는 여성이 자신의 진실한 목소리를 찾아 떠나는 내면의 여행기이다. 그녀는 일찍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와 나이든 고모들의 보호 아래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랐다. 19세기 말 부유한 집 딸들이 받는 뻔한 교육을 받았고 그로 인해 ‘그녀의 지성은 엘리자베스 여왕 통치 초기의 남성 지식인 정도의 수준’으로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도 없거니와 들은 것을 맹목적으로 믿으며 자신의 의견을 제대로 주장할 줄도 모른다. 한마디로 우유부단하며 감정적이다. 소설은 그런 여주인공이 외숙모 헬렌을 따라 남미의 휴양지(산타 마리나)에 머물며 다양한 인물과의 관계 맺음과 독서, 여행을 통해 세상과 자아에 대한 인식을 확장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바다나 바람처럼, 융합되지 않고 그 밖의 다른 것과는 다른 실제로 영속적인 것으로서 자신의 모습, 그녀 자신의 존재 환영이 레이철의 마음에 문뜩 떠오르며, 그녀는 자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에 완전히 흥분해 있었다.

“저는 저-어 자신일 수 있어요.” 그녀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p/125

***변화의 가능성을 내보이는 장면. 레이철이 자기 존재를 알고자 하는 욕구를 느낄 수 있다.

 

 

 

 

 

소설에는 여러 인물들이 등장하고 그들 각자의 관점에서 몇몇 소재가 풀려나오지만 자연스레 주인공 레이철의 내면에 집중하게 된다. 소설이 쓰이던 당시 사회는 여성에게 제대로 된 교육을 제공하지 않았고 이상적인 배우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것이 젊은 여성에게 성취해야 할 당연한 인생의 표본으로 제시되던 때다. 어려서 어머니를 잃은 레이철은 아버지의 통제하에 철저히 가부장적 지배 아래 놓여 있었다. 그런 상황을 고려했을 때, 백지장 같았던 레이철이 자신의 감정을 인식하게 되고, 성과 사랑에 대해 질문하고, ‘결혼’에 이르는 과정을 통해 존재의 의미와 삶의 지향점을 발견하는 변화는 상당한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춤곡이에요.” 그녀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스텝을 만들어보세요.” 그녀는 멜로디를 확신하며 방식을 단순화하기 위해서 리듬을 대담하게 표현했다.

(…)그들이 앉아서 귀를 기울이자 그들의 신경이 가라앉았다. 끊임없이 얘기를 나누고 웃어대서 그들의 입술에 느꼈던 열기와 아픔도 진정되었다. 그런 다음 그들은 그들 자신과 자신들의 삶을, 그리고 음악의 지휘 아래 매우 고상하게 진전하는 인간 삶 전체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

“음악은 우리가 스스로 말할 수 없는 모든 것을 말해주는 것처럼 보여요.”

p/248

***무도회가 한창 무르익었을 때 연주자들이 떠나자 레이철이 피아노를 연주하기 시작한다. 레이철의 숨겨진 열정이 가장 강렬하게 표출되었던 장면이기도 하고, 소설 전체에서 가장 역동적으로 즐거운 분위기가 흘러넘치는 부분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가식과 위선의 가면을 벗고 일체가 되어 즐긴다. 삶이 주는 축복과 같은 순간 속에서 레이철 또한 삶의 기쁨을 극적으로 맛보았을 것 같다.

 

 

 

 

마치 그가 사물과 일체가 된 듯이, 그의 눈은 꿈꾸는 듯했고 푸른색의 생생한 눈은 레이철에게 달팽이의 녹색 살을 생각나게 하였다. 그녀 역시 그 옆에 앉아 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대한 크기의 경관이 자연스런 한계를 넘어 그녀의 눈을 확대시키는 것처럼 보이며 더 이상 바라보는 것이 고통스러워졌을 때, 그녀는 땅을 바라보았다. 남미의 이 한 줌의 토양을 아주 세밀하게 조사해서 땅의 모든 성질을 알아내어 그것을 자신에게 최고 권력이 주어진 세상으로 만든다는 사실이 그녀를 즐겁게 했다. 그녀는 풀 한 잎을 젖히고 맨 끝에 있는 솜털에 벌레를 한 마리 올려놓았다. 그녀는 이 벌레가 이 이상한 모험을 깨달았을지 궁금했으며, 그녀가 수많은 솜털들 가운데 이 솜털을 굽혔다는 것이 얼마나 이상한가를 생각했다. p/210

*** 우연한 사건이나 자기 앞에 놓인 대상이나 자연을 예민하게 감각하고 교감하는 레이철

 

 

 

 

 

 

도입부에서 그려진 레이철은 생각하는 능력이 결여된 어린 아이 같은 인상을 풍기지만 외적인 교육의 강제가 부재한 탓에 타고난 음악적 재능을 풍부하게 소유하고 있다. 이는 그녀가 세상을 예민하게 감각하고 정서적으로 교감할 수 있는 바탕이 된다. 특히 무도회 장면을 통해 열정적으로 순간에 뛰어들고 몰입하기도 하며, 피아노 연주로 사람들을 어떤 경지로 이끌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는게 보여진다. 또한 '바다나 바람', '하늘'처럼 어디에 속하지 않으면서 실제에 영속하는 존재로 자신을 느끼기도 한다.

 

 

 

그녀의 마음은 햇빛 속에 걸려 있는 빛나는 것들을 응시함으로써 야기된 것과 같은 그러한 육체적 즐거움을 가지고 그 근원들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그것들로부터 모든 삶이 빛을 발산하는 것처럼 보였으며, 책들의 단어들도 광휘에 젖어 있었다. (…) 그녀는 땅에 풀썩 주저앉아 무릎을 깍지 끼듯 움켜잡고 멍하니 앞을 바라보았다. 커다란 노란색 나비가 평평한 작은 돌 위에서 아주 서서히 날개를 폈다 접었다 하는 것을 그녀는 한참 동안 지켜보았다.

“사랑에 빠진다는 게 어떤 걸까?” 오랜 침묵이 흐른 후 그녀는 따져 물었다. 각 단어는 태어나면서 미지의 바닷속으로 떠밀려지는 것처럼 보였다. 나비의 날개에 의해 최면에 걸리고 삶에서 끔찍한 가능성을 발견한 경외심에 사로잡혀, 그녀는 좀 더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 p/260

*** '사랑’에 대해 묻고 감각하게 되는 레이철, 그녀 의식 세계의 변화와 확장을 엿볼 수 있다.

 

 

 

 

 

 

헬렌의 의도대로 젊은 남성들과 여러 연령층의 여성들과의 만남, 아마존강을 따라가는 탐험 여행 등을 통해 레이철은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경험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휴잇이라는 인물과 교감을 나누고 ‘사랑’을 느끼며 연인 관계로 발전한다. 안타까운 것은 당시 시대 상에 의해 그 사랑의 결실이 ‘결혼’으로 이어지는 당위의 수순을 밟는다는 점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사랑 속에서 행복을 느끼면서도 가부장제하에서 ‘결혼’이 갖는 위선과 한계를 인식하고, 그로 인한 불안을 떨쳐내지 못한다. 레이철은 휴잇과의 관계가 긴밀해질수록 그 속에서 고립감을 느끼고 ‘결혼’이라는 선택이 지닌 편협함과 불완전함을 감지한다. 이는 소설이 ‘결혼’이라는 해피 엔딩으로 끝날 수 없음을 예감하게 한다.

 

 

 

가정에서 멋지고 단단히 짜 엮은 삶의 본질을 쌓아 올리는 것은 바로 고모들이었다. 고모들은 그녀의 아버지보다 훌륭하지는 못했지만 훨씬 자연스러웠다. 그녀가 화를 내는 것은 대부분 고모들 때문이었다. 그녀가 그렇게 면밀히 검토하고 아주 격렬하게 산산조각으로 부숴버리고 싶었던 것은, 바로 하루 네끼의 식사와 시간 엄수와 열 시 반에 하인들에게 층계 청소를 시키는 그들의 일상이었다. 이런 생각들을 따라가다가 레이철은 쳐다보며 말했다.

“그래도 그 안에는 일종의 아름다움이 있어요.- 이 순간에도 그들은 거기 리치몬드에서 세상을 쌓아나가고 있어요. (…) 그것은 아주 무의식적이고, 아주 겸손한 거예요. 그러나 그들은 세상을 느껴요. 그들은 사람이 죽으면 마음을 쓰지요. 늙은 노처녀들은 언제나 일들을 하고 있지요.”(…)

그녀는 이 모든 것들이 모래알갱이처럼 수많은 나날 동안 똑 똑 떨어져 내리며,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견고한 덩어리, 배경을 굳건히 쌓아올리는 것을 보았다. p/323~324

*** 레이첼의 입을 빌어 말하는 ‘여성’이 일구는 삶의 의미. 일상을 꾸리며 구체적인 삶을 존재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여성의 중요한 역할임을 강조한다. 이를 레이철이 자각하게 함으로써 그녀 인식의 각성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여성이 스스로 존재에 의미를 부여한다는 데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녀는 그와 키스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계속해서 말을 질질 끌고 있었다.

“젊은 아가씨가 젊은 남자보다 더 외로워요. 그 누구도 그녀가 무엇을 하는지 전혀 신경 쓰지 않아요. 그녀한테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아요. 그녀가 아주 예쁘지 않으면 그녀가 하는 말을 듣지도 않아요……그리고 이것이 제가 좋아하는 점인데.” 그녀는 마치 그 기억이 아주 행복한 듯이 힘차게 덧붙였다. “ 저는 리치몬드 파크를 걸으며 혼자서 노래 부르며 아무도 그것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이 좋아요. 저는 세상이 계속 돌아가는 것을 보는 것이 좋아요-그날 밤 당신은 우리를 보지 못했지만 우리는 당신을 보았던 것처럼-그것은 바람이나 바다가 되는 느낌이에요.” p/325

***레이철의 변화 ; 존재에 대한 인식. 인형 같은 존재에서 ‘바람이나 바다’처럼 유동적이면서 세계를 스치거나 스며들거나 변화시키는 존재로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녀는 지금에야 그가 말하고 잇는 것이 전적으로 진실처럼 보였다. 그녀는 자신이 한 인간의 사랑 이상의 훨씬 많은 것들을 – 바다, 하늘을 -원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다시금 고개를 돌려서 저 멀리 남빛을 바라보았는데, 그것은 하늘과 바다가 만난 곳으로 매우 평온하고 고요했다. 그녀는 아마도 단지 한 인간만을 원할 수는 없었다. p/455

***레이철의 변화 ; 사랑에 눈을 뜨고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결혼을 앞두고는 결혼이 지닌 한계까지 감지할 수 있다. 그렇기에 순순히 ‘결혼’에 이르는 결론에 다다를 수 없었을 것이리라.

 

 

거울 속에 자신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그들을 오싹 소름이 끼치게 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거대하고 나누어질 수 없는 존재가 아니라 정말로 매우 작은 별개의 존재로 보였으며, 거울의 크기는 다른 것들을 비출 수 있는 넓은 공간을 남겨놓고 있었다. p/456

*** 두 사람의 결혼 이상의 더 큰 의미를 지닌 것이 세상에 존재함을 암시한다. ‘결혼’이 좌절될 수 밖에 없음을 감지할 수 있다.

 

 

 

 

 

 

레이철이라는 인물의 변화는 일견 소극적으로 드러나고, 그 또한 ‘사랑’과 ‘결혼’이라는 틀을 벗어나지는 못한다. 하지만 버지니아 울프는 그 외 인물-허스트나 휴잇, 헬렌-을 통해 당시 여성의 상황에 대해 날선 비판의 목소리를 쏟아 내고, 혼자 살아가는 독신 여성(앨런), 자유 연애를 즐기는 여성(이블린) 등을 등장시켜 젊은 여성이 꿈꾸는 삶이 ‘결혼’만이 아니며 사회가 바뀌고 있음을 보여주려 고민한다. 그렇다면 레이철이 ‘결혼’에 대한 불안을 느낌과 동시에 열병에 걸리고 끝내 죽음에 다다르는 결말 또한 여성의 닫힌 현실(결혼)에 대한 투항의 제스처로 볼 수 있다. 그녀는 '결혼' 이상의 고귀한 무언가에 자신을 내던진 것이다.

 

 

<출항>은 레이철이라는 젊은 여성이 존재의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여성이 처한 현실에 저항하는 몸짓(가부장제가 강제하는 결혼을 뒤엎음)을 그려냄으로써 울프라는 여성 작가의 잠재된 힘을 짐작해보게 한다. 그런 의미를 지우더라도 이야기로서, 상상의 날개를 돋아나게 하는 문장력으로서 소설 읽기의 즐거움도 충분히 지닌 작품이다. 이 책에서 가장 매력적인 것은 풍경에 심상을 얹어 풀어내는 장면들이다. 단순히 눈 앞에 있는 대상으로서의 풍경이 아니라 인물의 감정을 대변하고, 혹은 인물의 감정에 깊숙히 개입해 어떤 작용을 일으키기도 하는 풍경, 그에 대한 생동감 있는 묘사는 '역시, 울프!'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 외에도 영국의 응접실 문화, 혹은 사교 문화에서 비롯되는 끝없이 이어지는 대화를 통해 인물들 간의 상호작용을 즐기는 재미도 쏠쏠하다. 거기에는 언어를 통한 의사 소통으로 타자와의 진정한 교감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이 담겨 있기도 하다.

 

 

이 책은 주제의식에 방점을 찍자면 다소 아쉬운 부분이 없지 않지만 상상력을 자극하는 소설로, 관계과 삶, 존재와 영혼의 진실에 다가가고자 했던 예리한 여성 작가의 시선을 느끼게 해준다. <출항>은 버지니아 울프라는 작가가 여성의 언어로 세상을 바라보고자 첫 발을 내딛은 소설로 1904년부터 1915년까지 7회, 많게는 12회 정도 고쳐쓰며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다. 그녀는 여성의 정신 세계를 풀어낸 글이 드물던 시대에 자기만의 방식으로 하나의 세계를 구축하고자 매달렸다. 가부장제의 폭압적 위력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자신만의 영혼의 경험, 진정한 존재의 순간을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여성 언어'를 탐구하고자 했다. 그러한 울프 문학의 출항을 알리는 작품이다. 주인공의 육신은 죽음으로 가라앉지만 울프의 영혼은 그 너머의 것을 찾아 떠오르고 있다.

 

 

 

 

“물론, 나는 더 나이가 들었고, 거의 인생의 절반은 삶았지만, 너는 이제 막 시작하고 있어. 그것은 당황스런 일이지. – 때로는 실망스럽다는 생각이 들어. 아마도 위대한 것들은 우리가 기대하는 것처럼 그렇게 대단하지는 않아. – 하지만 그것은 재미있지. – 아, 그래, 너는 확실히 그것이 흥미롭다는 것을 발견할 거야. – 그리고 그렇게 계속 되지,”(…) “우리가 예상치 않았던 곳에 즐거움이 있어.” p/434

***결혼에 대해 걱정하는 레이철과 휴잇에게 헬렌이 하는 말이다. 결혼이라는 결합 혹은 제도 속에는 위선과 거짓, 억압이 존재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이것은 삶 전반으로 확장시켜 해석해 볼 수도 있다. 삶이란, 역경과 어려움, 위선과 거짓, 온갖 억압이 존재하지만 반면 우리를 흥미롭게 하고 예상치 못한 즐거움을 안겨주기도 한다. 우리가 중단한다고 그만둘 수도 없는 것이 삶이다. 그렇게 계속 되는 가운데, 알지 못하는 미지의 것이 숨어 있을 거라는 기대로 나아가는 수 밖에 없다. 두려움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떠나보는 것이, 출항해보는 것이 그 즐거움을 맛볼 수 있게 해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