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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비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백수린 옮김 / 창비 / 2020년 8월
평점 :
"동생들이 에르네스토의 부재에 익숙해져야 하며, 언젠가는 그들이 에르네스토 없이 지내야 할 것이고 게다가 언젠가는 모두 서로와, 영원히 헤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처음엔, 그들 사이에 머지 않아 이별이 하나씩 생겨날 거라고. 그다음엔, 남아 있는 이들이 자기 차례가 되면 사라져갈 것이라고. 그것이 바로 인생이란다. (…) 인생이란 그런 것, 바로 그것, 다른 무엇이 아니라 그런 것만이 인생이라고. 부모를 떠나는 것이나, 학교에 가는 것이나 다 마찬가지라고." p/18~19
인생에 드리워진 무수한 베일을 거두어 내면서 우리는 성장한다. 행복한 유년기, 타오르던 사랑, 열렬한 우정, 극에 달했던 모든 시절은 늘 무너졌다. 무너진 폐허를 넘어 삶은 지속되었다. 폐허 위에 쌓이는 것이 인생이다. 쇠락할 것을 예감하면서 나아가는 것, 그렇게 어른이 되는 것이 인생이라고 말하는 소설이 있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소설 <여름비>다. <여름비>는 우리가 이별한 찬란한 순간을 되비추며 거기에 삶의 본질이 있다고 노래한다.
소설은 프랑스 파리 근교, 비트리에 사는 극빈층 가정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실업자인 아버지와 어머니, 국가에서 주는 수당으로 연명하는 삶, 창고에 방치된 아이들. 지독한 가난에 희망이라곤 보이지 않는 삶이다. 그 속에 에르네스토와 잔이 있다. 아이들 중 맏이들인 이들은 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책을 읽을 수 있고 일반적인 지식을 뛰어넘는 지혜를 지니고 있다. 둘의 사랑은 남매애 이상으로, 어머니와 아버지에게로 연결되기도 한다. 소설은 그들만이 교감하는 어떤 신비로운 세계를 펼쳐 보여준다.
부모와 거기서 유래하는 아이들, 그 사이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지만, 간극 또한 엄연히 존재한다. 삶의 의미를 상실한 부모, 삶 자체로 피어나는 아이들, 무능한 아버지와 무기력한 어머니, 예언자적 목소리를 내는 에르네스토와 지극한 아름다움을 지닌 잔, 둘 사이의 극적인 대조는 긴장감 속에서 불가능한 상상을 가능하게 해준다. 에르네스토와 잔을 중심으로 비밀스럽게 짜여진 한 세계는 팽창하고, 둘은 지극한 사랑으로 서로를 존재하게 한다. 하지만 서로를 열렬히 사랑한다 해도 결코 완성될 수 없는 세계가 있고, 넘어설 수 없는 한계가 있음을 우리는 안다.
"아이들은 자신들이 버림받은 존재란 걸 이해하고 있었다. (…) 아이들은 머릿속에 아주 어린 시절의 영역을 지니고 있었다. 어둠의 영역, 명료하지 않고 분별되지 않는 두려움, 예를 들어 황량한 고속도로, 폭풍우, 컴컴한 밤, 바람, 바람이 어떤 때 뭐라고 하는지 가서 들어 보렴, 뭐라고 소리 지르는지를. 아이들의 모든 두려움은 신으로부터 왔다, 거기로부터, 신들로부터. 모든 두려움은 신에게서 왔고, 생각하는 것은 그 두려움을 덜어줄 수 없었는데, 왜냐하면 생각하는 것 역시 두려움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p/91
"잔과 에르네스토에게 있어 모든 것, 그리고 하루하루는 더 이상 예전과 같은 시간, 같은 형태, 같은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
이러한 변화는 잔과 에르네스토에게만 겨우 감지된다. 그것은 아주 희미하고, 결코 드러나지 않지만, 매우 자연스럽고 일관된 방식으로 일어나, 온전한 미래로 향하는 듯한 변화다." p/168
에르네스토와 잔은 그들만의 세계가 붕괴할 것을 예감한다. 그 시간이 다가옴을 느낀다. 두려움은 아래의 아이들에게도 전달된다. 아이들이 현실을 인식하는 순간, 완벽하다고 믿었던 세계는 무너지기 시작한다. 자신들이 처한 현실의 비극을 구체적으로 인지하면서, 유년의 세상을 떠날 채비를 한다. 그렇게 어른이 되어 간다.
<여름비>는 잠시 우리에게 주어지는 완벽한 결합이나 합일의 순간, 사랑이나 행복의 정점, 무언가로 충만했던 시절이 끝나가는 것에 대한 기록이다. 또한 그 세계는 무너지고야 마는 것이 본질이라고 말하고 있다. 소설은 그 순간을 여름이라는 계절에 녹여내고, 여름비로 장막을 거두어 낸다.
"여름은 단숨에, 난폭하게 들이닥쳤다.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여름은 그곳에, 움직임 없이, 슬픔에 잠긴 채 있었다. 하늘은 칙칙한 푸른색이었고, 열기는 이미 견디기 힘들었다." p/156
"비트리에 첫 여름비가 내린 것은 바로 그날 저녁, 어머니가 눈물을 머금은 「라 네바」를 오래도록 부르는 동안이었다. 비는 시내 전역에, 강과 파괴된 고속도로에, 나무, 오솔길, 아이들이 지나던 비탈길에, 세상의 끝까지 떠돌아다닐 창고 옆의 서글픈 의자들 위에도 오열하는 파도처럼 세차게, 격정적으로 쏟아져 내렸다." p/195~196
여름은 모든 것이 한껏 생명력을 뿜어내는 계절이다. 더위와 습기 속에 팽창하는 기운이 가득 차오르고 절정을 향한 아우성에는 긴장감이 뒤따른다. 폭발을 기다리는 침묵, 그 뒤에 일순간 퍼붓는 여름비. 세계를 가둔 장막은 찢어지고 열기에 썩기 시작했던 생명력은 분출한다. 그제야 조금 숨통이 트인다. 극을 향해 치솟는 것은 추락의 운명을 피할 수 없다. 하지만 무너져 내려야 다음으로 갈 수 있다.
<여름비>에는 소설의 문장과 희곡의 대사가 교차하며 등장한다. 낯선 형식은 한 편의 영화나 연극을 보는 느낌을 불러 일으킨다. 뒤라스는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무의식의 세계를 글과 이야기로 빚어내고, 장면 장면이 연결되는 극으로, 구체적인 감각으로 재현해준다. 거기에 포착된 것은 존재의 내부에 잠자고 있는 불안과 고독한 실존이 지니는 욕망, 생과 사의 기운 속에서 느끼는 두려움과 긴장감이다. 외면적 사건은 단순하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은 농밀하다. 절제된 문장 속에서 감정은 폭발한다. 어떤 주술적 힘에 이끌려 끈적거리는 기운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마는 것, 그것이 뒤라스 소설의 매력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