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잃기 안내서 - 더 멀리 나아가려는 당신을 위한 지도들
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 / 반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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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카 솔닛은 작가이자 역사가이며, 1980년대부터 환경, 반핵, 인권 운동에 참여한 활동가이다. ‘맨스플레인’이란 단어로 세계적 반향을 일으키며 페미니스트로 더 알려져 있지만 『마음의 발걸음』, 『걷기의 인문학』, 『멀고도 가까운』 등 개인의 서사와 역사, 환경과 예술 문화 비평을 연결하며 서정적인 에세이를 써왔다. 『길 잃기 안내서』(김명남 옮김, 반비, 2018) 또한 그러한 저작들과 나란히 놓여 있다. ‘더 멀리 나아가려는 당신을 위한 지도들’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책은 길 잃기의 필요성과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솔닛은 『길 잃기 안내서』에서 길을 잃으라고 권한다. “우리가 그 속성을 전혀 모르는 무엇이야말로 종종 우리가 발견해야만 하는 것이고, 그것을 찾는 일은 길을 잃는 일이나 마찬가지”(p.20)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길을 잃을 것인가. “길을 전혀 잃지 않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니고, 길 잃는 방법을 모르는 것은 파국으로 이어지는 길”(p.31)이다. 길을 잃은 이들이 반드시 되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길을 찾아 더 멀리 나아가고, 누군가는 다른 내가 되는 변화를 경험하지만 어떤 이들은 영영 길을 잃고 돌아오지 못하기도 한다. 그래서 길 잃기에도 안내가 필요하다고 솔닛은 말한다. “자신이 길을 잃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p.26), 그리고 타인에게 도움을 요청할 줄 아는 것이 길을 찾는 나침반이 된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이 책에서 솔닛은 갖가지 방식의 길 잃기를 보여준다. 신대륙을 정복하러 갔던 스페인 사람 알바르 누녜스 카베사 데 바카는 길을 잃게 되자 정복자의 이름을 버리고 자신을 바꾸며 원주민의 삶으로 녹아 들었다. 금을 찾기 위해 캘리포니아를 찾은 ‘데스밸리 포티나이너스’는 황량한 사막에서 길을 잃고 부(금)에서 물로, 나눔과 생존으로 가치를 변경하면서 죽음의 사막을 살아서 빠져나왔다. 그들이 경험한 변형의 과정은 필연적으로 퇴화를 수반하며, 급작스런 위기를 동반할 수 밖에 없다고 솔닛은 말한다. 이러한 사유는 유럽에서 고향을 잃고 미국으로 이민해 온 ‘디아스포라’로 변형의 과정을 경험했던 증조 할머니와 할머니가 정신병을 앓았던 내력에 대한 이해로 확장되기도 한다.

 

솔닛은 물리적인 길 잃기에서 형이상학적이고 은유적인 길 잃기로 나아간다. 자신의 부계 가족사와 청년 시절의 친구, 연애 경험을 통해 기억과 과거,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던 상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것은 단순히 길을 잃는 것과 달리 슬픔과 아픔을 동반한다. 도시가 폐허로 변하고 지구에서 동물이 사라지는 것도 그렇다. 하지만 솔닛은 상실이 슬픔만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한다. “상실의 감각이란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풍요로움에 대한 기억이자 우리가 현재에 길을 찾도록 도와줄 단서들에 대한 기억”(p.43)이다. 또한 “세상 만물은 원래 사라지는 것이 섭리이지, 살아남는 것이 섭리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익혀야 할 기술은 과거를 잊는 기술이 아니라 손에서 놓아주는 기술이다. 그리고 우리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것이 사라졌을 때, 우리는 그 상실 속에서 풍요로울 수 있다.”(p.43)고 솔닛은 말한다.

 

나침반이 가리키는 북쪽처럼 이 책을 관통하며 ‘북쪽’ 역할을 하는 것은 ‘먼 곳의 푸름’이다. 어린 시절 입었던 블라우스와 15세기 원근법을 받아들였던 화가들의 그림, 자신의 기원을 갈망하는 블루스, 이자크 디네센의 도자기와 이브 클랭의 경계가 사라진 그림 등, 솔닛은 다채로운 푸른 색을 소환하며 우리의 시선을 먼 곳으로 이끈다. “먼 곳의 푸름은 시간과 함께, 멜랑콜리의 발견과 함께, 상실의 발견과 함께, 갈망의 질감과 함께”(p.66) 오기에 아름다우면서도 슬픔과 얽히어 있다고 솔닛은 말한다. 그리고 성숙은 “먼 곳에서 아름다움을 찾아주는 미감”(p.66)을 선사한다고 덧붙인다. 솔닛의 청년 시절 친구의 이름은 바다의 깊은 푸름을 담은 마린이었고 아버지가 계획자로 일했던 동물보호구역의 이름 또한 마린 카운티였다. 솔닛의 이야기 속에서 발견하는 “행운의 마주침, 우연한 일치, 심지어 그 이상의 수준까지 이르는 조화의 순간”(p.186)은 ‘먼 곳의 푸름’처럼 멀리서 관조할 때 비로소 찾아지는 아름다움이다.

 

리베카 솔닛의 『길 잃기 안내서』는 『멀고도 가까운』과 쌍을 이룬다. 『멀고도 가까운』이 평생 자신을 질투했던 어머니에 대한 이해와 용서를 넘어 연대를 이야기하는 책이라면 『길 잃기 안내서』는 불안정했던 부계 가족사를 수용하고 아버지에 대한 증오를 떨쳐내며 자신을 찾아나선 성장의 서사라 할 수 있다. 전자에는 극지방을 뒤덮은 눈과 얼음의 흰빛이 가득했다면 후자에는 광활한 사막과 먼 곳에 떠오르는 푸름이 넘실거린다. 책에는 개인사와 엇갈려 제시되는 역사적 사실과 문화 예술 비평이 쌓이면서 다양한 사유가 폭넓게 진폭한다. 하지만 솔닛 특유의 만연체 문장과 층위가 깊은 사유는 때로 독자를 버겁게 할 수도 있다.

 

작가 정여울은 『길 잃기 안내서』에 대해 ‘이 작가가 지닌 감성의 엔진이 여기 다 모여 있구나’라고 추천사에 썼다. 정여울의 말처럼 이 책에서 독자는 리베카 솔닛이라는 작가가 어떻게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게 되었는지 그 내밀한 역사를 더듬어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누군가는 자신의 경험을 확장하고 싶은 하나의 문을 발견하게 될 지도 모른다. 길 잃기는 두렵지만 성장을 위한 새로운 문을 발견하고 싶은 지적인 독자라면 이 책을 읽어보길 권한다. “온 세상을 잃으라. 그 속에서 길을 잃으라. 그리하여 네 영혼을 찾으라.”(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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