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영원했다
정지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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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행동하고 생각하고 말하는 과정이 교차하며 오가는 무수히 많은 순간에서 아주 가끔 의미가, 무언가 일치되고 연결되는 순간이 탄생하지만 그때가 지나면 그것을 표현할 수단은 사라진다. 그러한 경험은 공유할 수 없고 전달할 수도 없다. 그렇지만 그런 순간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영원히 남아서 존재하고 있다. 단지 망각할 뿐이다.

205쪽, <모든 것은 영원했다>, 정지돈, 문학과 지성사

 

 

 

 

내 생각을 옮겨 놓은 듯한 문장을 만났다. “우리가 행동하고 생각하고 말하는 과정이 교차하며 오가는 무수히 많은 순간에서 아주 가끔 의미가, 무언가 일치되고 연결되는 순간이 탄생”한다고 나 또한 믿어왔다. 하지만 그런 순간은 금새 사라지곤 했다. 연결되고 교신했던 찰나를 놓치고 싶지 않아 글로 남겼다. 그래서 지금도 쓰고 있다. 누군가의 글에 내 마음이 포개어진 순간을 기억하고 싶어서.

 

 

정지돈의 소설 <모든 것은 영원했다>를 읽었다. 독립운동가이자 공산주의자였지만 미국 스파이로 몰려 처형당한 현앨리스의 아들 정웰링턴의 삶을 다룬 소설이다. 현앨리스는 해방 이후 냉전의 분위기로 흐르던 세계 정세 속에서 비운의 운명을 살다 간 인물이다. 그런데 그의 아들 정웰링턴의 삶은 더 기구했다. 급진적 공산주의자였던 그는 미국을 떠나 체코를 통해 북한으로 들어가길 희망했지만 북한은 미국 시민이라는 이유로 그를 거부했다. 결혼을 하고 체코에 정착했지만 평생 비밀 경찰의 감시를 받아야했던 인물이다. 그는 미국과 체코, 북한, 어느 곳에서도 받아들여지지 못한 채 부유하다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어떤 선택도 허락되지 않는 '불능'의 삶이었다.

 

 

작가는 그의 진실을 파헤쳐 카타르시스를 안겨주려는 의도로 소설을 쓰지 않았다고 말했다. “나는 항상성과 돌연변이가 우연과 필연에 대한 논의를 거쳐 역사에 닿는 광경을 보고 싶었다.”(p.158)는 소설 속 문장이 이 책의 모든 것을 집약적으로 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소설의 앞부분 절반에서는 정웰링턴의 삶이 다뤄지는 반면 나머지 절반에서는 ‘미래를 전망함’이라는 타이틀로 정웰링턴에 대한 소설을 쓰기 위해 체코를 방문한 ‘나’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 책을 흔한 역사소설로 분류할 수 없는 이유가 이런 구성에 있다. 소설 전반부를 통해 실존 인물의 쓸쓸한 흔적을 더듬어보며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면 후반부에서는 ‘나’를 통해 현재라는 혼돈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습의 편린을 마주하게 된다.

 

 

우리는 “총체성을 사유할 수 없는 시대, 복잡성의 정도가 정신이 파악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p.152) 선 시대를 살고 있다. 각자의 삶은 ‘개인적인 것’으로 한정되었고 알게 모르게 사람들은 ‘정치적이길 포기’했다. “집중을 방해하고 강박적인 자본주의의 여건 속에서 사람들은 충분히 뭔가 잘못되고 뭔가 빠져 있고 뭔가 극심하게 불공정”(p.152)하다는 것을 느끼지만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혼란스럽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개체로서만 사고하고 행동”(p.153)하는데 익숙해져 간다. “동시대를 어떻게 사유해야 할지 모르겠다.”(p.152)는 비밀스런 한탄이 현재를 살아가는 많은 이들의 마음 속에 숨어 있지 않을까.

 

 

 

 

나는 언제나 아무것도 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매혹당했다. 관점에 따라 그것을 무능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능력이야말로 가장 과대평가된 덕목이다. 능력은 사람의 안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안과 밖의 상호작용으로 구성되며 결국에는 그의 밖에 자리한다. 그런 의미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사람들은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니라 부정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유능함이 자신을 증명하는 종류의 능력이라면 불능은 세계를 증명하는 능력이다. 정웰링턴의 불능은 그가 가진 가장 적나라한 능력이었다. 거의 남아 있지 않은 기록과 목소리, 망각으로서 그렇다.

135~136쪽

 

 

 

작가는 정웰링턴에게서 ‘부정의 능력’을 읽어냈다. 한때지만 그에게는 “여기보다 나은 곳이 있다고 믿는 희망”(p.141)이 있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할 수 없음’으로 ‘모든 것을 부정’했다. 그러니 ‘불능’은 지금의 우리에게 던져진 단어일 수 있다. 혁명은 실패로 끝났고 이념 전쟁은 사라졌다. 가능성은 무한히 확장되었고 변화의 속도는 무서울 정도로 빠르다. 하지만 시대가 어디로 흘러가는지 모른 채 우리는 개인의 삶과 새로운 이데올로기-돈과 이윤, 경제와 개발같은-에 갇혀 있는 듯 보인다.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현재를 바라본다면 우리의 뒷모습은 어떻게 보일까.

 

 

정지돈은 다른 작품에서도(<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기억에서 살 것이다>, workroom) 급변하는 역사의 현장에 존재했지만 주목받지 못한 채 잊혀졌던 인물을 다루었다.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무수한 자료에서 끌어 온 지식과 작가의 상상력을 엮어 재구성한 소설은 경험하지 못했던 한 시대를 우리 앞에 촘촘하게 펼쳐 보여준다. 소설을 읽으며 주인공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작가가 늘어 놓은 관념의 그물망을 연결하며 그 시대를 살고 나면 소설 속 인물과 세계가 막막한 그리움의 감정과 함께 머리 속을 맴돌았다. 그리움의 실체는 의문이었다. 역사는 늘 진보해왔다고 강조하지만, 지금 서 있는 이 자리가 그때보다 나아졌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모든 것은 영원했다> 또한 그러한 작업의 연장선으로 읽혔다. 작가는 사회주의 혁명이 실현되고 새로운 세상이 도래할 거라 믿었던 격동의 시대를 소환했다. 하지만 변화의 소용돌이는 냉전이라는 삼엄한 기류로 뒤바뀌었고 그 속에서 무수한 사람들이 사라졌다. 공산주의 사회에 강렬한 열망을 품었던 정웰링턴도 그들 중 한 명이다. 미국 시민권을 포기함으로써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던 그는 역사적으로 선명하게 기록된 시간을 살았지만 자신의 목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삶을 마감했다. 하지만 최소한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부정함으로써 자취를 남겼다. 정웰링턴의 삶을 한마디로 규정할 수 없듯 우리의 삶도 그럴 것이다. 소설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나’라는 장치는 단편적인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현재를 과거와 잇고, 미래를 연계하는 시간의 흐름 속으로 이끄는 계기가 되어준다.

 

 

그의 책에는 주류가 아닌 세상,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는 분야, 잊혀진 사람들이 종종 등장한다. 후기 대신 서너 페이지에 달하는 참고 문헌이 실린다. 그만큼 막대한 분량의 자료를 통해 이야기에 층을 쌓고 복합적인 의미를 만들어내는게 작가의 특기다. <모든 것은 영원했다>에서 이야기가 전개되는 방식은 낱장의 종이들이 시간 순에 상관없이 뒤섞여 있는 것 같다. 그렇게 분절된 서사는 어느 페이지든 마음껏 접속할 수 있는 자유를 선사하기도 한다. 굵직한 서사없이 이미지와 대사만으로 울림을 주는 영화가 있다. 그의 소설은 그런 영화를 닮았다. 명쾌한 서사를 피해 불투명한 방향과 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던지는 텍스트이기도 하다. 누군가는 불친절하다고, 누군가는 ‘지적 허영’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지적 허영’은 ‘호기심’을 낳기도 한다. ‘지적 허영’을 자극하는 그의 글 덕분에 나의 독서 목록은 지난해 많은 수혜를 입었다.

 

 

2020년의 가장 큰 수확으로 ‘정지돈’이라는 작가를 꼽았다. 그의 책은 편협적인 독서를 하던 나에게 새로운 세상을 펼쳐주는 만화경이 되었다. 과거로, 미래로, 눈 앞의 현실 너머 가능성과 이상으로, 돌리면 돌릴수록 복잡 미묘하게 펼쳐지는 만화경 속 세상이 매혹적이다. 그가 다음 번에는 어디로 만화경을 옮겨 놓을지 벌써부터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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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02 13: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춤추는바람 2021-08-03 15:1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