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는 정웰링턴에게서 ‘부정의 능력’을 읽어냈다. 한때지만 그에게는 “여기보다 나은 곳이 있다고 믿는 희망”(p.141)이 있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할 수 없음’으로 ‘모든 것을 부정’했다. 그러니 ‘불능’은 지금의 우리에게 던져진 단어일 수 있다. 혁명은 실패로 끝났고 이념 전쟁은 사라졌다. 가능성은 무한히 확장되었고 변화의 속도는 무서울 정도로 빠르다. 하지만 시대가 어디로 흘러가는지 모른 채 우리는 개인의 삶과 새로운 이데올로기-돈과 이윤, 경제와 개발같은-에 갇혀 있는 듯 보인다.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현재를 바라본다면 우리의 뒷모습은 어떻게 보일까.
정지돈은 다른 작품에서도(<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기억에서 살 것이다>, workroom) 급변하는 역사의 현장에 존재했지만 주목받지 못한 채 잊혀졌던 인물을 다루었다.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무수한 자료에서 끌어 온 지식과 작가의 상상력을 엮어 재구성한 소설은 경험하지 못했던 한 시대를 우리 앞에 촘촘하게 펼쳐 보여준다. 소설을 읽으며 주인공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작가가 늘어 놓은 관념의 그물망을 연결하며 그 시대를 살고 나면 소설 속 인물과 세계가 막막한 그리움의 감정과 함께 머리 속을 맴돌았다. 그리움의 실체는 의문이었다. 역사는 늘 진보해왔다고 강조하지만, 지금 서 있는 이 자리가 그때보다 나아졌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모든 것은 영원했다> 또한 그러한 작업의 연장선으로 읽혔다. 작가는 사회주의 혁명이 실현되고 새로운 세상이 도래할 거라 믿었던 격동의 시대를 소환했다. 하지만 변화의 소용돌이는 냉전이라는 삼엄한 기류로 뒤바뀌었고 그 속에서 무수한 사람들이 사라졌다. 공산주의 사회에 강렬한 열망을 품었던 정웰링턴도 그들 중 한 명이다. 미국 시민권을 포기함으로써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던 그는 역사적으로 선명하게 기록된 시간을 살았지만 자신의 목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삶을 마감했다. 하지만 최소한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부정함으로써 자취를 남겼다. 정웰링턴의 삶을 한마디로 규정할 수 없듯 우리의 삶도 그럴 것이다. 소설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나’라는 장치는 단편적인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현재를 과거와 잇고, 미래를 연계하는 시간의 흐름 속으로 이끄는 계기가 되어준다.
그의 책에는 주류가 아닌 세상,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는 분야, 잊혀진 사람들이 종종 등장한다. 후기 대신 서너 페이지에 달하는 참고 문헌이 실린다. 그만큼 막대한 분량의 자료를 통해 이야기에 층을 쌓고 복합적인 의미를 만들어내는게 작가의 특기다. <모든 것은 영원했다>에서 이야기가 전개되는 방식은 낱장의 종이들이 시간 순에 상관없이 뒤섞여 있는 것 같다. 그렇게 분절된 서사는 어느 페이지든 마음껏 접속할 수 있는 자유를 선사하기도 한다. 굵직한 서사없이 이미지와 대사만으로 울림을 주는 영화가 있다. 그의 소설은 그런 영화를 닮았다. 명쾌한 서사를 피해 불투명한 방향과 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던지는 텍스트이기도 하다. 누군가는 불친절하다고, 누군가는 ‘지적 허영’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지적 허영’은 ‘호기심’을 낳기도 한다. ‘지적 허영’을 자극하는 그의 글 덕분에 나의 독서 목록은 지난해 많은 수혜를 입었다.
2020년의 가장 큰 수확으로 ‘정지돈’이라는 작가를 꼽았다. 그의 책은 편협적인 독서를 하던 나에게 새로운 세상을 펼쳐주는 만화경이 되었다. 과거로, 미래로, 눈 앞의 현실 너머 가능성과 이상으로, 돌리면 돌릴수록 복잡 미묘하게 펼쳐지는 만화경 속 세상이 매혹적이다. 그가 다음 번에는 어디로 만화경을 옮겨 놓을지 벌써부터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