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출근하는 아빠를 현관에서 배웅하고도 아쉬움에 쫓아 나가 보면 골목은 늘 텅 비어 있었다. 그럴 때면 아빠의 걸음은 얼마나 빠른 건지, 아빠에게 초능력 같은 게 있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은 ‘아빠는 수퍼맨’이라는 상상으로 연결되었다. 키가 꽤 자란 후 우연히 동네에 다시 갔을 때 나를 둘러싸고 있던 하나의 장막이 깨어지는 경험을 했다. 넓은 대로라고 여겼던 길은 그야말로 좁고 짧은 골목길에 불과했다. 어린 아이가 서투른 걸음으로 현관을 나와 대문에 이르는 시간이면 성인의 걸음으로 충분히 골목을 벗어날 정도의 길이었다. 그 순간 어린 내가 우러러 보았던 하나의 세상이 작고 보잘 없는 것으로 무너져 내렸다. 각자의 삶에는 인생의 비밀을 터득하게 되는 어떤 절대적 순간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섬』의 작가 장 그르니에는 “일생이 동터 오르는 여명기에는 모든 것을 결정짓는 한순간이 있다.”(p.21)고 말했다. 그는 어느 날 보리수 아래 누워 하늘을 바라보다 그 하늘이 허공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보고 ‘무(無)’의 존재를 경험적으로 깨닫게 된다. 삶은 ‘공(空)’이라는 인식의 발로였다. 그러한 경험은 ‘왜 사는가’라는 의문에 사로잡히게 했지만 그가 세상을 무심한 시선으로만 바라본 건 아니다. 작은 고양이의 움직임에서 생(生)의 비밀을 찾아내고 담장 너머에서 풍겨오는 꽃의 향기에도 걸음을 멈추었다. 병에 걸린 정육점 주인을 찾아가 책을 읽어주며 위로했고, 자기 앞에 놓인 풍경 속으로 걸어 들어가길 주저하지 않았다. 미시적 실존에 관심을 기울이면서도 거시적 관점에서 삶을 성찰하는데 소홀하지 않았던 한 철학자의 관조와 사상이 『섬』 전체에서 흘러나온다. 그렇기에 『섬』은 삶의 진리를 찾아 떠났던 한 철학자의 순례기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가 떠났던 순례의 항로를 따라 독자는 몇몇의 섬에 발을 내딛게 된다. 케르겔렌 군도, 행운의 섬들, 이스터 섬, 상상의 인도, 그리고 보로메 섬들까지, 그를 매혹시키고 성찰하게 했던 철학적 사유의 지점들이 거대한 바다 위에 부표가 되어 떠 있다. 책읽기를 업으로 삼은 학자이자 서양과 동양을 아우르는 사상을 겸비한 철학자의 글은 안개와 황폐한 외관으로 덮인 미지의 섬을 닮았다. 매혹적이지만 단번에 다가가긴 쉽지 않다. 우리는 그가 찾아낸 비밀의 향기를 간신히 맡아 볼 따름이다. 인간과 삶의 유한성에 대해, 순간과 자연에의 합일에 대해, 그리고 비밀과 신비에 대한 끝없는 예찬과 절대와 신성에 대한 명징한 깨달음에 대해. 하지만 비밀은 늘 ‘방벽’ 뒤에 있다고 그는 말하지 않았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