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를 걷는 여자들 - 도시에서 거닐고 전복하고 창조한 여성 예술가들을 만나다
로런 엘킨 지음, 홍한별 옮김 / 반비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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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을 움직임을 가능하게 하는 곳으로 생각한다면 장소는 멈춤이다. 움직임이 멈출 때 어떤 위치가 장소로 바뀔 수 있다.” (이푸 투안,<공간과 장소>) 지리학자 이푸 투안은 장소place와 공간space를 구분한다. 공간 안에서 멈추고 경험하며 의미를 탐색할 때 비로소 장소는 발생한다. ‘사람을 이해하면 장소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고, 장소를 이해하면 사람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p322)’고 아녜스 바르다는 말했다. 사람은 장소를 떠나 살 수 없고 그것을 제외하고 설명될 수 없다. 하지만 여성은 역사 이래 늘 폭력의 위험에 노출되어 왔고 여성이 장소로 의미새김할 수 있는 공간은 한정적이었다. 백화점의 등장이 여성의 자유에 상당한 기여를 했고 여성의 자유는 도시를 제외하고 이야기하기 힘들다. 여성이 자유롭게 걸어다닐 수 있는 공간, 공간이 더 나아가 장소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도시’에서 였다.

 

‘산책’의 사전적 정의는 휴식을 취하거나 건강을 위해서 천천히 걷는 일이다. (네이버 국어 사전) 프랑스어에는 ‘플라뇌르(산보자)’라는 단어가 있지만 휴식과 건강을 위해 걷는 사람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정처 없이 돌아다니는 사람’, 그러면서 사람들과 도시의 면면을 들여다보는 사람을 뜻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시간과 돈이 있고 당장 신경 써야할 급박한 문제가 없는 특권과 여유를 지닌 인물형이 담겨있다. 단어가 발생한 19세기 초반의 더럽고 위험했을 파리의 거리를 상상하면 당연히 남성이었음을 의심할 여지없이 받아들이게 된다. 그렇다면 여성들은 어디 있었을까? 여성들은 거리를 돌아다니지 않았을까? 여성의 참정권과 권리 신장이 논의되던 때 도시를 걷던 여성들을 일컫는 ‘플라뇌즈(플라뇌르의 여성형)’라는 단어는 왜 없었을까? 로런 엘킨의 『도시를 걷는 여자들』은 이 질문에서 시작된다.

 

저자 로런 엘킨은 ‘플라뇌르’가 남성형 명사만으로 존재해왔다는 것은 거리에 있었을 무수한 여자들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당시의 사회적 제약을 감안하더라도 ‘플라뇌르의 여성 버전은 있을 수가 없다고 말해버리면, 여자들이 도시와 상호작용해온 방식을 남성의 방식 안에 가두게 되고 만다(p28)’는 중요한 문제를 지적한다. 그렇기에 ‘플라뇌즈’라는 여성 명사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 ‘도시를 걷는 다는 게 여성들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를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엘킨은 여성이면서 ‘플라뇌즈’적 행보를 걸었던 인물과 배경이 되었던 도시를 씨실로 역사와 문화, 예술을 날실로 엮으며 이야기를 풀어낸다. 여기에 롱 아일랜드에서 뉴욕과 런던, 파리를 오갔던 저자의 경험을 덧입힌다.

 

진 리스의 소설 속 수동적으로 절망에 내맡겨진 여성들은 역설적으로 길 위에서 희망을 찾았고, 버지니아 울프는 ‘댈러웨이 부인’이라는 인물을 통해 길을 나서는 여성의 자유에 형태를 부여했다. 조르주 상드는 스스로 남성처럼 옷을 입고 거리로 뛰어들면서 여성에게 놓인 억압과 불평등을 인식했다. ‘여성을 따라다니는 남성’의 개념을 전복시켜 남성을 추적하는 작품을 만든 소피 칼, 길 위에서의 관찰과 우연한 발견을 수집했던 아녜스 바르다와 자신이 목격한 것을 ‘증언’으로 바꾸고자 했던 마사 겔혼 등 다양한 작가와 작품을 넘나들며 엘킨은 ‘플라뇌즈’의 여성형으로서의 의미를 탐색한다. 그것은 <거리 배회>의 버지니아 울프처럼 군중 속으로 사라지며 익명성과 함께 자유를 얻는 것일 수도, 아녜스 바르다의 영화 <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에서처럼 ‘‘시선의 대상’에서 ‘응시하는 주체’로의 전환(p325)’을 경험하는 일일 수도 있다. 혹은 조르주 상드나 마사 겔혼처럼 혁명의 현장, 전쟁의 현장을 두 눈으로 보고 기록하거나 증언하는 것까지 포괄할 수 있다.

 

차가 없으면 어디도 갈 수 없었던 뉴욕의 외곽 롱 아일랜드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로런 엘킨은 대학에 진학하고 뉴욕으로 이사하면서 비로소 자신이 ‘실제로 세상의 일부인 것 같고 내가 세상과 주고받을 수 있으며 우리가 모두 같이 이 안에 있다(p49)’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학업을 지속하기 위해 파리에 도착했을 때 낯선 도시를 걸으며 진 리스의 소설 속 주인공과 같은 절망감을 느껴야 했고 힘겹게 적응한 파리 생활을 뒤로 하고 남자 친구를 따라 도쿄로 가야했을 때 도시, 즉 장소와의 부적응을 해소하는 과정에서 관계의 의미를 되짚어 보기도 했다. 파리에 돌아와 2015년 테러에 대한 규탄 집회에 참여하면서 68 혁명의 진의를 깨닫고 과거의 혁명과 역사를 간직한 도시에서 장소와 공명하는 사람들의 삶을 발견하기도 했다. 저자 로런 엘킨은 ‘플라뇌즈’라는 여성형 명사의 의미를 더듬는 과정을 통해 뉴욕과 런던, 파리를 걸으며 복종과 전복, 경계와 전환을 몸소 체험하며 세상을 걷는 ‘플라뇌즈’를 자신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인다. 스스로가 도시를 옮겨야 하는 불안정함 속에서 타협하지 않고 자신에게 맞는 곳으로 끊임없이 움직이려 했다. 고정성을 벗어 던진 경계에 서길 주저하지 않았던 그녀의 초상에서 울프의 자유, 소피 칼의 전복, 바르다의 우연과 발견, 겔혼의 증언과 엇비슷한 조각들을 찾게 된다. 그러므로 ‘플라뇌즈’는 성장한다.

 

문학과 예술, 사회 전반에서 통용되던 ‘플라뇌르’는 남성적 관념의 전유물이었다. 그 속에서 여성의 존재, ‘플라뇌즈’로서의 의미를 여성의 시각으로 더듬어본다는 점에서 책은 의미가 있다. 책에서는 ‘플라뇌즈’라는 여성형 명사의 의미를 하나로 한정지어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플라뇌즈’적 삶을 살았던 여성들을 통해 가능한 의미를 추적하려는 시도는 남성의 시선이 아닌 여성의 시선에서 ‘플라뇌즈’가 규정되어야 할 필요성을 촉구한다. 여기서 ‘핵심은 논쟁을 멈추지 않는 것(p308)’이며, ‘뿌리를 경계하라. 순수함을 경계하라. 고정성을 경계하라. (…) 유동성, 비순수성, 혼합을 받아들이라.(p409)’는 저자의 말을 따라 ‘플라뇌즈’의 의미를 만들어가야할 것이다.

 

“집에서 벗어난다고 해서 집 없는 사람이 되지 않는다(p409).” 한국인들은 지속적인 경쟁 속에 정신없이 달리다 중년이 되면 30평대의 아파트에 안주하는 공식 속에서 살고 있다. 그런 우리에게 이 책은 정착만이 성장의 결말이 아니라고 말한다. 여성은 여전히 집을 나서고 길 위에 서는 것에서 조차 자유롭지 않다. 그렇기에 ‘플라뇌즈’가 되려는 시도 자체가 성장일 수 있음을 일깨운다. 책의 초반에서 발견되는 다듬어지지 않은 사유와 문장이 불편하기도 했지만 책 한 권을 저자의 성장 과정으로 바라보니 그 또한 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었다. 집을 떠나 사회 생활을 시작하는 여성들, 혹은 지금 서 있는 자리를 떠나 새로운 장소를 발견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는 여성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안정을 추구하는 길이 아니라 불안정성과 불확실함, 예측 불가능 속으로 걸어갈 수 있어야 삶은 기쁨과 즐거움, 그리고 놀라운 성장으로 이어질 수 있다. 진정한 ‘플라뇌즈’는 실제로 문을 열고 거리로 나선다. ‘길을 택하고 그 길이 어디로 이어지는지 보라.(p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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