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 경비원의 일기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20
정지돈 지음 / 현대문학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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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급진적인 사유는 좌파의 소유였어요. 그러나 신자유주의 이후 좌파는 중세 수도원의 수도사 같은 존재가 됐습니다. 보수적인 가치를 지키기 위해 물러났고 지나간 문화와 가치에 매달립니다. 그 사이 우파와 부자들이 급진적 사유를 장악했어요. 이제 상상력을 좌파와 서민들에게 돌려줄 때가 됐어요.


93-94쪽, 『야간 경비원의 일기』(현대문학 핀 시리즈, 2019)

 

 정지돈의 소설 『야간 경비원의 일기』(현대문학 핀 시리즈, 2019)는 야간경비원으로 일하는 대학원생의 시선을 통해 현대 사회와 혁명이라는 거창하거나 허무맹랑할 수 있는 이야기를 재치있게 풀어내고 있다.

 소설의 화자인 나는 문학과 영화에 관심이 있고 프랑스의 코딩학교, 에콜 42에 진학하고 싶어하는 대학원생으로 서울역 앞 서울스퀘어에서 야간경비원으로 일한다. 거기서 도시 해커이자 혁명가인 조지(훈)을 만난다. 조지(훈)은 다국적 기업과 건물주가 소유한 빌딩을 해방시켜 도시와 거리를 사람들에게 돌려주겠다는 꿈을 꾼다. 야간경비원의 생활과 조지(훈), 기한오, 에이치와의 만남과 교류를 블로그 형식의 짧은 글로 이어나가는 소설은 일기인듯, 에세이인듯 묘한 인상을 풍기며 독자를 사로잡는다.

 야간경비원의 시선을 통해 소외된 도시의 기이한 풍경과 현대 사회를 장악한 거대 문제를 일상적이고 소소한 이야깃거리처럼 풀어낸다. 그래서 일기 속에 풀어놓은 단상이나 친구와 주고받는 대화처럼 쉽게 읽히지만 고민의 수위는 상당하다. 인종과 성별, 계층과 직업, 나이와 세대라는 잣대 뒤에 숨은 편견과 차별을 꼬집고, 신자유주의 이후 자본이 지배하는 세계의 흐름과 스트리밍 서비스에 중독된 사회를 비판한다. 나’의 의식과 사고를 쫓아 조각 글을 읽어 나가다 보면 익히 알고 있는 뻔한 현실이 낯설게 다가오고, 의식하지 못했던 현실의 씁쓸한 민낯이 날카롭게 생각의 문을 두드린다. 당연한듯 무시했던 것과 의식조차 하지 못했던 것, 몰라도 그만이라고 여겼던 것에 대해 되새겨보게 된다.

 정지돈 소설 특유의 실제와 허구를 오가는 차용과 인용은 소설을 읽는 내내 수시로 인터넷 검색을 하게 한다. 그러면서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고 사고의 창은 확장된다. 지적 재미가 쏠쏠하다. 또한 아는 이는 다 아는  정지돈식 유머가 군데군데에서 펑펑 등장하니(여기 펑, 저기 펑.) 즐독하시길.

​스트리밍이 지구를 파괴하고 있어요. 기한오가 말했다. 우리의 사고와 생각은 낱낱이 찢어지고 분열된다. 우리는 아무것도 끝마치지 않는다. 보다 만 작품들의 리스트는 끝없이 길어질 것이고 결국 작품을 보다 마는 것이 당연한 일이 될 것이다. 누구도 작품을 끝까지 만들지 않을 것이고 만들다 만 작품들로 이루어진 영화제, 만들다 만 작품들의 아카이브가 형성되겠지만 누구도 그 사실을 모를 것이다. 모두 보다 말 테니까. 그러니까 결국 스트리밍이 인류를 파멸시킬 거예요. 합의도 소통도 연대도 불가능한 미결정의 세계, 넷플릭스 월드, 끝없이 지연되는 유토피아.


24쪽

 

 


이성복 식의 이야기는 문학을 신비화하는 거다, 외로움이나 아픔을 느끼는 사람들이 손쉬운 위안을 얻을 수 있는 수사를 반복함으로써 스스로를 좋은 사람이라 착각하게 만든다. 실제로는 사회나 제도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을 뿐 아니라 주류적 사고를 공고히 하고 소수와 약자를 공격하는 기제를 형성하는 데 도움을 준다, 문학은 지금보다 더 세속화되어야 하는데 지금의 문학은 이미지는 아름다워지고 접근성은 세속화되는 식이다, 반대가 되어야 한다, 따위의 말이었다.


35쪽

 

 

 내가 말했다. 여자는 여자 뒤를 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오히려 여성혐오적인 거 아닌가, 애초에 김혜순, 김행숙, 진은영이 어떤 식으로 묶일 수 있나, 생물학적 여성이라는 요인만으로 게으르게 묶은 거 아닌가 하는 식의 반문이었다.


60-61쪽

 


 

 


경비원은 투명인간이다. 유니폼을 입는 순간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 또는 사람들 눈에는 유니폼만 보일 뿐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

조지(훈)은 말했다. 제1세계에서는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경비원으로 일합니다. 하지만 한국은 다른 인종의 사람을 경비원으로 채용하지 않아요. 그들은 숨어서 일합니다. 모습이 전면에 드러나지 않는 곳,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해야 합니다. 경비원은 투명해야 하거든요.


81-82쪽

 


메인컨트롤러를 장악해 미디어 파사드에 우리의(여기서 우리가 누구인지 모르겠다) 메시지를 송출한다. 경비원들이 모든 빌딩을 점거했으며 다국적 기업과 건물주의 소유에서 건축을 해방시킬 것이다. 도시를 정책의 수단에서 분리시킬 것이다. 거리를 사람들에게 돌려줄 것이다, 서울은 우리의 것이다 등등.


10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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