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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우리의 이름이 되는 것이라고
신유진 지음 / 1984Books / 2019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이런 영화가 좀 있어 보여?”
“아니, 나는 분명하게 설명이 안되는 것들이 그렇더라고. 뭔가 더 있나 싶기도 하고.”
“그냥 나한테는 이 감독의 영화가, 말하자면 눈을 감으면 생기는 잔상들이 있잖아. 그 얼룩처럼……그거 같아.”
“그게 좋아?
“좋은 건 모르겠고, 보이니까. 눈을 감았는데도 보이니까 어쩔 수 없는 거지.”
“복잡하네.”
영화를 보고 극장을 나오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
“영화가 말이야. 알 것도 모를 것도 같고 그래. 그런데 나쁘지는 않네.”
진영이 말했다.
나는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은 것들이 떠다니는 밤공기를 향해 손을 뻗었다. 참으로 가볍게 내리는 그것들이 어느새 우리들의 머리카락과 어깨를 적셨다.
(<얼룩이 된 것들>162~163쪽)
신유진의 소설집 <<그렇게 우리의 이름이 되는 것이라고>>(1984books, 2019)를 읽고 난 후 남은 인상이 그랬다. 좋은 건지 잘 모르겠는데 잔상이 남았다. 내 안에 얼룩처럼 남아서 희미해진 다른 얼룩을 자석처럼 잡아 끌었다. 책 속의 무늬와 비슷하지만 조금은 다른 얼룩이 되었다. 그렇게 알 것도 모를 것도 같은 느낌이 둥둥 떠다니는데, 나쁘지는 않았다.
소설집 속에는 테러로 죽은 ‘이안’을 품고 사는 여자가 있다. 배우를 꿈꾸지만 희망은 보이지 않는 ‘세계’와 그녀보다 더 희망없는 오늘을 사는 남자가 있다. 안락사를 앞둔 연인 곁에서 희미해지는 기억을 더듬는 여자가 있고 세상의 멸시와 아버지의 폭력 속에 ‘은희’를 남겨둔 채 다리를 건너온 내가 있다. 그리고 약물중독으로 낯선 얼굴이 되어 가는 세드릭에게 아무 말도 못하고 돌아와서 담배만 피우는 남자가 있다. 그들이 남겨지거나 돌아선 자리가 매번 외롭고 쓸쓸했다. 어쩔 수 없어 돌아서고도 오래도록 질문을 던지며 서성거렸던 자리와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숨어서 지켜보았던 그곳은 내 안에도 있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오래되었지만 아물지 못한 상처가 희미하게 아렸다.
<<그렇게 우리의 이름이 되는 것이라고>>가 좋은 책이라는 걸 알게 된 건 작가의 말을 읽고 나서다. 자신이 만들어낸 인물들을 외로운 세계에만 남겨놓은 것 같아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든다고 했다. 자신이 마침표를 찍은 지점이 아쉬운 듯 보였지만 그녀는 이렇게 덧붙였다. ‘이야기는 또 다른 누군가를 만나 다시 시작될 것’이라고. 그녀가 완벽하게 닫아 걸지 않은 이야기의 뒷문은 바깥으로 열려 있다. 그건 언제든 다시 시작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기도 했다. 그 틈으로 이안과 세계, 은희와 세드릭은 나에게 건너왔다. 그리고 내 안에 머무는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이름들이 일어서는 그곳에 그들을 보내거나 돌아섰던 내가 있다. 혼자 남은 내가 어쩔 줄 몰라 서성거리고 있다.
“잘 아물지 못한 상처들을 내보이는 일이 이제 부끄럽지 않다. 나의 부주의였고 누군가의 실수였으며 혹은 누구의 잘못도 아닌 사고였던 흔적들을 겁 없이 잡고, 만지고, 움켜줬던 나의 기억이다.
잘 아물지 못한 글을 쓰는 일 역시 부끄러워하지 않으려고 한다. 내게 온 이야기들을, 그것들의 운명을 더는 의심하고 싶지 않다.
좋은 글을 쓰라고, 좋은 사람이 되라고,
자꾸 내가 아닌 어떤 이름이 되어야 한다고 나를 다그치지 않겠다.”
(작가의 말, 203~204쪽)
글을 쓰면 쓸수록 내 글이 미덥지 않았다. 한 편의 글을 쓰고 나서도 완성의 성취감보다 자괴감에 빠지는 일이 많다. 겨우 이정도인가, 결국 또 그 이야기인가, 사고와 문장은 이것 밖에 안되는가. 돌리고 돌려도 꽉 들어맞지 않고 헛돌기만 하는 나사처럼 글은 헐렁해 보였다. 다르게 써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다른 이의 글에 겻눈질했다. 내 것이 아닌 이야기를 생각하고 익숙치 않은 문장을 끄적여 보고, 쓰고 싶지 않은 소재를 떠올려보았다. 그들처럼 써야하는 건 아닌가 하고 여러 번 되물었다.
잘 아물지 못한 상처들을 내보이는 일이 부끄럽지 않고 잘 아물지 못한 글을 쓰는 일이 부끄럽지 않다는 신유진의 문장에서 그녀의 힘을 느꼈다. 부족함을 스스로 인정하면서 그것조차 부끄러워하지 않겠다는 용기, 그것으로 불완전하지만 완전해지는 이야기들을 보았다. 내가 아닌 어떤 이름이 되어야 한다고 다그치지 않겠다는 그녀의 다짐을 내 것으로 간직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