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긴 호흡 - 시를 사랑하고 시를 짓기 위하여
메리 올리버 지음, 민승남 옮김 / 마음산책 / 2019년 12월
평점 :
품절
한낮의 햇살이 한결 부드럽고 포근하게 바꾸어 놓은 공기를 들이마셨다. 봄이 멀지 않았다는 속삭임이 들렸다. 정처없이 걷고만 싶은 마음을 붙잡아 집으로 들어왔다. 생명의 기운을 감지한 마음이 메리 올리버를 외쳤다. 그녀의 순수하고 싱싱한 글을 곱씹어 보기에 이만큼 좋은 때도 없다.
“태양이 남쪽에서 돌아와 햇빛이 강해지면서 마침내 땅은 부드러워지고, 나무에는 새싹이 움트고, 오후는 배회하기에 더넓은 공간이 된다. 파랑지빠귀, 울새, 노래참새, 크고 활기찬 대륙검은지빠귀 무리가 돌아오고, 들판에서는 굴렁쇠 모양 블랙베리 가지들이 부드러운 진자주색을 띠며 본연의 색깔을 되찾고, 연못들의 얼음이 천둥소리를 내기 시작하더니 얼음 조각 사이로 주춤거리는 검은 번개처럼 갈라진 금들이 보인다. 그러면 겨울이 끝난다. 나는 다시 큰뿔부엉이 둥지를 발견하지 못하고 겨울을 떠나보낸 것이다.”
(<<긴 호흡>>, 64쪽, 메리 올리버, 민승남 옮김, 마음산책, 2019)
처음에는 그녀의 글에 포획된 찰나와 순간에 주목했다. 그녀와 함께 숲을 거닐고 여우의 뒤를 쫒았다. 연못에 엎드려 거북이를 지켜보고 부엉이의 울음 소리를 들었다. 그녀의 눈을 통해 들여다볼 때 야생의 세계는 경이로움 자체였다. 우리도 숲을 거닌 적이 있다. 바닷가를 산책한 적이 있다. 하지만 우리의 눈은 그녀처럼 생생하게 풍경을 건져올리지 못했다.
오랜 시간 지속하여 지켜본 자만이 알아챌 수 있는 변화가 있다. 어제의 풍경을 알아야 발견할 수 있는 오늘의 모습이 있다. 우리가 아무리 예민한 눈을 가지고 있더라도 한 두 번 가는 숲에서 볼 수 있는 건 표면적 풍경 뿐이다. 그 안에서 일어나는 세밀한 변화를 눈치채려면 매일 숲에서 보내는 시간이 축적되어야 한다. 그런 사람만이 땅이 부드러워지고 싹이 움트면 오후는 배회하기에 더넓은 공간이 된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 새들의 무리가 돌아오고 블랙베리가 본연의 색을 되찾기 시작하면 겨울이 끝난다는 걸 예감 할 수 있게 된다. 이제 그녀가 보여주는 찰나에서 그 너머의 무수한 시간을 생각한다. 매일 홀로 숲 속을 배회하며 보냈을 비슷하지만 조금은 다른 시간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그녀는 매일 ‘밤의 마지막 커브’가 남아 있는 새벽에 집을 나서 야생의 세계로 들어갔다. 그것이 그녀의 일이고 삶이었다. 그녀에게 일은 걷고, 사물들을 보고, 귀 기울여 듣고, 작은 공책에 말들을 적는 것이다. 그 말들이 모여 글이 되고 책이 되었다. 매일의 산책과 관찰, 기록이 모여 시가 되었고 그것이 삶이 되었다.
그렇다고 <<긴 호흡>> 속에 자연에 대한 예찬만 담겨 있는 것은 아니다. 시인이자 글 쓰는 사람으로서 창작자의 삶과 태도에 대한 이야기도 풍부하게 담겨있다. 시에 빠져들게 된 계기와 그녀를 시의 세계로 이끌었던 시인들에 대해, 그리고 창작과 비평을 아우르는 시론까지 만날 수 있다.
자연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에는 인간을 기준으로 행해지는 구분이나 평가가 전혀 없다. 대상을 이롭거나 해로운 것으로 나누지 않는다. 모든 것이 자연 속에 존재하는 일부이며 그 자체로 놀랍고 경이로운 것이라는 겸손한 시선이 바탕을 이룬다. 시와 문학, 삶에 대한 관점 또한 그렇다. 무언가를 지나치게 옹호하거나 적대시하지 않는다. 어떤 것도 단호하게 단정지어 말하지 않는다.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할 때도 늘 한 발 물러서 있는 그녀를 발견하게 된다.
“그렇다고 그런 감정들이 내가 읽은 모든 책의 가장 명료하고 맛깔나는 서술에서 항상 발견되었던 건 아니고, 심지어 흔히 발견되지도 않았다. 전혀! 나는 거기에 어떤 기술이, 그리고 끈기가 요구되는지 보았다. 척추를 굴렁쇠처럼 구부리고 책을 들여다봐야 하는 긴 노동이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조금 하는 것, 진정한 노력이라는 구원적 행위의 차이를 보았다. 읽고, 그다음엔 쓰고, 그다음엔 잘 쓰기를 열망하는 것, 그 가장 즐거운 환경(일에 대한 열정)이 내 안에서 형태를 갖추었다."
(<<긴 호흡>>, 49~50쪽)
매일 야생의 세계를 거니는 것처럼 글을 쓰는 일도 매일의 꾸준함을 요한다. 그녀는 일찍이 독서를 통해 놀라운 무언가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끈기가 요구된다는 것을 알았고 그것을 삶에 적용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과 진정한 노력을 들인 것 사이에 놓인 구원적 차이를 경험했고 그것이 일(글쓰기)을 하는 형태로 굳건히 자리 잡았다. 가만히 앉아서 얻게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산책에서 조차 매일이라는 시간이 쌓여야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듯이 읽고 쓰고, 또 쓰고, 더 잘 쓰기를 열망하는 과정이 쌓여야 글쓰기는 나아간다고 그녀는 말한다.
“내 삶은 나의 것이다. 내가 만들었다. 그걸 가지고 내가 원하는 걸 할 수 있다. 내 삶을 사는 것. 그리고 언젠가 비통한 마음 없이 그걸 야생의 잡초 우거진 모래언덕에 돌려주는 것.”
(<<긴 호흡>>, 53쪽)
2019년 1월 그녀는 ‘잡초 우거진 모래언덕’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자신이 쓴 글과 온전히 합치된 삶을 살았다. 어느 한 순간 완성된 삶이 아니었다. 매일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진정한 노력을 기울인 삶이었다. 그리하여 완전히 자신의 것이 된 삶으로 자신 만의 삶을 살고 죽음 이후의 모습까지 만들어 내었다. 꾸준하고 지속적인 노력이 하나의 삶을 관통하며 남긴 영롱한 자취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