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책 쏜살 문고
토베 얀손 지음, 안미란 옮김 / 민음사 / 2019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을 본 후 거기에 나오는 노래와 주인공들에 한동안 빠져있던 아이는 자연스럽게 <미녀와 야수>(실사판 영화)를 보게 되었다. 그리고는 주인공 벨에게 완전히 반해버렸다. 매일 영화에 나왔던 노래를 반복해서 들으며 주인공 벨처럼 긴 치마를 입고 춤을 춘다. 며칠전에는 사촌언니한테 물려 받은 한복을 찾아내서는 치마만 입고 행복해했다. 길고 풍성하게 퍼지는 치마는 아이가 좋아하는 분홍색이다. 그걸 입고는 신이 나서 공주가 된 것처럼 빙글빙글 돌면서 춤을 추는 것이다.

 

그날 밤 잠을 자려고 누워 있는데 아이가 말했다.

“한복 치마 입고 빨리 결혼식에 가고 싶다.”

한복은 특별한 날에 입는 것이고 누군가의 결혼식에 갈 때는 특별한 옷을 입는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아이의 발상이 우스웠지만 장단에 맞춰주며 말을 이었다.

“그러게 빨리 결혼식이 있으면 좋겠네……”

그러자 아이가 말을 바꾸었다.

“빨리 결혼하면 좋겠다.”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싶어 물었다.

“누구랑 결혼하고 싶은데?”

 “음……. 보나 언니!!!”

아이는 결혼이 뭔지는 모르지만 좋아하는 사람과 하는 것이라는 건 알았는지 제일 좋아하는 사촌 언니의 이름을 큰소리로 외쳤다. 그러더니 또 물었다.

“왕자님은 누구야?”

 “누가 왕자였으면 좋겠는데?”

 “음……. 몰라.”

 “왕자는 서윤이가 찾아야 돼. 서윤이가 크면서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나게 될 거야.”

잠시 아이는 말이 없었다. 어떤 말은 이해가 잘 되지 않았을 것이고, 어떤 말은 이해하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아이가 어디까지 이해하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더 이상 묻지 않고 잠을 잤다. 하지만 보나 언니가 결혼하고 싶을 정도로 좋은 줄은 몰랐다. 길고 풍성한 드레스를 입는게 너무 좋아 결혼까지 하고 싶은 줄도 몰랐다. 한편으로는 드레스에 빠져 있는 아이가 걱정되기도 했다. ‘공주와 왕자’의 세계에 고정되어 있는 상상과 놀이도 마땅치 않았다. 아이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줘야 할까. 아이와 어떻게 대화를 풀어나가야 할까.

 

 

“사랑은 참 이상해.” 소피아가 말했다. “사랑은 줄수록 돌려받지 못해.”

 “정말 그래.” 할머니가 말했다. “그럼 어떻게 하지?”

 “계속 사랑해야지.” 소피아가 위협하듯이 말했다. “더욱더 많이 사랑해야지.”

할머니는 한숨을 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중략)

“할머니.” 소피아가 말했다. “가끔은 내가 마페를 미워한다는 생각이 들어. 더 이상 마페를 사랑할 힘이 없는데, 그래도 계속 마페 생각만 나.”

소피아는 몇 주일 동안 고양이를 따라 다녔다.

(<<여름의 책>> 토베 얀손, 60쪽)

 

 

무민 시리즈로 유명한 토베 얀손의 <<여름의 책>>에는 할머니와 손녀가 보낸 여름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일상과 놀이가 뒤섞여 있는 시간을 함께하며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는 사이 둘은 서로에게 최고의 친구가 되어 준다.

 

소피아가 무심코 내뱉는 말 속에 담긴 아이의 지혜는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누군가 사랑할 때 상대에게 사랑을 돌려받지 못한다해도 그럴수록 더 많이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아이, 상대가 너무 좋아서 미워지기까지 하는 감정을 경험하고도 그 마음을 어쩔 줄 몰라 힘들어하는 아이의 모습이 사랑스럽다. 할머니는 그런 손녀를 타이르거나 바꾸려하지 않는다. ‘어른’이라는 고정된 역할을 하지 않는다. 둘의 대화가 유쾌하고 즐거우면서 놀랍고 감동적인 이유는 어느 한 쪽도 꾸미거나 보태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좀 기다려 봐!” 한참 흥분한 할머니가 말했다. “아직 말 다 안 했다고! 모든 일을 같이한다는 건 나도 잘 알아. 벌써 끔찍하게 오랫동안 다 같이했고, 힘닿는 데까지 다 보고 살아왔다고. 대단했어. 정말로 대단했지. 그런데 이제는 모든 것이 나에게서 미끄러져 나가는 거 같아. 이제는 기억도 안 나고 관심도 없어. 바로 지금 그게 다 필요한데!”

 “뭐가 기억이 안 나는데?” 소피아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텐트에서 자는 게 어땠는지 말이야!” 할머니가 외쳤다.

 (중략)

“그럼 어떤지 내가 이야기할께.” 소피아가 말했다. “모든 소리가 더 잘 들려. 그리고 텐트는 아주 작지.” 소피아는 잘 생각해보고 말을 이어 갔다. “아주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어. 그리고 모든 소리가 다 들리니까 참 좋아.”

 “그래.” 할머니가 말했다.

 (90-91쪽)

 

 

하나의 완벽한 쌍을 이루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어느 한 명만 있으면 완성되지 않을 것만 같다. 둘이 있어야만 더 완전해지는 사람들, 둘이 있을 때에 더 빛나는 사람들이 있다. 할머니와 소피아가 그렇다. 숲을 가꾸고 나무를 다듬어 조각을 하고 담배를 피는 휴식 시간을 즐기는 할머니의 삶은 소피아가 있을 때 생기가 돈다. 호기심에 가득 차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고 자신 만의 비밀의 세계를 만드는 소피아에게도 할머니가 있을 때 한 발짝 더 나아갈 수 있는 용기와 지혜가 생긴다.

 

소피아가 보여주는 아이의 세상은 단순하고 유쾌하면서도 의외의 복잡성과 진지함으로 놀라움을 선사한다.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소피아를 대하는 할머니의 태도이다. 대충 적당히 둘러대거나 소피아의 말을 흘려 넘기는 법이 없다. 의식하지 않는 자연스러운 대화, 진짜 친구 사이에서나 가능한 서스름없는 대화가 둘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설명하기 어렵고 난처한 것, 말하기 꺼려지는 것도 할머니의 말을 통해서는 다 괜찮아진다. 소피아 또한 할머니 앞에서는 망설임이 없다.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거리낌없이 이야기한다.

 

아이와의 대화는 늘 조심스럽다. 어디까지 솔직해도 되는지 저울질하느라 대충 얼버무리는 때가 많다. 답이 어려워 간신히 질문만 하기도 한다. 자주 어른의 잣대로 요구사항만 늘어놓는다. 섣불리 답을 알려주려고 하거나 아이의 생각을 바꾸려 할 때도 있다. 생각과 마음을 자연스럽게 풀어내는 것도 어렵다. 마음 속 어른은 자주 이렇게 타일렀다. 너무 솔직한 것은 어른스럽지 않다고, 아이가 몰라도 되는 세상이 있다고.

 

할머니와 소피아의 대화는 서로에게 다가가려는 대화였다. 서로에게 솔직하게 마음을 터 놓는 그런 대화, 격의없지만 애정이 담겨 있고 평범한 이야기 속에서 배우고 자라나게 해주는 대화 말이다. 묻고 답하는 속에서 둘의 세계는 가까워졌고 때로는 하나로 포개어졌다. 유년과 노년이라는 극과 극의 세계가 어우러지는 여름은 신비로운 초록으로 아름다웠다. 딸아이와 나의 대화가 할머니와 소피아의 대화를 닮아갔으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