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부 매뉴얼
루시아 벌린 지음, 공진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많이 배운’ 여자라서 청소부들 사이에서도 잘 받아주지 않는 메기의 삶은 버스를 타고 도시를 떠도는 이방인의 것처럼 느껴진다. 42번에서 43번, 33번에서 40번으로, 버스에 몸을 싣고 쓸쓸한 거리의 풍경과 사람들을 관찰하는 그녀의 시선은 감정의 물기를 배제한 채 멀찍이 떨어져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상실한 슬픔과 고통으로 죽음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삶은 그렇게 스스로를 이방인의 자리로 옮겨 두는 일일까. 루시아 벌린의 소설, <청소부 매뉴얼>에 등장하는 메기는 청소부 일을 하면서 틈틈이 수면제를 모은다.

 

 소설 속 메기가 청소를 하려고 찾아간 집들은 저마다의 사정이 있다. 남편이 바람을 피는 제슬 부인은 약을 먹으며 매사 깜박하는 게 일이고, 정신과 의사 부부인 블룸씨 댁은 여자가 각성제를 먹을 때 남자는 진정제를 먹는다. 치울 게 하나도 없이 언제나 변함없는 집의 버크 부인은 멈춰버린 삶과 같은 인상을 풍기고, 요한슨 부인은 여섯 달 전 남편을 잃은 이후 아침, 점심, 저녁이라는 일상의 시간을 상실한 채 조각그림 맞추기에만 몰두하고 있다. 견고한 집에 청소부를 부릴 만큼의 여유가 있더라도 제각각의 문제는 있는 것이다. 메기는 집들의 사정을 살피면서 청소부로서의 매뉴얼을 작성하기도 한다.

 

나는 일을 마치고 가면서 언제 또 내가 필요하겠는지 물었다.

“알 수 없지(Who knows?).” 요한슨 부인이 말했다.

“네…….아무래도 상관없어요(Anything goes).” 내가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함께 웃었다.

테리, 사실 나는 전혀 죽고 싶지 않다.

<청소부 매뉴얼> 중에서

 

 버스를 타고 청소하는 집들을 오가며 거리를 담담히 훑어내는 메기의 시선은 누군가에게 상처주는 말과 행동을 서슴지 않는 이들을 놓치지 않지만 모르는 이가 손을 흔들어도 흔쾌히 하던 일을 멈추고 되받아 손을 흔들어주는 따스함도 찾아낸다. 세상에서 자신을 단절하기라도 하겠다는 듯 사방에 두껍고 어두운 종이를 둘렀지만 종이와 종이 사이로 희미하게 새어나오는 빛을 막을 수는 없다는 듯. 내내 감정을 도려내고 생략했던 그녀가 울음을 툭 터뜨릴 때 거기서 흘러나오는 것은 삶과 사람들에 대한 애정과 열망이었을 것이다. 

 

 레이먼드 카버와 비교되는 루시아 벌린의 소설은 감정의 절제와 생략으로 독자에게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 버스와 버스 사이, 집과 집 사이에는 무수한 공백이 있다. 비어있지만 무언가로 차오르는 공백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이가 절망적인 고통과 아픔을 삼켜내는 힘이 그 곳에 비밀스레 담겨 있는 것이다. 

 

 <청소부 매뉴얼>(원제는 <자살 유언 쓰기 매뉴얼>)의 작가 루시아 벌린은 한때 청소부로 생계를 연명할 정도로 생활이 어려웠다고 한다. 어린 나이에 결혼하여 두 아들을 낳았지만 둘째를 임신했을 때 남편은 새 여자를 데리고 이탈리아로 떠났다. 그후 두 번의 결혼과 이혼 이후 홀로 네 명의 아이를 키우며 생계를 꾸려야했다. 청소부, 교환원, 병원 사무원 등 여러가지 일을 전전하며 짬이 나는 대로 단편을 쓰는 것이 그녀의 삶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경험을 소설 속에 녹여 내었고 인물의 이름만 바꾸어 다른 상황 속에 배치하기도 했다. 그런 이력을 알고 나면 메기가 찾아다니며 청소를 하는 집의 단면들 속에 작가의 삶이 퍼즐 조각처럼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 싶어진다.

 

“나는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혼자였다. 첫 번째 남편이 떠났을 때 나는 향수병에 걸렸다. 우리 부모님은 내가 너무 어려서 결혼한 것도 모자라 금방 이혼했다고 나와 의절했다. 집에 가려고, 나는 집에 가려고 글을 썼다. 내가 안전할 수 있는 곳. 나는 현실을 교정하기 위해 글을 썼다.”
-루시아 벌린

 

 

 집에 가기 위하여, 메기는 청소를 한다. 집에 가기 위하여, 버스를 탄다. 그리고 사람과 세상, 그리고 삶을 관찰한다. 집에 가기 위하여. 자신이 안전할 수 있는 곳을 찾기 위해, 현실을 교정하기 위해 그렇게 돌고 돈다. 그러다가 누군가와 눈을 맞추며 큰 소리로 웃고 사람들의 환대가 비어져 나오는 빨래방 같은 곳을 만난다. 기적처럼 그녀의 눈에 비친 일상의 순간들이 그녀를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 주었기를, 바라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