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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와 영화 ㅣ 말들의 흐름 2
금정연 지음 / 시간의흐름 / 2020년 4월
평점 :
4월 만기였던 가게는 코로나로 인해 보러 오는 사람의 발길이 뚝 끊겨버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로 놓여있다. 다음 세입자는 영영 나타날 것 같지 않고 더 이상 버티기도 힘들 것 같아 7월에는 가게를 빼기로 말해두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정리하기로 마음을 먹었기 때문에 아쉬움 같은 건 없다. 오히려 하루 빨리 끝냈으면 싶다. 그러므로 7월이 되면 내 인생의 실패담이 하나 더 늘어나게 된다. 손해를 보고 물러 선 일이 하나 더 늘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하루 빨리 그날이 왔으면 좋겠다. 실패하기로 마음먹고나니 다 괜찮았다. 실패는 하겠지만 무언가는 남을 테니까. 실패하기 때문에 다시 시도할 테니까. 실패는 기필코 수선될 기회를 찾을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금정연은 <담배와영화>에서 ‘담배를 피우지 않고 영화도 보지 않는’ 자신이 이 책을 완성할 수 있을지 회의하면서 글을 시작한다. 자신의실패를 예감하면서, 브래들리 쿠퍼가 토크 쇼에 나와 닐영의 노래 <강을따라 아래로>를 에어 기타로 연주했던 이야기를 하면서, 비평은 글로 가지고 하는 에어 기타라고 했던 데이브 히키의 말을 언급하면서. 영화 평론가 기리쉬 샴부, 고다르,유운성, 달론느, 이탈로 스베보, 오환기, 리처드 예이츠, 데이비드 실즈 등 무수한 이들의 책과 말을 언급하며 이야기는 돌고 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하는 질문보다 도대체 이 사람들이 누구지?, 하는 물음이 떠돌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인용에 도대체 얼마나 책을 많이 읽은 거야!,하고 감탄하다보면 어느 순간 섬광처럼 눈 앞이 번쩍하게 된다. 뚜껑이 닫혀있는 피아노를 연주하는 드뷔시를 언급했던 로베르 브레송의 문장때문이다. ‘현실로 현실을 수선하기’.
금정연이 나열했던 무수한 인용들이 거기로 향하고 있었다. ‘현실을 현실로 수선하기’. 책의 도입부에서 그는 정의내렸다. 담배는 시간을 연기로 바꾸고 영화는 시간을 공간으로 바꾸는 픽션이라고. 그리고 많은 인용을 풀어내고 안착한 지점에서 다시 한 번 말한다. 현실을 현실로 수선하는게 픽션이 하는 일이라고. 픽션은 현실을 또 다른 현실로 수선한다. 그런 픽션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야말로 반복이다. 브래들리 쿠퍼는 전설적인 뮤지션의 곡을 에어 기타로 완벽하게 소화하기 위해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다고 했다. 허공에서 움직이는 손동작으로 연주하는 에어 기타지만 ‘닐영’과 같아지기 위해 반복에 반복을 거듭했던 시간이 있었다. 그리고 무대 위에서 어떤 순간엔 기적적으로 ‘닐영’이 되는 순간이 벌어진다.
그는 담배를 피우지 않고 영화를 보지 않으면서도(이전보다 덜 보면서) 담배와 영화를 픽션이라는 교집합으로 묶어내는데 탁월하게 성공한다. 그가 말하는 픽션이란 ‘현실을 현실로 수선하기’. 즉 반복에 반복을 전제하는 것이다. 이어 왕가위(내 사랑 왕가위와 양조위)와오손 웰즈의 영화를 통해 영화에서 다루는 픽션이란 무엇인지(‘삶을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어 주는 픽션)를 이야기하고 마지막 장에서는 야콥슨과 튀르포, 롤랑 바르트를 통해 글쓰기로도 이야기를 확장해나간다. 그러면서 픽션에 있어 중요한 것은 그것의 완성이 아니라 그것으로 향하는과정, 도정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그렇게 이 책의 주제는 명확해진다.
담배와 영화는 픽션이다. 픽션은 현실을 현실로 수선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현실로 현실을 수선하며 가장 진짜 같은 픽션을 만드려면 반복에 반복을 지속해야한다. 하지만 결국 우리는 그 일에 실패하고 말 것이다. 그렇더라도 중요한 것은 끝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픽션)의 과정 속에 있다. 이야기(픽션)를 만들어 가는 과정 속에서 혹은 이야기(픽션)가 만들어지면서 이미 ‘삶은 견딜’만한 것이 되어있을 테니까. 이것이 <담배와영화>에서 금정연이 풀어내고 있는 이야기였다. 그의 결론은 이랬다. 어차피 우리는 실패할 것이다. 하지만 그게 뭐 어때?, 라고.
'책은 실패에 대한 책이 맞다. 나는 담배를 끊는 데 실패했고 영화를 증오하는 데 실패했으며 브루스 윌리스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데 실패했다.'라고그는 말한다. 실패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예감했다는듯, 그리고 기껍다는 듯 그 사실을 받아들인다. 그가 실패를 두려워했다면 이 책이 나올 수 있었을까. 실패를 하더라도 반복과 반복을 거듭하는 과정의 의미를 알았기에이 놀라운 책이 탄생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다양한 인용과 현실 속 픽션을 오가며, 픽션을 픽션으로 바꾸며, 담배를 피지 않고 영화를 보지 않으면서도<담배와 영화>라는 책을 쓰는데 멋지게 성공한다. 금정연 작가님, 실패해(실패를 모르는 책을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실패하더라도 상관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린이미 실패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실패하더라도 지금의 우리와 그리 큰 차이는 없을 겁니다.
- 페드로 알모도바르
<담배와 영화> 금정연, 시간의 흐름
금정연도, 페드로 알모도바르도 실패 따위는 상관없다고 말한다. (물론 그들은 이미 여러 면에서 성공한 사람들이지만.) 그 말에는 패배감보단 무심한 의연함이 감돈다. 실패를 두려워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는 것보다 실패를 하더라도 반복에 반복을 하겠다는 무모하지만 멋진 용기 같은 게 있다. ‘현실을 현실로수선하기’라는 픽션에 대한 정의가 삶에 대한 정의로 재해석된다. 오늘을 오늘로 수선하기, 즉 실패한 오늘을 내일의 오늘로 수선하기. 그렇게 반복함으로써만 우리는 더 나은 오늘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인생은 계속되는 동안 계속’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