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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산책 ㅣ 말들의 흐름 4
한정원 지음 / 시간의흐름 / 2020년 6월
평점 :
“내가 보는 것이 결국 나의 내면을 만든다. 내 몸, 내 걸음걸이, 내 눈빛을 빚는다(외면이란 사실 따로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닐까. 인간은 내면과 내면과 내면이 파문처럼 퍼지는 형상이고, 가장 바깥에 있는 내면이 외면이 되는 것일 뿐. 외모에 관한 칭찬이 곧잘 허무해지며 진실로 칭찬이 될 수 없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하려면 이렇게. 네 귓바퀴는 아주 작은 소리도 담을 줄 아는구나, 네 눈빛은 나를 되비추는구나, 네 걸음은 벌레를 놀라게 하지 않을 만큼 사뿐하구나). 그런 다음 나의 내면이 다시금 바깥을 가만히 보는 것이다. 작고 무르지만, 일단 눈에 담고 나면 한없이 부풀어 오르는 단단한 세계를.
그러므로 산책에서 돌아올 때마다 나는 전과 다른 사람이 된다. 지혜로워지거나 선량해진다는 뜻이 아니다. ‘다른 사람’은 시의 한 행에 다음 행이 입혀지는 것과 같다. 보이는 거리는 좁지만, 보이지 않는 거리는 우주만큼 멀 수 있다. ‘나’라는 장시(長時)는 나조차도 미리 짐작할 수 없는 행들을 붙이며 느리게 지어진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나 자신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지만,
바로 그런 이유에서 다시 나 자신이 되었다.
로베르토 발저 <<산책>>” (25-26)
여기 산책의 시간을 무용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있다. 오가는 길에는 버려진 사물과 풍경에 눈길을 보내고 기어코 주머니에 담아오는 사람이. 길고양이에게 먹이와 물을 챙겨주고 커다란 수퍼가 아니라 트럭을 몰고 다니며 과일을 파는, 다리를 절뚝이는 아저씨에서 과일을 사서, 길가에 앉아 담배를 피우는 단칸방의 아저씨에게 과일을 나누어 주는 사람이다. 그이는 애초 소록도나 폐쇄 정신 병동 같은 외딴 곳을 찾아 들어가 긴 시간 자원 봉사를 했던 이력을 갖고 있다. 있는지도 몰랐던 수도원을 찾아가 침묵 속에 머물기도 했다. 그이는 일찍이 어둠과 그늘 아래서도 마음을 헤아리는 법을 배운 것 같다. 그가 쓴 글은 투명하도록 마알간 고백같아 이것이 시가 아니면 무얼까, 되묻게 된다. 그가 쓴 시 같은 글 속에서 또 다른 시를 만나고, 그가 걸은 산책 속에서 또 다른 산책을 한다.
“걷다가 죽어가는 벌레 곁에 있어주고, 창을 내다보는 개에게 인사하고, 고양이의 코딱지를 파주며 탕진하는 시간이 나는 부끄럽지 않다. 그 시간의 나는 진짜 ‘나’와 가장 일치한다. 또한 자연이나 스치는 타인과도 순간이나마 일치한다. 그 일치에 나의 희망이 있다. 부조리하고 적대적인 세계에서 그러한 겹침마저 없다면, 매 순간 훼손되는 존재를 어떻게 바라보고 견딜까.”
(157)
처음에는 그 마음의 세계가 내가 서 있는 현실과 동떨어진 것 같아 그 사이의 거리감을 영영 떨쳐낼 수 없을 것 같았다. 돌아서서 걸어버린지 오래되어 다시는 닿을 수 없는 세계 같았다. 하지만 책장을 덮을 즈음엔 까마득했던 그 거리 속으로 이미 들어선 것 같았다. 멀어졌지만 전혀 다른 방향에 서 있지는 않다고 생각되었다.
“매 순간 ‘방향’을 선택한다. 행복을 목표로 삼는 방향이 아니라, 앞에 펼쳐진 모든 가능성 중에 가장 선한 길을 가리키는 화살표를 따른다. (…)
그러니 역시 ‘행복’이라는 낱말은 없어도 될 것 같다. 나의 최선과 당신의 최선이 마주하면, 나의 최선과 나의 최선이 마주하면, 우리는 더는 ‘행복’에 기댈 필요가 없다.” (34-35)
어느 쪽으로 마음을 기울이고, 몸을 움직일 것인가의 문제였다. 삶의 구체적인 방식과 모습은 다르더라도 향해가는 곳은 같을 수 있다고. 혹은 영영 닿을 수 없는 선한 세계일지라도 바라보기라도 하자고. 나라는 장시(長時)는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니까, 앞으로 뒤따를 행에는 조금 더 선하고 아름다운 것을 향한 미약한 발걸음이라도 새겨보자고.
“뚜렷하고 익숙하며 사라지지 않는 것은 이 세계 어디에도 없음을 알게 되어서이다.” (124)
모두가 ‘뚜렷하고 익숙하며 사라지지 않는 것’, 성공이나 안정 같은 것을 꿈꾸지만 작가는 그런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일찍이 알아버린 것 같다. 그렇게 나와 세계의 불안정성을 온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였기에 그의 글은 초연한가보다. 잠시 그런 척, 하는 선함이 아니라 삶 속에 녹아 든 선함에는 진정성이 있다. 할머니 수녀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는 말처럼, 그의 삶에는 수도승의 것처럼 깨끗한 기운이 감돈다. 새벽의 어스름 속으로 아침의 빛이 스며들 때 열었던 책장이 이제 닫히려 할 때 등줄기로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한없이 아름다워서.
연약해서 고통스러운 것들, 버려지고 소외된 구석, 그것도 아니라면 한 조각의 빛과 하늘, 밤새 내린 눈에 마음과 몸의 방향을 향하게 하고 싶다. 지금 창 밖에 내리고 있는 비와 나 사이, 그리고 앞에 놓인 책과 나 사이, 그 사이에 흐르는 무엇을 쉽게 ‘행복’이라 부르지 않고 조심스레 다른 것으로 이름 붙이려는 마음으로, 그와 같이 걷고 싶다. 당신도 같이 걸으면 좋겠다.
“모든 시작이 이런 말이면 어떨까요. 같이 걷자는 말. 제 마음은 단번에 기울 것입니다.” (1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