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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든 가능하다 ㅣ 루시 바턴 시리즈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7월
평점 :
대학교를 휴학하고 대입시험을 다시 준비하던 시절이 있었다. 매일 저녁 엄마와 너른 운동장을 걸으며 운동을 했었다. 하루는 속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시험을 다시 보는 이유와 그렇게 해서 얻고 싶은 일에 대해서였다. 잘 다니던 학교를 쉬면서 시험 공부는 하고 있는 딸의 상황이 답답했을 엄마에게 어떤 식으로든 인정을 받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내 이야기를 듣고도 엄마는 걱정스런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엄마의 대답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 내가 했던 답변만큼은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잘 될거야. 그냥 잘 될 거라고 믿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이런 막연한 확신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그 때는 그랬다. 내 인생이 크게 잘못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믿었고 그 믿음은 확고했다.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경험을 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나이가 들면서, 예상치 못한 비극을 맞닥뜨렸고 실패가 거듭되었다. 그러자 확신은 옅어 졌다. 이제는 최악의 경우를 먼저 생각한다. 어떤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삶은 계속 되어야 할테니까, 비극의 백신을 미리 맞아 둔다. 산다는 것은 그런 힘을 비축해 둬야하는 것이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비극의 백신같은 책이다. 우리 삶이 생각보다 쉽게 비틀어지고 망가지며 사랑했던 사람에게 배신당하고 상처입을 수 있다는 것을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책을 구성하고 있는 아홉 개의 이야기는 입을 모아 읊조린다. 우리 삶이 잘못되는 일은 무엇이든 가능하다고.
지독한 가난, 아버지의 폭력과 어머니의 외도, 사랑하는 사람의 배신으로 마음에 커다란 구멍이 나 버린 사람들이 있다. 삶이 지속될 수 있을까 싶게 위태로운 순간에도 그들은 그저 살아갈 뿐이다. 그럼에도 사랑한다고 말하고 이정도면 괜찮은 거라고 긍정한다. 상처를 끌어안고 손을 내민다.
"우리 모두 너나없이 엉망이야. 앤젤리나.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 사랑은 불완전해, 앤젤리나. 하지만 그래도 괜찮아."
(P75)
삶은 누구도 예측할 수 없고 우리의 사랑 또한 불완전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할 때 이상하게 비어 드는 다행감이 있다. 그 순간 주변의 인간 군상을 바라보는 시선에 연민의 감정이 차오른다. 저 밖의 불행한 삶이 남의 것이라는 경계는 허물어지고 언제고 나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삶의 비극을 제대로 이해할 때 우리는 기꺼이 타인에게 손을 내밀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불가능함에도 지속되는 사랑과 서로에게 내미는 선의가 우리의 삶을 가능하게 한다.
“곧 구급차가 속도를 높이자 에이블은 공포가 아닌 묘하고 강렬한 기쁨을 느꼈다. 온갖 문제들이 그 껍질이 벗겨진 채로, 혹은 지금도 계속 벗겨지면서 돌이킬 수 없이 그의 통제를 벗어나는 데서 오는 지극한 행복감을…… (중략) 누구에게나 무엇이든 가능하다.”
(P346~347)
삶이 완전할 것이라는 믿음은 더이상 없다. 삶의 불완전함을 인정하자 삶의 비극 또한 긍정할 수 있었다. 엉망진창이더라도 살아나갈 힘이 생겼다. 그러자 책의 제목이 다시 읽혔다. 모든 것이 불완전할지라도 삶은 무엇이든 가능하게 한다라고.
살아간다는 건 결코 다다를 수 없는 ‘완전함’을 향해 멈추지 않고 걸어가는 일일 것이다. 다다를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럼에도 애써보는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