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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앤드루 포터 / 문학동네 / 2019년 7월
평점 :
당시에는 명확하게 알지 못했지만 지나서 돌아보면 그 이전으로 절대 돌아갈 수 없다는 걸 감지했던 순간이 삶에 드문드문 놓여 있다. ‘문득 사건이 발생한다, 평범한 사람이 그 사건의 의미를 해석하느라 고뇌한다, 마침내 치명적인 진실을 손에 쥐고는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자신이 더 이상 옛날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단편소설은 대개 그 깨달음의 순간에 멈춰 있다고 신형철은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 썼다. 앤드루 포터의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에 실린 단편들은 신형철의 ‘범박한 정의’에 대한 모범답안처럼 보인다. 앤드루 포터는 내내 교묘하게 숨기어 독자가 마지막에 가서야 진실을 목도하게 하는 재주를 부리지 않는다. 오히려 담담하게 진실을 고백하는 쪽을 택했다. 그 순간 나의 삶이 진실에 베이는 것을 보았다고, 묵묵하게 회상하는 주인공이 있을 뿐이다. 알면서도 베이고야 마는 칼날이 삶의 도처에 놓여있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그럼에도 피할 수 없기에 더 강하게 그 날을 부여잡게 되는 순간이 있다고.
보이지 않는 균열이 시작되는 것을 감지하지 못한 채 파국을 맞닥뜨렸을 때 우리는 삶이 난폭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포터의 소설 속 주인공은 최소한 아무것도 모른 채 파국에 내던져지지는 않는다. 그것이 상처가 될 것을,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예감하면서 속으로 삼킨다. 나의 상처가 타인에게 또 다른 상처가 되지 않기를 바라며, 때론 말하지 않는 것이 상처를 치유하는 법이라도 된다는 듯. 그렇다. 포터의 소설 속에는 진실을 끝내 말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말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표제로도 선택된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은 그 중 단연 빛난다. 주인공 헤더는 출중한 외모에 전도유망한 미래가 보장된 콜린과의 결혼을 예감하면서도 자기보다 서른 살이나 많은 로버트와의 만남에서 ‘따스한 일렁임과 부드럽고 포괄적인 온기’를 느낀다. 로버트에게 기우는 자신의 마음을 설명할 길이 없어 마음 속에 비밀의 방을 만들었던 헤더는 그 방의 존재가 콜린에게 드러났을 때 그녀와 콜린 사이에 놓여있었으나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절대적 거리를 목도하게 된다. 헤더가 로버트에게 가졌던 감정과 콜린에게 느낀 사랑은 하나의 단어로 설명되지 않는 감정들이다. 헤더의 감정을 분석하려면 ‘로버트의 책상 위에 놓인 등불의 빛’과 ‘로버트의 와인’에 대한 이해가 필요했다. 그러니 우리의 감정을 형성하는 이론이 있다면 어떤 상황을 구성하는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이 아닐까 싶어진다. 앤드루 포터가 촘촘하게 짜낸 문장들 속에는 헤더가 로버트와 보낸 시간의 분위기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 시간의 빛과 물질을 통해 우리는 그들의 감정을 손에 잡힐 듯 이해하게 된다.
말할 수 없는 것을 품고 있는 한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말할 수 없기 때문에 돌아갈 수 없는지, 돌아갈 수 없기에 말할 수 없는 것인지, 어느 것이 먼저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돌이킬 수 없다면 차라리 말하지 않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포터의 소설 속에는 그렇게 비밀의 순간을 쥐고 끊임없이 만지작거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을 바라보는 남성 작가의 시선에서 지극한 섬세함을 느낀다. 그리고 그 섬세함 뒤로 배어 있는 온기가 얼마나 따뜻한지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