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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다를 수 없는 나라
크리스토프 바타이유 지음, 김화영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10월
평점 :
"해가 빨리 졌다. 지평선과 오렌지빛 바다와 숲이 온통 벌겋게 타올랐다. 해는 서쪽의 산 너머로 사라졌다. 밤의 수런거리는 소리가 땅 위를 뒤덮기 시작했다. 고요한 논들에 하늘이 비쳤다. 숲속에서 짐승 우는 소리가 들렸다. 더위는 물러가지 않고 여전했다.” p60
시적 표현을 담은 간결한 문장이 적요한 풍경을 정확하고 아름답게 포착해낸다. 그 문장을 읽다보면 묘사된 풍경이 고스란히 내 안으로 들어오는 기이한 경험을 하게 된다. 단 하나의 문장이 외롭게 적혀 있는 여백이 많은 페이지에서 조차 글로 풀어 쓰지 않은 무수한 풍경이 일렁여 한참 머물러 있어야 했다. 고독한 삶을 버텨내는 실존에 대한 성찰이 아름답게 수 놓인 작품 <다다를 수 없는 나라>를 작가가 스물 한 살의 어린 나이에 완성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이 짧은 소설은 18세기, 프랑스 혁명으로 이어지는 어지러운 정치 상황에도 불구하고 국외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던 프랑스와 중국의 지배에서 막 벗어나 세를 확장하려는 왕조의 분쟁, 서양의 침입과 포교 활동으로 인한 혼란기의 베트남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일정 부분 당시의 모습을 빌어온 것이 분명하지만 시적 은유와 신앙을 넘어선 사랑, 인간 실존에 대한 신성한 사유가 넘실거려 단순한 역사 소설로 치부할 수 없게 한다.
이야기는 어린 황제에 대한 동정심에서 비롯되었으나 새로운 세상을 일구겠다는 포부로 베트남으로 출항하는 프랑스 선교단에서 시작한다. 배는 긴 시간이 걸려 간신히 베트남에 도착하지만 프랑스 내의 혁명 상황에서 그들의 존재는 잊혀져간다. 하지만 그들은 망각과 외로움, 낯선 환경 속에서도 묵묵히 자신들의 삶을 이어간다.
베트남으로 떠난 수도사와 수녀들이 서서히 본국(프랑스)에서 잊혀지고 마침내 완전히 기억에서 지워지는 것을 지켜보는 사이 가슴이 먹먹해진다. 그들은 사람들에게서 잊혀지면서 급기야 자신마저 잊어버리게 된다. 하지만 길을 잃어버린 것 같은 그곳에 이르러서야 그들은 ‘군더더기 없는 핵심’만으로 존재하는 어떤 극에 다다르게 된다.
“그들은 망각을 택했었고 그 속에서 무한히 존재하는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p138
서서히 잊혀진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나의 존재가 잊혀졌다는 것을 자각할 때의 외로움과 절대적 고독을 상상해본다. 세상에서 누구도 나를 찾지 않고 기억조차 하지 않을 때 삶은 어떤 힘으로 지탱될 수 있을까. 한 아이의 엄마인 나는 내 품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작은 아이를 보며 하루하루를 살아낸다. 아이의 순수한 웃음을 보기 위해 하루를 시작하고 그런 아이의 보드라운 포옹이 그리워 서둘러 하루를 마감한다. 그런 존재가 사라진다면, 나를 아는 사람들에게서 내가 잊혀진다면, 삶은 어떤 형태로 지속될 수 있을까. 아득해진다.
하지만 <다다를 수 없는 나라> 속에서 생생하게 펼쳐졌던 고독의 세계가 세상에서 잊혀지는 삶을 마음 한 켠에서 꿈 꿔 보게 한다. 익숙한 나를 잊어버리고, 나를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서도 잊혀진 후 내 안의 새로운 존재를 배우고 발견하는 삶, 완벽한 고독에 휩싸일지라도 가장 단순하고 핵심에 가까운 어떤 것을 발견하는 삶을 말이다. 옮긴이 김화영의 표현처럼 “만남을 찾아가는 망각의 여정”이 고요하게 우리를 유혹한다.
<다다를 수 없는 나라>를 읽는 동안 짧은 문장은 느리게 읽혔다. 단문과 단문 사이의 작은 공간이 까마득히 멀게 느껴지기도 했다. 가끔은 문장들 사이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그러는 사이 깊이를 알 수 없는 적막의 세계에 둘러싸였고 마침내 책장을 덮었을 때 이 작은 책이 형성한 거대하고 아름다운 세계에 잠겨 침묵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