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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로주점 - 하 열린책들 세계문학 178
에밀 졸라 지음, 유기환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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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졸라의 대표작인 루공 마카르 총서 20권 중 대표작인 목로주점을 보면서 내내 불쾌한 감정을 느꼈다. 에밀 졸라는 유전, 그리고 환경에 따른 인간의 변화와 몰락을 연구하고자 작품을 그렸다. 민중의 문학이라는 미명 아래 사회적으로 소외되어 있는 사람들을 관찰하고 그들의 삶을 문학이라는 표현 방식으로 그린 것이다.

목로주점의 주인공 제르베즈와 그의 남편 쿠포는 본래 성실하고 착한 성품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자신의 앞에 주어진 짐을 닦고 치울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목로주점을 싸구려 증류주를 마시면서, 맛있는 음식에 목매달기 시작하면서 변화했다. 성실한 일꾼이었던 그들은 스스로 몰락을 자초했고 씁쓸한 결말을 맺었다.

19세기 민중의 삶이 실제로 이러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에밀 졸라가 가진 관조적인 태도가 불쾌하다. 그들의 삶을 연구하고 그린다는 태도, 그리고 그를 토대로 작품을 만들고 스스로 민중의 작가라고 떠들어댄 것도 불쾌하다. 그는 민중이 아닌데? 민중의 삶을 관찰하는 사람이지, 그는 민중이 아니다. 그는 지식인으로서 자신의 작품이 가지는 논란을 알았을 테지만 그에 개의치 않았다. 프랑스 지식인으로서 자신의 역할이 그것에 있다고 생각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가 가진 정의의 심정은 그 작품을 읽고 보고 느낄 민중의 심정을 전혀 고려치 않은 영역이다. 민중의 작가가 그린 끔찍한 민중의 삶, 그리고 유전과 환경으로 엮어낸 벗어날 수 없는 민중의 역사는 충분히 민중을 불쌍하기 이를 대 없이 만들어버린다. 에밀 졸라는 민중이 피폐해지더라도 전혀 상관이 없다. 게다가 그의 작품은 유전이라는 명목으로 그들을 모두 같은 처지의 사람으로 만든다. 분명 열심히 노력해 살지만 국가와 제도 등에 의해 도움을 받지 못한 사람이 있을 테고, 뜻하지 않은 불행으로 벗어날 수 없는 가난에 허덕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들의 삶이 가난한 것은 사실이지만 개인이 가진 역량과 인간성, 도덕성, 성실성은 각기 다르다. 누군가는 성실하고, 누군가는 목로주점의 주인공처럼 타락하고, 누군가는 가난에서 벗어나기도 한다. 민중이라도 다 같은 모습만 가진 게 아니다. 민중에게도 더 좋은 사랑이 있고, 따뜻함이 있고, 좋은 인간의 관계가 있다. 하지만 에밀 졸라의 작품에 나오는 민중은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고, 저주하고, 무관심하다. 자신의 모습을 이렇게 그려놓는 '민중의 작가'가 과연 좋을 수 있을까?

에밀 졸라는 분명 대단한 작가다. 역사가 증명한 대단한 작가인 것은 분명하다. 그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나. 그가 가진 이른바 적선을 하겠다는, 아니면 사회적으로 발생되는 문제를 수면 위로 끄집어 내어 그들을 관철의 대상으로 삼겠다는 태도는 분명 좋지 못하다. 에밀 졸라가 가진 연구와 관찰의 태도는 그들을 인간으로 보지 않는다. 단지 비슷한 행동양식을 가진 짐승과 비슷한 존재들의 집단일 뿐이다. 모르겠다. 사실 '나는 고발한다.'에서 본 에밀 졸라는 상당히 국가 중심적인 태도를 가졌고, 그의 고발문은 '문제를 문제로 지적해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어찌 프랑스인이 이럴 수 있는가?'에 더 가까웠다. 프랑스라는 국가 안에서 저주받은 민중을 루공 마카르 총서라는 방식으로 드러내는 게 진짜 민중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었을지 나는 의문이다. 대체 무슨 의도였을까? 스스로 민중을 위한 작가라고 말한 사람이 아닌 이 작품이 가진 관조적 태도가 나는 상당히 불쾌하다.

과거 15세기에는 가난하고 일을 하지 못하는 사람을 한곳에 모아 강제 수용, 강제 노동을 시켰다. 그들이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고, 그들을 도와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인간을 만들어 내겠다는 의도였다. 사실 지금도 이와 비슷한 시선으로 사회적 약자를 바라보는 경우가 많이 존재한다. 그들을 돕는 모습, 태도, 사업을 진행하는 방향성이 인간 중심에 있지 않고, 불행한 자에게 단지 돈 한 푼을 던져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이 되지 말라는 식의 태도 말이다. 나는 분명한 태도로 에밀 졸라, 그리고 그의 계통을 이어받는 지식인과 많은 대중의 태도를 비난하고자 한다. 인간이 인간과 함께 한다는 건 누군가를 나의 발아래에 두고 동정을 하는 게 아니다. 인간과 인간이 한 자리, 한 위치에서 서로의 인간적인 내면을 바라보고 대화를 해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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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로주점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177
에밀 졸라 지음, 유기환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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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졸라의 대표작인 루공 마카르 총서 20권 중 대표작인 목로주점을 보면서 내내 불쾌한 감정을 느꼈다. 에밀 졸라는 유전, 그리고 환경에 따른 인간의 변화와 몰락을 연구하고자 작품을 그렸다. 민중의 문학이라는 미명 아래 사회적으로 소외되어 있는 사람들을 관찰하고 그들의 삶을 문학이라는 표현 방식으로 그린 것이다.

목로주점의 주인공 제르베즈와 그의 남편 쿠포는 본래 성실하고 착한 성품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자신의 앞에 주어진 짐을 닦고 치울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목로주점을 싸구려 증류주를 마시면서, 맛있는 음식에 목매달기 시작하면서 변화했다. 성실한 일꾼이었던 그들은 스스로 몰락을 자초했고 씁쓸한 결말을 맺었다.

19세기 민중의 삶이 실제로 이러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에밀 졸라가 가진 관조적인 태도가 불쾌하다. 그들의 삶을 연구하고 그린다는 태도, 그리고 그를 토대로 작품을 만들고 스스로 민중의 작가라고 떠들어댄 것도 불쾌하다. 그는 민중이 아닌데? 민중의 삶을 관찰하는 사람이지, 그는 민중이 아니다. 그는 지식인으로서 자신의 작품이 가지는 논란을 알았을 테지만 그에 개의치 않았다. 프랑스 지식인으로서 자신의 역할이 그것에 있다고 생각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가 가진 정의의 심정은 그 작품을 읽고 보고 느낄 민중의 심정을 전혀 고려치 않은 영역이다. 민중의 작가가 그린 끔찍한 민중의 삶, 그리고 유전과 환경으로 엮어낸 벗어날 수 없는 민중의 역사는 충분히 민중을 불쌍하기 이를 대 없이 만들어버린다. 에밀 졸라는 민중이 피폐해지더라도 전혀 상관이 없다. 게다가 그의 작품은 유전이라는 명목으로 그들을 모두 같은 처지의 사람으로 만든다. 분명 열심히 노력해 살지만 국가와 제도 등에 의해 도움을 받지 못한 사람이 있을 테고, 뜻하지 않은 불행으로 벗어날 수 없는 가난에 허덕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들의 삶이 가난한 것은 사실이지만 개인이 가진 역량과 인간성, 도덕성, 성실성은 각기 다르다. 누군가는 성실하고, 누군가는 목로주점의 주인공처럼 타락하고, 누군가는 가난에서 벗어나기도 한다. 민중이라도 다 같은 모습만 가진 게 아니다. 민중에게도 더 좋은 사랑이 있고, 따뜻함이 있고, 좋은 인간의 관계가 있다. 하지만 에밀 졸라의 작품에 나오는 민중은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고, 저주하고, 무관심하다. 자신의 모습을 이렇게 그려놓는 '민중의 작가'가 과연 좋을 수 있을까?

에밀 졸라는 분명 대단한 작가다. 역사가 증명한 대단한 작가인 것은 분명하다. 그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나. 그가 가진 이른바 적선을 하겠다는, 아니면 사회적으로 발생되는 문제를 수면 위로 끄집어 내어 그들을 관철의 대상으로 삼겠다는 태도는 분명 좋지 못하다. 에밀 졸라가 가진 연구와 관찰의 태도는 그들을 인간으로 보지 않는다. 단지 비슷한 행동양식을 가진 짐승과 비슷한 존재들의 집단일 뿐이다. 모르겠다. 사실 '나는 고발한다.'에서 본 에밀 졸라는 상당히 국가 중심적인 태도를 가졌고, 그의 고발문은 '문제를 문제로 지적해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어찌 프랑스인이 이럴 수 있는가?'에 더 가까웠다. 프랑스라는 국가 안에서 저주받은 민중을 루공 마카르 총서라는 방식으로 드러내는 게 진짜 민중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었을지 나는 의문이다. 대체 무슨 의도였을까? 스스로 민중을 위한 작가라고 말한 사람이 아닌 이 작품이 가진 관조적 태도가 나는 상당히 불쾌하다.

과거 15세기에는 가난하고 일을 하지 못하는 사람을 한곳에 모아 강제 수용, 강제 노동을 시켰다. 그들이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고, 그들을 도와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인간을 만들어 내겠다는 의도였다. 사실 지금도 이와 비슷한 시선으로 사회적 약자를 바라보는 경우가 많이 존재한다. 그들을 돕는 모습, 태도, 사업을 진행하는 방향성이 인간 중심에 있지 않고, 불행한 자에게 단지 돈 한 푼을 던져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이 되지 말라는 식의 태도 말이다. 나는 분명한 태도로 에밀 졸라, 그리고 그의 계통을 이어받는 지식인과 많은 대중의 태도를 비난하고자 한다. 인간이 인간과 함께 한다는 건 누군가를 나의 발아래에 두고 동정을 하는 게 아니다. 인간과 인간이 한 자리, 한 위치에서 서로의 인간적인 내면을 바라보고 대화를 해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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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불평등기원론 / 사회계약론 동서문화사 세계사상전집 19
장 자크 루소 지음, 최석기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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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는 말한다. 인간은 누구나 국가가 정한 법의 테두리 안에서 살아야 하며, 법은 초월한 존재는 있어서는 안된다. 자유는 분명히 중요하고 인간 모두에게 있어야만 하나, 자유를 통제하지 못할 정도로 유약한 인간은 통치자 없이 살아가지 못한다고 말이다. 루소는 세상이 어찌 되더라도 자연법에 의한 삶보다는 규칙이 정해져 있는 법제로 이루어진 사회 안에서 인간이 살아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자연법에 의한 인간이 바라는 첫 번째는 자신의 안락과 보존에 관심을 기울이는 일이며, 또 다른 하나는 같은 집단에 속한 인간이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함께 괴로움을 느끼는 연민에 의한 행위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며, 자연 그대로의 상태로 놔두었을 때 위의 두 가지 요소를 이루어낼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은 약한 자를 어리석은 무지로 보고, 강자에 의한 억압에 주목한다. 자연의 섭리를 벗어난, 인간이 만들어 낸 규칙과 도구들은 부자연스러움을 야기하며 이내 구조적인 불평등함을 만들어 허물어질 위기에 처한다. 하지만 자연상태 그대로의 인간은 보편적으로 주어지는 개인적인 인간관계 외의 관계가 주어지지 않으며, 그에 따라 서로 간의 책임이나 도덕심도 생겨나지 않는다.

첫 번째 문단에 의하면 루소는 자연법을 먹어버리는 법제에 의한 보호와 자유를 우선시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루소의 핵심 사상은 자연법에 의한 주장으로, 자연법은 매우 중요하지만, 인간은 자연 그대로의 상태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동물과 다른 창의성을 보이며 구조적인 발전을 거듭한다. 그렇게 발전된 인간은 자연 그대로의 상태보다는 분명히 신체적으로 약할지라도 도구와 사회적 발전, 그리고 맺어지는 계약들에 의해 보호되고 윤리성과 도덕성이 길러진다. 따라서 인간이 집단을 구성해 서로 연관되는 계약관계와 규칙이 생겨나는 건 필연적이다. 때문에 인간은 자연상태로의 회귀를 바라는 게 아니라, 규칙과 계약을 토대로 한 불평등한 관계를 평등하게 만드는 데 집중해야 한다. 인간은 사회 속, 법과 정부의 보호 속에 살아야지만 서로를 위하고 오히려 바람직한 자유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게 루소의 말이다. 즉, 자연은 불평등함을 만들어내지 않으며, 자연의 모습이 인간에게 필요함은 분명하나, 욕심이 섞인 인간은 자연으로 회귀할 수 없기 때문에 사회에 의한 구조적 보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사회는 새롭게 나타난 사유재산에 대한 욕심과 욕망으로 인해 불평등이 생겨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연스럽다."라는 말을 흔하게 사용한다. 여기서의 "자연"이란 인위적으로 만들어내지 않은 채 순리에 따라 흘러가는 것을 말한다. 자연은 누군가를 보호해주지 않는다. 짐승은 더 약한 짐승을 잡아먹고, 약한 존재는 도태되어 진화의 과정에서 사라지는 게 "자연스러운" 역사의 흐름이다. 자연 상태에서의 평등이란 모든 생물이 서로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세상을 뜻하지 않는다. 하지만 짐승은 배가 고플 때만 짐승을 잡아먹고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행동한다. 물론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자연은 그 성장이 매우 더디다. 천년이 지나고 만년이 지나도 짐승은 지금 모습과 비슷한 행위를 하고 있을 테지만, 인간은 백 년만 지나도 전혀 다른 행위를 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연이 말하는 자연스러움과 평등이란 서로의 생명을 유지하는 방식을 존중한 채로 살아가는 것이다. 더 상위에 있는 존재가 있지만, 그 존재는 하위에 있는 존재의 삶의 방식을 송두리째 바꾸거나, 빼앗아가며 파괴하지 않는다. 이렇듯 모든 짐승을 자연스럽게 생명을 유지하지만 인간만이 그렇지 않다. 인간은 재산을 모으고 축적하며, 생명의 유지와 관계없이 욕구를 채우기 위해 행동하고 자신의 필요에 따라 누군가의 것을 파괴하는 것을 서슴지 않는다.

인간이 원하는 평등이란 무엇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 자신이 뒤처지지 않고 다른 집단의 사람들과 우선시 되는 존재가 되기를 바란다. 각자가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를 존중한 채로 살아가기를 바라는 사람은 굉장히 적다. 인간은 생명과 관계가 없는 측면에서도 한없이 욕심을 부린다.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의 루소도 말한다. 유약한 집단에게는 통치자가 필요하고 일정한 제약이 있어야만 한다고 말이다. 이는 굉장히 위험한 생각이다. 누가 누구를 유약하다 정의하고, 구조적으로 발달된 사회가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어느 누가 단언할 수 있단 말인가? 아프리카 흑인들의 예를 들어 설명한 루소는 그들이 발전의 여지가 많이 남은, 자연과 가까운 미개한 존재인 것처럼 그린다. 이는 루소가 만들어 낸 또 다른 불평등함이다. 루소의 말처럼 사회 구조는 집단 이기주의를 만들고, 집단은 자신이 속한 그룹이 최선이 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게끔 한다. 그리고 인간은 이러한 행위가 자연이 만들어낸 당연한 경쟁에 의한 행위라고 자위한다. 자연법의 첫 번째는 자신의 안락과 보존에 관심을 기울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시민 개개인의 계약과 동의가 중요한 부분이며, 인간은 모두 자신을 보호하려 하기 때문에, 이로써 생겨나는 많은 사회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프랑스 시민혁명과 더불어 미국의 독립 혁명을 불러일으키는 주요 원인이 된 직접민주주의의 근간이다. 하지만 사회구조와 법을 만드는 사람들은 약자가 될 수 없다. 가진 자들이 스스로의 권력과 자본을 유지하기 위해 법을 만들고 서로를 지킬 수 있는 규칙을 제안한다. 그들은 약자들을 설득해 사유재산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을 만들어 낸다. 당연히 그들의 목적은 약자에 대한 보호가 아니다. 세상이 혁명을 일으켜 뒤집어져 자신이 약자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함을 목적으로 한다. 인간이 농업을 하게 됨으로써 나타나게 된 사유재산에 대한 논의는 결국 법제를 만들어 강자를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법은 분명 사회의 유지와 번영을 위해 필요하지만, 분명 약자를 위해서 만들어지지는 않았다. 인간은 모두 합리적 선택에 의해 스스로를 보호하려 애쓰지만, 권력을 가진 자들은 약자의 사고와 심리마저 지배한다. 루소는 인간이 힘을 모으기 위해 하나의 권력자를 만든다고 말하나, 나는 그 권력자의 의지대로 약자들이 조종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약자들이 그래야지만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권력자들은 직접 민주주의를 행했다는 이론적 배경과, 당위성을 가지고 스스로의 권력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 나간다.

진정한 "사회적 합의"라는 게 존재할 수 있는가? 직접 민주주의는 모든 이의 바람을 가장 잘 녹여낼 수 있는, 우리가 실행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수단임은 사실이다. 하지만 법의 생성과 유지, 사회의 구조와 개인의 바람의 실현이라는 측면에서 약자는 도태되고 권력자에 의하여 본인이 조종당하는지도 모른 채 조종당한다. 노예와 계급이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지만, 보이지 않는 노예와 계급이 존재한 채로 인간은 살아간다. 인간은 과연 평등한가? 아니, 인간은 평등을 바라는가? 한 명의 인간은 또 다른 한 명의 인간과 동등한 능력과 역할을 가지고 있는가? 루소의 주장처럼 우리는 이미 자연의 상태로 돌아갈 수는 없다. 때문에 인간이 가진 이기심에 따른 문제의 발생을 줄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보다 더 나은 방향에서 약자가 보호받고, 진정한 한 명의 인간으로서 당연한 주장을 펼칠 수 있는 세상을 위해 더 노력해야만 한다. 그를 이루기 위해서는 모든 인간은 평등하지만, 불평등한 세상 속에서 태어나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네가 사회에 존재하는 한 명의 인간으로 자발적으로 사회적으로 이루어진 계약에 동의했으니, 당연히 그를 따라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건 그 속에 존재하는 불평등함을 보지 못한 채로 주장하는 것일 수 있다. 결국 왕권신수설에 따라 강제적으로 이루어진 사회의 불평등을 없애기 위해 루소가 말하고 있는 합의에 의한 평등의 조장은, 단지 모두가 동의하고 있다는 근거를 만들기 위함으로 활용되어지는 경우가 반드시 존재한다. 루소가 그리고 있는, "누군가에게 지배당하지 않을 정도의 재산과 정치력을 지닌 채로 동등한 한 명으로서의 권리를 지닌 합의를 도출해 낼 수 있는 사회"란 이미 이루어질 수 없는 전제다. 기본소득이 주어진다면 그게 가능할까? 인간의 욕심은 상대적이기 때문에 기본소득으로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경제적, 권력적 우위를 지닌 누군가에 의해 약자는 심리를 조종당한다. 사회적 약자에게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선택지가 그다지 않지 않다.

물론 16세기의 전제정치의 시대를 살고 있던 루소가 던진 이러한 주장은 큰 변혁임은 분명하다. 내가 지금 하는 말은 루소에게는 고려대상에 되지 못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론의 추구나 "인간이 모두 평등하다", "인간은 모두 자신의 보호를 위해 당연히 노력한다. 때문에 사회적 합의에 의해 이루어진 계약은 모두를 보호할 수 있고 모든 인간은 이를 준수해야 한다."라고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진정으로 진심을 다하고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마음을 담아, 인간이 진정으로 자신을 보호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사회계약론과 인간 불평등 기원론, 교육학의 명저인 "에밀"을 통해 너무나 좋은 주장을 펼친 루소는 다섯 명의 아이를 모두 고아원에 보냈다. 루소를 변호해 보자면, 이 당시에 고아원에 아이들을 보내는 건 일종의 관행이었고, 루소는 자신의 저서를 통해 그 사실을 고백한다. 루소는 자기 자신이 지닌 한계와 괴리를 스스로 말했지만 어디까지나 이상을 추구하는 인간이었다. 루소가 주장한 사회계약론의 내용도 사실 이상적인 내용을 담은 낭만주의의 전형일 수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인간에게 필요한 건 이론에 의한 설득이나 그럴듯한 모양으로 완벽해 보이는 이론을 만들어 내는 게 아니라, 누군가가 필요한 상대방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아 도움을 주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마르크스는 자신의 이론이 더 많은 관찰과 변화, 과학적 검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며, 심지어 사상이 왜곡되는 것을 안타까워하여 스스로 "자신은 마스크스 주의자가 아니"라는 말도 했다. 이 긴 글의 요는 다름 아닌 이것인데, 누군가를 홀리는 말을 뱉는 것보다 진심을 담아 실제로 행동할 수 있도록 하는 게 훨씬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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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고통 이후 오퍼스 10
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 이후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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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전 손택의 글은 어렵지 않지만 불편하다. 그녀는 타인의 고통을 팔고 타인의 고통을 관람하는 세태를 비난하고, 그중에서도 사진을 통한 피해자의 개별화, 또는 인종과 민족의 이미지를 하나로 만들어 버리는 효과에 대해 큰 우려를 표한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관람하며 타인을 고통에 동참하고 있다는 착각을 하고 있다. 실상은 타인에게 무관심하면서 미디어를 통해 관찰하는 것만으로 위안을 삼는다고 말이다. 

그리고 사진(이라고 했지만 사실상 미디어라고 넓혀도 될 듯하다.)을 통한 정보의 불균형은 커다란 문제를 낳는다. 미디어는 전쟁의 폐해와 끔찍함을 제대로 직시하지 않고 전쟁의 필요나 집단으로서의 목표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전쟁은 우리의 삶과 멀리 떨어져 있으며, 발전되지 못한 곳에서 벌어지고, 사실상 우리는 안전한 곳에서 그들을 안타깝게 관망하며 그저 혀만 끌끌 차고 있는 세상이 사진을 통해 만들어지고 있다. 그렇게 전쟁과 피해는 타인의 것이 되어 연민의 마음만을 담아진 채 쉽게 삶에서 사라진다. 

물론 수전 손택의 말에 모두 동조할 수는 없다. 그녀는 '타인의 고통'에서 본인의 전작인 '사진에 관하여'에 담긴 내용의 한계를 스스로 비판한다. 사실 그녀가 말하는 사진의 위험성도 분명히 존재하지만, 사진을 통해 타인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인지하지 못했던 문제를 인식하거나, 문제시되지 않았던 부분이 사회 문제시되는 이점도 분명히 존재한다. 가만히 놔두면 절대로 알 수 없는 내용을 알게 되거나, 타인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깨닫게 된다. 

하지만 수전 손택이 말하는 것, "인간은 타인의 고통을 관람하고, 그 고통이 우리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것이며, 그 고통을 유발한 누군가를 비난하고, 그 자신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은 채로 존재하는" 것은 분명히 중요한 문제점이다. 우리는 그 고통을 그저 타인의 문제나 잘못으로 치환하여 살펴보는 것부터가 커다란 잘못이자 실수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관람하여 살펴보는 우리는 또 다른 가해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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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발한다 - 해제ㅣ드레퓌스 사건과 지식인의 양심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47
에밀 졸라 지음, 유기환 옮김 / 책세상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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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대의를 위한 희생이라는 건 무서운 말이다. 그는 집단을 위한 국수주의적 태도로 모든 것을 무마하고 모든 것을 정당화한다. 결국 모든 사람이 이롭게 될 것이라는 '대의'의 환상은 결국 소수의 몇몇 인간만을 제외하고 모두를 괴롭게 할 뿐 아니라, 인간을 인간으로서 존재하지 않도록 한다. '대의'나 국가에 자신을 투영하여 충성을 다하는 사람들은 그래서 위험하다. 

에밀 졸라가 드레퓌스 사건에 뛰어든 건 다른 이유가 아니다. 죄 없는 자가 잔혹한 형벌로 괴로움을 겪고 있기 때문에 그 부정함을 바로잡으려는 너무나도 당연한 인간적인 이유였다. 그러한 인간으로서의 당연함을 이룩하기 위한 고발은 사회적 영향력을 가진 지식인으로서의 역할이자, 인간으로서의 역할이다. 

드레퓌스 사건은 시온주의를 불러왔고, 시온주의는 오늘날까지도 이어지는 중동 전쟁의 서막이 되었다. 반유태인의 세력은 유태인 세력을 모아 또 다른 국수주의 세력이 만들어졌다. 결국 화와 분노는 또 다른 화와 분노를 만들어낸다. 

대체 무엇을 위한 희생이고 무엇을 위한 분노인가? 쓸데없는 분류로 나누어 집단주의적 국수주의가 되어버린 민족 중심, 국가중심적인 인간 집단은 만족을 위해 갈등을 불러온다. 그리고 그 갈등은 결국 만족을 깎아내리기 마련이다. 이 끊이지 않는 갈등에 우리는 한 명의 인간으로. 또는 한 명의 지식을 지닌 인간으로 어떠한 태도를 지녀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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