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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로주점 - 상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177
에밀 졸라 지음, 유기환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7월
평점 :
에밀 졸라의 대표작인 루공 마카르 총서 20권 중 대표작인 목로주점을 보면서 내내 불쾌한 감정을 느꼈다. 에밀 졸라는 유전, 그리고 환경에 따른 인간의 변화와 몰락을 연구하고자 작품을 그렸다. 민중의 문학이라는 미명 아래 사회적으로 소외되어 있는 사람들을 관찰하고 그들의 삶을 문학이라는 표현 방식으로 그린 것이다.
목로주점의 주인공 제르베즈와 그의 남편 쿠포는 본래 성실하고 착한 성품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자신의 앞에 주어진 짐을 닦고 치울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목로주점을 싸구려 증류주를 마시면서, 맛있는 음식에 목매달기 시작하면서 변화했다. 성실한 일꾼이었던 그들은 스스로 몰락을 자초했고 씁쓸한 결말을 맺었다.
19세기 민중의 삶이 실제로 이러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에밀 졸라가 가진 관조적인 태도가 불쾌하다. 그들의 삶을 연구하고 그린다는 태도, 그리고 그를 토대로 작품을 만들고 스스로 민중의 작가라고 떠들어댄 것도 불쾌하다. 그는 민중이 아닌데? 민중의 삶을 관찰하는 사람이지, 그는 민중이 아니다. 그는 지식인으로서 자신의 작품이 가지는 논란을 알았을 테지만 그에 개의치 않았다. 프랑스 지식인으로서 자신의 역할이 그것에 있다고 생각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가 가진 정의의 심정은 그 작품을 읽고 보고 느낄 민중의 심정을 전혀 고려치 않은 영역이다. 민중의 작가가 그린 끔찍한 민중의 삶, 그리고 유전과 환경으로 엮어낸 벗어날 수 없는 민중의 역사는 충분히 민중을 불쌍하기 이를 대 없이 만들어버린다. 에밀 졸라는 민중이 피폐해지더라도 전혀 상관이 없다. 게다가 그의 작품은 유전이라는 명목으로 그들을 모두 같은 처지의 사람으로 만든다. 분명 열심히 노력해 살지만 국가와 제도 등에 의해 도움을 받지 못한 사람이 있을 테고, 뜻하지 않은 불행으로 벗어날 수 없는 가난에 허덕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들의 삶이 가난한 것은 사실이지만 개인이 가진 역량과 인간성, 도덕성, 성실성은 각기 다르다. 누군가는 성실하고, 누군가는 목로주점의 주인공처럼 타락하고, 누군가는 가난에서 벗어나기도 한다. 민중이라도 다 같은 모습만 가진 게 아니다. 민중에게도 더 좋은 사랑이 있고, 따뜻함이 있고, 좋은 인간의 관계가 있다. 하지만 에밀 졸라의 작품에 나오는 민중은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고, 저주하고, 무관심하다. 자신의 모습을 이렇게 그려놓는 '민중의 작가'가 과연 좋을 수 있을까?
에밀 졸라는 분명 대단한 작가다. 역사가 증명한 대단한 작가인 것은 분명하다. 그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나. 그가 가진 이른바 적선을 하겠다는, 아니면 사회적으로 발생되는 문제를 수면 위로 끄집어 내어 그들을 관철의 대상으로 삼겠다는 태도는 분명 좋지 못하다. 에밀 졸라가 가진 연구와 관찰의 태도는 그들을 인간으로 보지 않는다. 단지 비슷한 행동양식을 가진 짐승과 비슷한 존재들의 집단일 뿐이다. 모르겠다. 사실 '나는 고발한다.'에서 본 에밀 졸라는 상당히 국가 중심적인 태도를 가졌고, 그의 고발문은 '문제를 문제로 지적해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어찌 프랑스인이 이럴 수 있는가?'에 더 가까웠다. 프랑스라는 국가 안에서 저주받은 민중을 루공 마카르 총서라는 방식으로 드러내는 게 진짜 민중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었을지 나는 의문이다. 대체 무슨 의도였을까? 스스로 민중을 위한 작가라고 말한 사람이 아닌 이 작품이 가진 관조적 태도가 나는 상당히 불쾌하다.
과거 15세기에는 가난하고 일을 하지 못하는 사람을 한곳에 모아 강제 수용, 강제 노동을 시켰다. 그들이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고, 그들을 도와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인간을 만들어 내겠다는 의도였다. 사실 지금도 이와 비슷한 시선으로 사회적 약자를 바라보는 경우가 많이 존재한다. 그들을 돕는 모습, 태도, 사업을 진행하는 방향성이 인간 중심에 있지 않고, 불행한 자에게 단지 돈 한 푼을 던져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이 되지 말라는 식의 태도 말이다. 나는 분명한 태도로 에밀 졸라, 그리고 그의 계통을 이어받는 지식인과 많은 대중의 태도를 비난하고자 한다. 인간이 인간과 함께 한다는 건 누군가를 나의 발아래에 두고 동정을 하는 게 아니다. 인간과 인간이 한 자리, 한 위치에서 서로의 인간적인 내면을 바라보고 대화를 해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