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불평등기원론 / 사회계약론 동서문화사 세계사상전집 19
장 자크 루소 지음, 최석기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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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는 말한다. 인간은 누구나 국가가 정한 법의 테두리 안에서 살아야 하며, 법은 초월한 존재는 있어서는 안된다. 자유는 분명히 중요하고 인간 모두에게 있어야만 하나, 자유를 통제하지 못할 정도로 유약한 인간은 통치자 없이 살아가지 못한다고 말이다. 루소는 세상이 어찌 되더라도 자연법에 의한 삶보다는 규칙이 정해져 있는 법제로 이루어진 사회 안에서 인간이 살아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자연법에 의한 인간이 바라는 첫 번째는 자신의 안락과 보존에 관심을 기울이는 일이며, 또 다른 하나는 같은 집단에 속한 인간이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함께 괴로움을 느끼는 연민에 의한 행위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며, 자연 그대로의 상태로 놔두었을 때 위의 두 가지 요소를 이루어낼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은 약한 자를 어리석은 무지로 보고, 강자에 의한 억압에 주목한다. 자연의 섭리를 벗어난, 인간이 만들어 낸 규칙과 도구들은 부자연스러움을 야기하며 이내 구조적인 불평등함을 만들어 허물어질 위기에 처한다. 하지만 자연상태 그대로의 인간은 보편적으로 주어지는 개인적인 인간관계 외의 관계가 주어지지 않으며, 그에 따라 서로 간의 책임이나 도덕심도 생겨나지 않는다.

첫 번째 문단에 의하면 루소는 자연법을 먹어버리는 법제에 의한 보호와 자유를 우선시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루소의 핵심 사상은 자연법에 의한 주장으로, 자연법은 매우 중요하지만, 인간은 자연 그대로의 상태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동물과 다른 창의성을 보이며 구조적인 발전을 거듭한다. 그렇게 발전된 인간은 자연 그대로의 상태보다는 분명히 신체적으로 약할지라도 도구와 사회적 발전, 그리고 맺어지는 계약들에 의해 보호되고 윤리성과 도덕성이 길러진다. 따라서 인간이 집단을 구성해 서로 연관되는 계약관계와 규칙이 생겨나는 건 필연적이다. 때문에 인간은 자연상태로의 회귀를 바라는 게 아니라, 규칙과 계약을 토대로 한 불평등한 관계를 평등하게 만드는 데 집중해야 한다. 인간은 사회 속, 법과 정부의 보호 속에 살아야지만 서로를 위하고 오히려 바람직한 자유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게 루소의 말이다. 즉, 자연은 불평등함을 만들어내지 않으며, 자연의 모습이 인간에게 필요함은 분명하나, 욕심이 섞인 인간은 자연으로 회귀할 수 없기 때문에 사회에 의한 구조적 보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사회는 새롭게 나타난 사유재산에 대한 욕심과 욕망으로 인해 불평등이 생겨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연스럽다."라는 말을 흔하게 사용한다. 여기서의 "자연"이란 인위적으로 만들어내지 않은 채 순리에 따라 흘러가는 것을 말한다. 자연은 누군가를 보호해주지 않는다. 짐승은 더 약한 짐승을 잡아먹고, 약한 존재는 도태되어 진화의 과정에서 사라지는 게 "자연스러운" 역사의 흐름이다. 자연 상태에서의 평등이란 모든 생물이 서로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세상을 뜻하지 않는다. 하지만 짐승은 배가 고플 때만 짐승을 잡아먹고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행동한다. 물론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자연은 그 성장이 매우 더디다. 천년이 지나고 만년이 지나도 짐승은 지금 모습과 비슷한 행위를 하고 있을 테지만, 인간은 백 년만 지나도 전혀 다른 행위를 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연이 말하는 자연스러움과 평등이란 서로의 생명을 유지하는 방식을 존중한 채로 살아가는 것이다. 더 상위에 있는 존재가 있지만, 그 존재는 하위에 있는 존재의 삶의 방식을 송두리째 바꾸거나, 빼앗아가며 파괴하지 않는다. 이렇듯 모든 짐승을 자연스럽게 생명을 유지하지만 인간만이 그렇지 않다. 인간은 재산을 모으고 축적하며, 생명의 유지와 관계없이 욕구를 채우기 위해 행동하고 자신의 필요에 따라 누군가의 것을 파괴하는 것을 서슴지 않는다.

인간이 원하는 평등이란 무엇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 자신이 뒤처지지 않고 다른 집단의 사람들과 우선시 되는 존재가 되기를 바란다. 각자가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를 존중한 채로 살아가기를 바라는 사람은 굉장히 적다. 인간은 생명과 관계가 없는 측면에서도 한없이 욕심을 부린다.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의 루소도 말한다. 유약한 집단에게는 통치자가 필요하고 일정한 제약이 있어야만 한다고 말이다. 이는 굉장히 위험한 생각이다. 누가 누구를 유약하다 정의하고, 구조적으로 발달된 사회가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어느 누가 단언할 수 있단 말인가? 아프리카 흑인들의 예를 들어 설명한 루소는 그들이 발전의 여지가 많이 남은, 자연과 가까운 미개한 존재인 것처럼 그린다. 이는 루소가 만들어 낸 또 다른 불평등함이다. 루소의 말처럼 사회 구조는 집단 이기주의를 만들고, 집단은 자신이 속한 그룹이 최선이 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게끔 한다. 그리고 인간은 이러한 행위가 자연이 만들어낸 당연한 경쟁에 의한 행위라고 자위한다. 자연법의 첫 번째는 자신의 안락과 보존에 관심을 기울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시민 개개인의 계약과 동의가 중요한 부분이며, 인간은 모두 자신을 보호하려 하기 때문에, 이로써 생겨나는 많은 사회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프랑스 시민혁명과 더불어 미국의 독립 혁명을 불러일으키는 주요 원인이 된 직접민주주의의 근간이다. 하지만 사회구조와 법을 만드는 사람들은 약자가 될 수 없다. 가진 자들이 스스로의 권력과 자본을 유지하기 위해 법을 만들고 서로를 지킬 수 있는 규칙을 제안한다. 그들은 약자들을 설득해 사유재산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을 만들어 낸다. 당연히 그들의 목적은 약자에 대한 보호가 아니다. 세상이 혁명을 일으켜 뒤집어져 자신이 약자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함을 목적으로 한다. 인간이 농업을 하게 됨으로써 나타나게 된 사유재산에 대한 논의는 결국 법제를 만들어 강자를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법은 분명 사회의 유지와 번영을 위해 필요하지만, 분명 약자를 위해서 만들어지지는 않았다. 인간은 모두 합리적 선택에 의해 스스로를 보호하려 애쓰지만, 권력을 가진 자들은 약자의 사고와 심리마저 지배한다. 루소는 인간이 힘을 모으기 위해 하나의 권력자를 만든다고 말하나, 나는 그 권력자의 의지대로 약자들이 조종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약자들이 그래야지만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권력자들은 직접 민주주의를 행했다는 이론적 배경과, 당위성을 가지고 스스로의 권력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 나간다.

진정한 "사회적 합의"라는 게 존재할 수 있는가? 직접 민주주의는 모든 이의 바람을 가장 잘 녹여낼 수 있는, 우리가 실행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수단임은 사실이다. 하지만 법의 생성과 유지, 사회의 구조와 개인의 바람의 실현이라는 측면에서 약자는 도태되고 권력자에 의하여 본인이 조종당하는지도 모른 채 조종당한다. 노예와 계급이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지만, 보이지 않는 노예와 계급이 존재한 채로 인간은 살아간다. 인간은 과연 평등한가? 아니, 인간은 평등을 바라는가? 한 명의 인간은 또 다른 한 명의 인간과 동등한 능력과 역할을 가지고 있는가? 루소의 주장처럼 우리는 이미 자연의 상태로 돌아갈 수는 없다. 때문에 인간이 가진 이기심에 따른 문제의 발생을 줄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보다 더 나은 방향에서 약자가 보호받고, 진정한 한 명의 인간으로서 당연한 주장을 펼칠 수 있는 세상을 위해 더 노력해야만 한다. 그를 이루기 위해서는 모든 인간은 평등하지만, 불평등한 세상 속에서 태어나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네가 사회에 존재하는 한 명의 인간으로 자발적으로 사회적으로 이루어진 계약에 동의했으니, 당연히 그를 따라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건 그 속에 존재하는 불평등함을 보지 못한 채로 주장하는 것일 수 있다. 결국 왕권신수설에 따라 강제적으로 이루어진 사회의 불평등을 없애기 위해 루소가 말하고 있는 합의에 의한 평등의 조장은, 단지 모두가 동의하고 있다는 근거를 만들기 위함으로 활용되어지는 경우가 반드시 존재한다. 루소가 그리고 있는, "누군가에게 지배당하지 않을 정도의 재산과 정치력을 지닌 채로 동등한 한 명으로서의 권리를 지닌 합의를 도출해 낼 수 있는 사회"란 이미 이루어질 수 없는 전제다. 기본소득이 주어진다면 그게 가능할까? 인간의 욕심은 상대적이기 때문에 기본소득으로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경제적, 권력적 우위를 지닌 누군가에 의해 약자는 심리를 조종당한다. 사회적 약자에게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선택지가 그다지 않지 않다.

물론 16세기의 전제정치의 시대를 살고 있던 루소가 던진 이러한 주장은 큰 변혁임은 분명하다. 내가 지금 하는 말은 루소에게는 고려대상에 되지 못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론의 추구나 "인간이 모두 평등하다", "인간은 모두 자신의 보호를 위해 당연히 노력한다. 때문에 사회적 합의에 의해 이루어진 계약은 모두를 보호할 수 있고 모든 인간은 이를 준수해야 한다."라고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진정으로 진심을 다하고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마음을 담아, 인간이 진정으로 자신을 보호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사회계약론과 인간 불평등 기원론, 교육학의 명저인 "에밀"을 통해 너무나 좋은 주장을 펼친 루소는 다섯 명의 아이를 모두 고아원에 보냈다. 루소를 변호해 보자면, 이 당시에 고아원에 아이들을 보내는 건 일종의 관행이었고, 루소는 자신의 저서를 통해 그 사실을 고백한다. 루소는 자기 자신이 지닌 한계와 괴리를 스스로 말했지만 어디까지나 이상을 추구하는 인간이었다. 루소가 주장한 사회계약론의 내용도 사실 이상적인 내용을 담은 낭만주의의 전형일 수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인간에게 필요한 건 이론에 의한 설득이나 그럴듯한 모양으로 완벽해 보이는 이론을 만들어 내는 게 아니라, 누군가가 필요한 상대방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아 도움을 주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마르크스는 자신의 이론이 더 많은 관찰과 변화, 과학적 검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며, 심지어 사상이 왜곡되는 것을 안타까워하여 스스로 "자신은 마스크스 주의자가 아니"라는 말도 했다. 이 긴 글의 요는 다름 아닌 이것인데, 누군가를 홀리는 말을 뱉는 것보다 진심을 담아 실제로 행동할 수 있도록 하는 게 훨씬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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