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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심장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41
조지프 콘래드 지음, 황유원 옮김 / 휴머니스트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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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의 핵심을 읽고 치누아 아체베와 이 책에 대해 같은 의견을 가졌었다. 하지만 어둠의 심장을 읽고 내가 섣부른 말을 했었구나, 같은 생각을 했다. 이 책은 휴머니스트 판으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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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길그레이트북스 스페셜 컬렉션 (리커버 특별판, 박스 세트) - 전5권 한길그레이트북스
한나 아렌트 외 지음, 김선욱 외 옮김 / 한길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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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길사 책만 올라오면 아이히만 번역 이야기하는 것도 참 별로네요
리커버 예쁘게 나와서 좋네요
다 좋아하는 책이라 소장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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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루다의 우편배달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4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지음, 우석균 옮김 / 민음사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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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루다의 우편배달부를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단어는 누가 생각하더라도 '메타포'다.
시인과 시인의 친구인 마리오를 그린 이 책을 분류하자면 메시지의 소설이 아닌 이미지의 소설이라 볼 수 있다.
시는 시인이 하고자 하는 말을 문장과 비유를 활용한 이미지로 담는다.
시는 축약이자 상징이고, 이 상징성은 직접성이 아닌 간접성을 활용하기 때문에, 
논설이나 평론과 달리 민중의 무기나 시대에 대항할 수 있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노래와 시는 중요하다.
하고자 하는 말을 무엇보다 잘 활용할 수 있고, 증명되지 않는 시 속에 담긴 메시지를 모두가 공유할 수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아침이슬을 들으며 모두 같은 느낌을 받는 것처럼,
윤동주의 시들을 보며 일제시대의 악행을 떠올리는 것처럼
시와 노래의 언어는 그렇게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지만 어디에도 존재할 수 있다.
사진과 그림, 시와 노래의 예술은 그래서 중요하다.
예술은 역사를 담고 있지 않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역사를 담고 있다.
마찬가지로 시인도 시의 상징성을 내재한다.

칠레의 역사에서 누구보다 중요한 파블로 네루다는 공산주의, 사회주의를 통한 민중의 혁명과 평등을 바라며 살아왔다.
그는 로맨티시스트이고 사랑을 찾는 애정의 시인이지만, 그 애정은 단순히 이성에게만 번져있지 않다.
그의 시에 담긴 메타포는 민중을 지향하고 있고, 사람들은 그 시인을 사랑한다.
하지만 시인이 하는 말들이 시가 아닌, 다른 매체를 통해 전달되었을 때 그의 언어와 그는 생명력을 잃는다.
간접성을 버린 채 민중의 직접적인 삶에 닿는 시는 더 이상 시로 존재할 수 없다.
이론적으로만 완성되어 있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민중을 위하여 만들어진 이데올로기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민중의 이해관계를 이해하지 못하여 무너졌다.
결국 사회주의에서 민중은 사라지고 스탈린만이 우리의 뇌리 속에 남아버렸다.
물론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현재의 역사가 그 사실을 증명한다.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는 책 그 자체로 메타포를 담는다.
네루다의 흥망성쇠와 마리오의 감정의 흐름, 이슬라 네그라의 거리와 그 속에 존재하는 사람들은 사회주의의 역사를 답습한다.
네루다의 인생과 이 책은 그 자체로 사회주의의 메타포가 된다.
중반 이후로 급격하게 쓸쓸해지는 책의 흐름은 사회주의자들의 씁쓸하고 공허한 외침과 같이 흘러간다.
시인이 메타포를 사용해 언어를 전달하는 것처럼 사회주의도 이론과 간접성을 사용해 주장을 던졌지만, 삶과 직접 맞닿으며 무너져 내렸다.
시는 아름답지만 때로 시의 역사는 아름답지 못하다.
예술가의 역사는 시와 그림, 예술의 상징을 바꾸고 때로는 쓸모없게 만든다.
우리나라의 친일 문인들, 채만식, 이광수, 최남선, 서정주의 문학은 이미 그 자체로 소비되지 못한다.
사회주의와 시인 네루다도 바르게 사용되지 못했다.

결국 책에서 사용할 수 있는 건 메타포와 좋은 이미지들뿐이다.
네루다의 우편배달부가 원작인 영화 '일 포스티노'의 내용이 사뭇 다른 것도, 
그저 아름다운 도시와 시인만을 그려낸 것도 역시 좋은 이미지만을 남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인이 하고자 하는 민중에 대한 사랑은 사라지고 바다처럼 좋은 이미지만이 남아버렸다.
종말에 시인은 보이지 않는 바다를 찾고 내재한다.
사람과 사상이 변하고, 역사가 떠나가 버려도 바다는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있다.
아름다움은 사상을 유념치 않고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있다.
실패한 시인의 정치에 남은 것은 변하지 않는 바다와, 변함없이 그를 사랑하는 아내, 그리고 마리오다.
일 포스티노는 물론 아름답지만, 영화는 그저 아름다울 뿐이다.
사실 시인은 아름다움만을 찾지 않았다. 
그의 메타포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네그라의 바다와 시인의 종말을 보며
친일 문인이 되어 퇴색되어 버린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가 떠오른다.
이 얼마나 무의미한 아름다움이란 말인가.
처.........ㄹ썩, 처........ㄹ썩, 척, 쏴...........아.
처.........ㄹ썩, 처........ㄹ썩, 척, 튜르릉, 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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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의 노래 - 2013년 제44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이승우 지음 / 민음사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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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절대자에 대한 믿음과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는 근본적인 욕망이며, 종교예술과 필사는 믿음을 아름다움으로 표현하는 방식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 믿음이 사용되기도 한다. 천산 벽서의 탄생은 오로지 믿음에 있거나 아름다움에만 있지 않았다.

사랑은 보고 싶은 것을 보게 하고,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보이지 않게 한다. 모든 우연은 어떠한 이유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고, 가지지 않을 수도 있다. 다만 그로 인해 벌어진 행동은 벌어질만한 상황에 벌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에 특정한 사람이 책임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 만약 누군가가 그에 죄책감을 가진다면 그건 스스로를 벌주기 위함에 연유되며, 그래야지만 그 상황을 감내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해당되는 누군가는 죄책감을 갖는다.

때문에 지상의 노래는 벌어질만한 일은 벌어지게 되어있고, 모든 일은 연결되고 연관되어 발생한다고 말한다. 우연은 운명을 거스를 수 없고, 인간은 그에 보조적인 역할만을 하거나, 그 자신이 치유를 위해 개인적인 노력을 하는 수밖에 없다는 게 이승우 작가의 철학이다. 아마도 그는 세상에 도움을 받지 못하고, 벌어지는 일이나, 이미 벌어진 일을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의 삶을 살아왔을 것이다. 그의 책의 등장인물들은 집단적이거나 세상의 틀을 기반한 도움을 받지 못하고, 받지 않으려 한다.

또한 이승우 작가의 사랑은 이기적이며 일방적이고 거칠다. 그리고 그 거친 모습은 진심에서 발생되는 사랑에 근거한다고 설명한다. 그의 사랑이 일방적인 모습을 보이는 건 작가 자신이 일방적인 사랑만을 경험했기 때문일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케한다. 그리고 그 일방적인 사랑은 어느새 어떠한 식으로든 인정받고, 식물들의 사생활에서는 식물화되어 지하의 유토피아로 승화되기까지 한다. 그는 분명히 일방적인 사랑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지하지만,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사랑은 발생되는 것이라고 언급한다. 지상의 노래도 역시 이러한 이승우의 사랑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승우 작가의 주요 등장인물은 편부, 편모, 또는 양친이 없으며, 현명한 아버지의 부재가 불행한 아이를 만들어 낸다고 언급한다. 성장 과정에서의 불행이 문제의 근원임을 보여준다. 이승우 작가에게 책이란 해결책이나 대화이지만, 자신을 그대로 꺼내 보여줄 수밖에 없는 독이기도 하다. `생의 이면`에서 이승우는 작가로서의 모습이 일정한 한계를 보인다는 방어막을 치기는 하나, 그 방어막까지 모두 한계점으로 독자에게 읽힌다. 그는 책으로 치유를 받지만, 책으로 치유를 받을 수밖에 없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의 책들이 불행과 행복을 함께 주는 것처럼 그 자신도 역시 책으로 인하여 득과 실을 함께 얻는다.

후는 성경의 힘을 빌어 거울로 비추어 스스로의 내면을 터득한다. 그가 누나인 연희에게 가졌던 애정과, 그 애정에 의하여 벌어진 박중위에 대한 행동은 `어린아이`로얕보이고 싶지 않았던 그의 심리를 말해준다. 헤브론은 예루살렘에 있는 성으로 친교를 상징하는 공간이다. 마찬가지로 헤브론성에 있는 후는 형제들과 함께 성경과 하느님에 대한 섬김을 토대로 살아가기 위한 일종의 의식을 치렀다. 그는 세상을 떠나 도망지인 유토피아로 들어가 구원을 바라며 살게 되었다. 헤브론에서는 개인이 존재하지 않는다. 특수성을 지니는 건 단 하나, 하느님뿐이며 그 외의 인간은 보잘 것 없는 전체가 되고 모든 사람은 동일시된다.

남자들의 사랑은 소유욕, 정복욕으로 표시된다. 사실 박중위와 후 모두 연희를 사랑했고 그녀를 쟁취하고 싶어 했다. 박중위와 후의 차이는 이기적으로 실행에 옮겼냐 아니냐 일 뿐이다. 성경을 읽으며 후는 자신과 같은 마음을 가졌던 박중위의 마음을 거울처럼 이해하게 되고 자신의 욕구를 바라본다. 박중위가 연희에게 저지른 사건에 대한 분노나 연희의 처지가 나빠진 것에 대한 화가 아니다. 피해자에 대해 마음을 쓰기 보다 스스로와, 후는 자신과 거울 같은 박중위를 쳐다보게 되었다. 다말의 이름을 자식에게 가져다 붙인 압살롬처럼 압살롬과 후는 다말과 연희 자체의 존재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연희와 다말을 상징할 수 있는 존재가 중요했고, 그는 꼭 그 사람이 아니라도 괜찮다. 성경에서 다말은 그 이후 사라졌고 이승우는 남자들이 과거의 그 사람을 떠올리는 사람을 찾아 다닌다고 말한다. 박중위의 사랑은 과거의 생머리에서 귀결되며 압살롬도 사랑을 줄 다른 다말을 만든다. 후는 그제서야 연희를 떠올리며 그녀를 찾지만 꼭 그녀가 아니라도 상관은 없을 것이다. 그녀의 존재만 떠올리면 그만이니 말이다. 이승우의 사랑은 이렇게 잔인하고 끔찍하다.

자의에 의해 속세를 떠나면 수도 생활이 되지만 타의에 의해 나오지 못한다면 감옥이 된다. 마찬가지로 자의에 의해 누군가와 이루어지지 못한다면 괜찮지만 타의에 의해 이루어지지 못한다면 그건 견딜 수 없는 일이 된다. 때문에 후는 연희를 떠나보낸 박중위에게 분노했고, 억지로 마음을 열게 된 연희가 박중위에게 상처를 받은 이유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의와 타의, 자신과 타인에 대한 기준과 생각으로 나온 결과들은 지상의 노래에 나오는 중요한 대목이다.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을 가리기 위함과 함께 자신이 보고 싶지 않은 자신을 감추는 것이기도 하다. 마음속 어딘가에 들어 있는 불편함을 감추는데 한정효는 우연히 선그라스를 사용했고 우연이 된 선그라스는 그의 상징이 되었다. 성경을 통해 거울을 보고 자신의 더러움을 마주한 그는 세상이 자신을 잊어주기를 바랐다. 정확히 말하자면, 자기가 마주한 더러운 자신을 스스로 잊고 싶었다. 그가 선그라스를 쓴 것도 우연이고 그가 그림자를 자처한 것도 상황에 따른 선택이지만, 그는 그렇게 할 수 있었다. 그는 그걸 바랐고, 우연은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 성경과 종교는 그 자체에 의미가 있다기보다 해석에 큰 의미가 주어진다. 괴로움에 빠진 사람은 종교를 통해 괴로움에서 빠져나오고, 환경적인 어려움에 처한 사람도 성경을 통해 자신의 행복을 찾을 수 있다. 한정효의 아내는 남편을 걱정하며 쓸쓸하게 죽었지만, 남편에게 바라왔던 그의 행복과 바른길의 추구를 그녀는 자신의 죽음과, 자신의 대역인 성경을 남편에게 줌으로 인해 이룰 수 있었다. 그렇게 한정효는 늦게나마 성경을 통해 자신을 거울로 볼 수 있었고 아내는 자신의 바람을 이루었다.

성경을 가장 잘 읽는 방법은 소리 내어 읽는 것과 필사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거울을 가장 잘보는 방법도 필사를 하는 것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한정효는 지하에 필사를 함으로써 거울을 들여다보고 하늘의 뜻을 담아 지하의 세계를 준비하려 했다. 그들에게는 이미 지상에서 이루어지는 세속의 일은 관심 밖이었고, 모든 삶과 죽음은 하느님의 뜻이 되었다. 그들에게 외적인 자극으로 생기는 일들은 그들을 불행으로 내몰 수 없고, 벽에 적은 성경 구절들은 죽음 이후의 하느님의 세계, 즉 지하의 세상을 준비하기 위한 노래들이었다. 이승우는 다른 책에서도 볼 수 있듯이 육체로서의 지상의 세계와 정신으로서의 지하의 세계를 따로 마련했다. 그리고 그 정신의 세계는 유토피아를 향하는데, 작가의 특성상 그 유토피아는 사실 하느님의 곁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승우 작가의 이승의 삶이란 죽음 이후에 천국으로 가기 위해 준비하는 길이자, 육체를 뛰어넘어 정신의 승화를 이루는 과정이다.

사람들의 바람은 때로는 이루어지고, 때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어떠한 결과를 내든, 그 결과는 다양한 변수에 엮여 있으며 결과는 각기 다른 욕망이 얽혀 만들어진 덩어리다. 이들은 모두 다른 바람을 가졌고 각기 다른 모습으로 결과를 내었다. 한정효는 사라지고 싶었지만 그가 적은 벽서들로 존재를 드러냈고, 여행작가의 동생은 죄책감에 책을 만들면서 벽서를 발견했다. 후는 그의 사랑을 들여다보며 박중위를 증오했고 뜻밖에 거울을 발견해 스스로를 알아갔다. 장은 한정효에 대한 부담을 덜어내려 차동연을 사용했다. 정권을 잡은 군인들은 수도자들을 모조리 잡아다 죽이며 종교적 발견을 끌어냈고, 집단 살인은 종교적 발견으로 변질되었다. 또한 연희의 삼촌은 연희를 팔아먹고 불행을 불러왔다. 후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그로서 무언가를 선택했고, 그 선택은 많은 결과를 불러왔다. 경찰의 욕망은 후를 범인으로 만들었고 후의 선택하지 않음은 그가 고초를 겪게 했다. 이 모든 것들은 따로 존재하지만 하나의 덩어리로 결과를 만든다. 이 결과물은 누군가 한 명의 탓이 아니고 그럴 수도 없다. 누군가는 소원을 풀었고, 누군가는 어떤 식으로든 해결을 보았지만 누군가는 괴로움을 당했다.

죽어버린 수도사들과 한정효의 아내, 괴로움을 당한 연희와 한정효는 모두 각각의 방식으로 구원을 얻었다. 종교적 방식을 사용하든 아니든, 어떠한 결과를 가지고 왔든 사람들은 죄를 저질렀고 누군가는 반성을 했다. 하지만 반성을 한 그 사람들조차 무언가를 통해 거울을 보며 모르던 자신의 모습과 일면을 발견할 뿐, 괴로움에 처한 당사자를 본 사람은 없다. 후가 연희를 찾아다닌 것 또한 또 다른 명분이자 자기만족에 불과했다. 후에게 연희는 그 자체의 대상이 중요한 게 아니라, 연희라는 존재의 상징성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거울은 자신의 얼굴을 구체적으로 드러내 주지만 그의 눈동자에는 자신만이 보일 뿐, 상대방은 보이지 않는다. 후와 한정효는 자신에게 생겨난 고통을 구원을 위해 겪어야 하는 고난으로 인식한다.

한정효와 후는 여러 가지로 닮았다. 그들은 자신을 돌아볼 줄은 알지만 타인을 보호하거나 돌볼 줄은 모른다. 형제들은 모두 하나의 같은 존재임을 드러내고, 그들은 이해할 수 있는 그들의 세계 속에서만 서로 돕는다. 즉 그들은 타인을 돕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을 돕는 것이다. 동일시에만 집중하는 그들은 이질성의 중요함과, 타인의 이해의 근원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모두 죄책감을 느끼지만, 죄책감의 해소와 용서, 극복은 오로지 자신의 괴로움을 이겨내는데 사용된다. 일종의 가해자인 그들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스스로를 구원하지만 피해자를 돌아보지는 않는다. 비록 그럼에도 괴로움을 당한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삶을 극복했다. 각자의 짐은 각자에게 주어지는 게 당연하고, 그의 극복도 역시 스스로의 몫이라지만 타인을 바라보는 창을 살펴보지 않고 거울 만을 바라보는 지상의 노래의 자기성찰은 타인을 바라보지 않아 안타깝고 서글프다. 내가 생각하는 종교와 극복은 자신을 바라보고, 그를 통해 타인을 돌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나 역시 이를 강요할 수는 없다. 인간은 자신에 대한 이해를 하기에도 벅찬 생물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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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단장 죽이기 2 - 전이하는 메타포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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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는 그림이나 사람이 존재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 사람만이 그릴 수 있는 무언가, 혹은 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무언가를 통해 사물은 존재가치를 부여받는다는 것이다. '나'는 본래 타인의 본연의 모습을 찾아 보여주는 재주를 가지고 있다. 초상화와 그림이란 사진이나 거울과는 달리 단지 반사나 껍데기를 담아 놓는 게 아닌 그 사람의 인간 자체의 생명의 온기가 들어있다. 그는 초상화를 통해 타인을 그리고 타인을 찾아주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자신을 잃어버리고 선택하지 않은 자신만이 있게 되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은 물리적인 반사지만 그가 그리는 그림은 진짜 사람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가 선택하지 않고 바라지 않는 그림들이 나오게 됨으로 인하여 혼돈을 겪는다.

'나'는 자신만의 작품을 하고 싶은 사람이었지만 뜻밖에도 그의 재능은 타인의 얼굴을 일정한 방식으로 찍어내는 기술적인 초상화의 영역에 재능을 가졌다. 그는 그림에 대한 열정이나 특수성을 잃어버린 채 이미 같은 얼굴을 가져 얼굴이 없는 초상화를 복사하는 생활에 물들었다. 사실 그는 큰 변화를 보이지 않는 바다보다 매 순간 새로운 모습을 보이는 산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만큼 그는 새로움과 사물의 변혁, 특수성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으나 초상화의 경험으로 말미암아 특징을 잃어버렸다. 그는 사람의 인생을 요약하여 초상화를 그리며 그의 언어 습관조차도 상대방의 말을 요약하여 정리하는 버릇이다. 그는 무언가를 새로이 만들기보다 정리하고 그대로 요약하며 반복한다. 변함없이 반복되고 특징이 없는 그에 질린 그의 아내는 그를 견디지 못해 이혼하고 다시 재혼한 9개월의 기간 동안 찾은 산장에서 그는 물리적 일정함과 기준이 흐트러지는 체험을 한다.

아마다 도모히코는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 조반니의 한 장면 '기사단장 죽이기'를 일본의 화풍으로 번역해 그려놓았다. 번역이란 해당 작품의 복제가 아니다. 번역은 다른 문화, 다른 기술로 만들어 놓은 작품을 해당 언어와 문화에 어울리게 해석하여 새로운 작품으로 존재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다시 말해 새롭게 해석한 예술품, 또는 작품은 그 자신으로 가치를 지니며 존재의 필요가 된다. 거울이나 사진의 물리적인 반사가 아닌, 새로운 그림과 작품이 된다. 초상화도 마찬가지로 상대방의 얼굴과 본연을 끄집어 내어 새로운 독립적인 작품으로 만들어 놓는 창조적인 작업인 것이다. '나'는 상대방의 내면을 파악해 그리는 재주를 가지고 있는 만큼, 지금 그에게 필요한 것은 기계적인 반복에 의한 그림이 아니라 새로운 차원의, 인간을 통한 독립적인 창조물이다.

일본화는 특정한 도구를 사용하며 일본화의 정신성을 중요시하지만 서양화의 난입에 의해 생활물품에서 예술품으로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탓에 고정된 틀이 없이 자유롭다. 초상화는 상대방의 영혼을 깎아 그림에 집어넣어 영속을 만드는 과정이다. 그러자면 그 사람의 내면에 있는 결정적인 정신세계가 그림에 표현되어야 한다. 내면을 찾아 넣는다는 것은 그 사람 안에 있는 자신도 모르는 것을 그리는 것을 말한다. 그가 그동안 해온 프로 초상화 작가로서의, 상대방이 원하는 무언가를 그리는 게 아니라, 멘시키의 여러 모습을 작가의 내면에서 찾아 그대로 표현하게 되었다. 즉, 진정한 상대의 정신적 세계를 발견하는 건 상대방이 아는 것, 그리고 알지 못하는 것을 상대와의 관계속에서 알아내고 땅속 방울의 울림처럼 내면에서 듣고 찾아내어 자신의 내면세계 속 무의식 속에 특수한 존재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일본화에서 중요한 건 여백이다. 여백이 그림을 결정하고 사용하지 않은 공간에 따라 변화한다. 돌고래는 좌우의 뇌를 번갈아가며 사용하며 여백을 주고, '나'의 모습 또한 마찬가지다. 여백이 없는 멘시키와 같은 삶은 포석을 두며 의도를 가지고 움직이며 머리와 사물을 총동원해 여지와 여유를 없앤다. 때문에 그는 다른 것과 사람을 때로는 부러워하고 숨기고 자아를 시종일관 움직여 자신에 대한 불안을 없앤다. 자아가 고정되기 위해서는 오히려 공간이 필요하다.

현실과 비현실은 미묘한 경계선에 존재한다. 이카루스의 날개가 녹아떨어지는 것고 태양을 향해 얼마나 날아가느냐에 있으며 삶과 죽음에 대한 공포도 마찬가지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있을 때도 어둠이 주는 공포에 먹히면 공포가 되고, 먹히지 않는다면 누구도 근접할 수 없는 자기만을 위한 방이 된다. 양면이 주는 경계선이란 땅에 산 채로 묻어질 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닌, 죽지 않은 채로 죽음에 가까워지기만 할 때의 공포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때로는 모르는 게 나은 진실이 존재한다. 알게 됨으로 흔들리지 않는 진실에 받는 충격보다, 모르기 때문에 흔들리며 불안정함이 더 필요한 상황이 있다. 그리고 그 사물의 본질은 꼭 언어화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비유화 그림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게 바람직하며, 은유와 암호조차도 보이는 그대로 이해하는 게 좋다. 구덩이에 들어간 멘시키를 가두어두려는 의도가 조금이라도 생기지 않는 그는 누군가를 이기려 하거나 부러워하는 마음을 갖지 않는다. 물리적으로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그는 힘들어하기는 하지만 나름의 돌파 방법을 가지고 있고 타인의 진정한 내면을 바라보는 방법을 가지고 있다. 이는 얻고 싶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나'가 가진 그림이나 사물의 내면을 바라보는 법, 이미지를 구체적으로 기억하는 것 등 그는 타인에게 주어지지 않고, 원해도 가질 수 없는 것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그는 상대방을 읽고 타인도 알지 못하는 자신을 그림으로 표현한다. 타인에 의해 자신이 표현된다는 건 자신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지만 알고 싶지 않은 자신을 바라보는 일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지만 모르는 게 나은 진실이 존재하고, 마찬가지로 모르는 게 더 좋은 자신의 모습이 있기도 하다.

플라톤에 의하면 이데아는 시공을 초월한 인간의 의식을 뛰어넘는 정신적인 형태의 완성형이다. 이데아는 인식 저편에 보이지 않지만 보여야 하는 무언가를 담고 있으며 하루키는 그를 인간 각자의 주관에 따라 인과의 흐름에 맞추어 귀결되는 정신세계라고 표현한다. 인간은 유물론적인 물질과 관계없이 이데아로서의 정신세계가 들어 있으며, 주인공은 그 이데아의 모습을 보고, 거울 저편에 있는 그 사람의 진실된 모습을 꺼낼 수 있는 사람이다. 유물론적 세계관의 끝에 있는 사람은 멘시키이고, 그는 그런 '나'를 마음 한켠으로 부러워한다.

작가인 아마다 도모히코의 세계 속에서 2차 세계대전과 난징 대학살을 겪으며 애인과 동생을 잃고 고문을 당한다. 그에 따라 도모히코는 자신의 생명을 담아 일본화된 '기사단장 죽이기'를 그린다. 마찬가지로 그림을 그리고 동생을 잃어버린 '나'는 인과에 이끌려 도모히코의 집에 들어와 '기사단장 죽이기'와 '이데아'를 꺼내버린다. 그 과정에서 그린 멘시키의 초상화와 여동생을 떠올리게 하는 마리에와의 만남 또한 인과에 의해 발생되었으며 기사단장을 칼로 찌르고 흰색 스바루 포레스터의 남자를 만나는 것 또한 그 과정에서 마주해야 할 '나'의 또 다른 정신세계다. 

'나'에게 필요한 건 자신의 독특성에 대한 깨달음과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는 일이었고, 아마다 마사히코의 '기사단장 죽이기'와의 만남은 그에게 특수한 경험과 의미를 주었지만, 오히려 그가 알게 된 건 현실과 증명할 수 있는 현상, 아내인 유즈에 대한 애정, 그리고 자신의 초상화에 현실의 의미를 넣을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는 마리에에게도 마찬가지다. 난징대학살의 고통을 담은 마시히코의 그림은 생령을 불러올 만큼 거대한 담론이 되고 진실은 여전히 꺼내지지 않지만 시공을 뛰어넘은 이데아의 세계에서 인과에 따라 의미를 가진다. 감추어져 있지만 표현되고 싶은 사실이 있고, 표시되어 있지만 감추고 싶은 사실도 있다. 또한 감추어져 있는 걸 꺼내지 말아야 할 것도 있다. 이데아의 근원이 타인의 의식에 존재하는 것처럼 자신의 또 다른 이면과 진실, 감추어진 사실도 인식과 함께 존재한다. 누군가가 무언가를 읽고 인식된다면 그걸 사라지게 만들거나 없던 일로 하는 건 상당히 어렵다. 때문에 중요한 건 드러내지 말아야 할 것과 드러내야 할 것을 알아보는 것이다. 알아야 하는 것과, 알지 말아야 할 것을 알아보는 것, 그리고 진실이 드러날 때를 알아보는 것 말이다. 사실을 아는 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고 그만큼의 위험부담이 따른다.

'나'는 부담과 이데아, 메타포의 상황에 시달리다 다시 현실로 들어가지만 그 현실은 사건 발생 전의 과거와는 다르다. 그는 사물과 사람의 내면을 바라보는 자신을 깨닫고 있고, 덮어둔 그림도 언젠가는 다시 꺼내서 그릴 것이다. 인지된 사실은 결코 인지가 되지 않았던 것과 똑같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이 정반대로 뒤바뀌는 일은 어지간해서는 벌어지지 않지만 개인이 멈추지 않는다면 인과에 따라 세상은 어느덧 모습을 바꾼다. 그럼에도 역시 인생도, 인간도 어디까지나 완성되는 일은 없지만 말이다. 현상을 덮어 놓아도 그 안에 진실된 이데아는 제 모습을 한 채 숨어 눈을 뜨고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에게 방울 소리를 들려준다. 그래서 중요한 건 내면을 바라보고 표현하려는 개인의 노력과 필요할 때 필요한 것을 놓치지 않으려는 바라봄이다. 그를 알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전과 조금은 바뀐 채로 새롭게 삶을 영위할 수 있다. 그렇게 기사단장은 현실과 비현실 사이 어딘가에 존재해 어느 땐가 모습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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