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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일제의 탄압에서 간신히 벗어난 한국에서

어린 소녀가 일본 군인과 우정과 사랑을 나눈다면,

우린 그 소녀에게 돌을 던질 것인가?


베티 그린의 『독일 병사와 함께한 여름』 속 설정, 유대인 소녀와 독일군의 우정이라는 주제를 좀더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나라 상황에 맞춰 상상해보았다. 1973년, 이 작품이 출간될 당시 유대인들에게 얼마나 큰 충격을 안겨주었을지, 조금이나마 실감할 수 있을 것 같다.


유대인인 소녀 패티 버건은 하루하루 간신히 살아낸다. 백화점을 운영하는 부모님에게서는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다. 아빠는 난폭한 성향이라 패티에게 툭하면 손찌검을 했다. 패티가 조금이라도 말을 안 듣는다 싶으면 바로 허리띠를 풀러 휘둘러댔다. 허영심이 많은 엄마는 예쁘장하고 애교 많은 둘째 샤론만 예뻐한다. 패티는 엄마아빠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 반, 벗어나고 싶은 마음 반이다. 인정받고 싶어서 없는 이야기까지 지어내지만 결국 엄마아빠에게 돌아오는 건 무관심한 눈빛이다. 그런 패티를 인정해주고 사랑해주는 건 흑인 유모 루스뿐이다.

여름방학이 시작되고, 외톨이였던 패티는 혼자 시간을 보낸다. 그런데 마을에 와 있는 독일 포로들이 모자를 사러 패티네 백화점에 오게 된다. 우연히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포로 안톤과 이야기하게 된 패티는 독일군이 생각보다 선하고 똑똑하다는 점에 놀란다. 독일군은 악마 같이 생겼다고 들었지만 오히려 잘생긴데다가, 엄마아빠보다 패티의 말을 더 잘 들어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패티는 자기만의 아지트에 틀어박혀 사전을 보며 단어들을 갖고 놀고 있었는데, 저 멀리서 감옥에서 탈출한 안톤을 본다. 그리고 안톤을 자신의 아지트에 숨겨준다. 유대인 소녀와 독일 병사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미국 청소년 소설의 고전인 이 작품은 출간되고 난 뒤, 금서로까지 지정된 작품이다. 유대인으로 설정된 패티 부모의 성향이 당시 사회 통념상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선한 유대인, 악한 독일인, 이렇게 흑백논리가 펼쳐져 있는 상태였는데 이 작품에는 오히려 유대인이 악인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청소년 소설답지 않은 비극적 결말이 이 작품을 금지하게까지 만든 것이다.



그러나 현재까지 읽히는 이유에는 이 작품이 갖고 있는 나 자신을 찾기라는 주제 때문일 것이다. 패티는 자신의 존재조차 무시당하는 아이다. 때문에 자기가 예쁘지 않다고, 나쁘다고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안톤이라는 친구를 만나면서 패티가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 자기가 나쁘지 않다는 것, 우리 가족이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패티는 가난한 집 아이와 친구를 하고 흑인 유모를 엄마보다 더 따른다. 이미 편견을 많이 극복한 아이인 것이다. 하지만 자기 자신에 대한 편견은 스스로 극복하지 못했다. 악한 사람일 거라는 편견을 극복하고 안톤을 받아들인 결과 패티는 마침내 자기 자신을 인정하게 되었다!


이 청소년 문학의 고전을 우리나라 아이들이 읽는다면, 충격적일 수도 있을 것 같다. 보통 방황을 하던 청소년이 가족의 따스한 품으로 돌아온다는 결론이 우리 사회에서 통하는 줄거리인 것 같은데, 이 소설은 정반대의 것을 알려주고 있다. 나는 옳다, 우리 가족이 틀렸다.

안톤의 은신처였던 곳에서 나는 나뭇잎 하나가

단단한 떡갈나무에서 가족관계를 끊고 떨어져나와

잔잔한 바람을 타고 자유롭게 날아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저 나뭇잎처럼 되고 싶다.


용감하고 똑똑한 소녀 패티 덕분에 우리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호두 겉껍질 같은 단단한 편견을 극복하고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피비. 그가 나를 그렇게 불렀다. 이니셜로 불린 내 이름은 이전에는 전혀 느낄 수 없었던 힘과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아빠와 나라에 대한 충성을 내 자유의지로 저버린 지금, 나는 스스로가 선하고 가치 있는 사람으로 느껴졌다.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다시 흘러가는 것이야말로 구명보트가 할 일이 아닐까. 난파당한 사람들을 육지까지 데려다주는 것이 아니라 육지가 보이는 곳까지 인도해주는 것. 마지막 남은 몇 미터를 홀로 헤엄쳐가는 건 그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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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카락은 늘 삐쭉삐쭉 솟아 있고, 어딘가 자신감 없어 보이는 소년 캐머런은 너무나 잘난 두 형 밑에서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해나가고 있다. 큰형 스티브는 풋볼팀의 에이스였고, 작은형 루벤은 미소 한방으로 모든 여자들을 쓰러뜨리는 타고난 바람둥이였다. 누나인 세라는 방황하던 시기를 거쳐서 자신만의 길을 닦아 나가고 있다. 이런 손위형제들 밑에서, 가난한 가정에서 캐머런은 늘 글을 쓴다. 글을 쓰는 것 만이 자신을 괜찮은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것 같았고, 글을 쓰는 것 만이 자신의 영혼을 지키는 일이었다. 캐머런은 늘 글을 써서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 언제나 글을 가지고 다닌다.



'좀 외로운 새끼'

작은형 루벤이 캐머런을 부르는 말이다. 루벤은 여자친구 옥타비아와 만나고 있었다. 옥타비아, 하모니카 연주자 옥타비아, 캐머런이 한눈에 반한 여자 옥타비아.  캐머런은 루벤 여자친구 옥타비아의 진가를 한눈에 알아보고 단번에 사랑에 빠졌다. 형 여자친구지만 은근한 마음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여자친구를 갈아치우는 게 취미인 루벤은 옥타비아를 차버렸고, 새로운 여자친구 줄리아를 만났다. 그리고 슬퍼하던 옥타비아는 캐머런에게 "우리집 앞에 와서 있어줄래?"하고 묻는다.


"내 이름은 캐머런이야. 늘 여자 안에 푹 잠기고 싶다고, 여자의 영혼 안으로 들어가고 싶다고 말했지만, 그 근처에라도 가본 적은 한 번도 없어. 심지어 여자 몸에 손이 닿은 경험도 없어. 나한테는 친구가 없어."


과연, 여자친구 사귀는 게 소원인 외롭고 진지한 소년 캐머런은 옥타비아와 사귈 수 있을 것인가? 형의 전여친과?


『책도둑』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확실히 알린 작가 마커스 주삭의 작품 『내 첫번째 여자친구는』은 그가 『책도둑』과 『메신저』이전에 쓴 작품이라고 한다. 실제로 작가가 작품을 쓴 순서는 『책도둑』 『메신저』 『내 첫번째 여자친구』라고 한다. 『책도둑』을 너무도 좋아하는 바람에 『내 첫번째 여자친구는』이 나오자마자 바로 펼쳐들었다! 원제는 'Getting the Girl'이다.

굳이 한국어로 번역하자면 '여자 얻기'


여자 얻기


나는 생각을 열심히 한다--침묵과 여자를 얻는 것에 관해.

얻는 것.

얻는 것.

젋고 지저분할 때는 오로지 어떻게 하면 여자를 손에 넣을지만 생각했다...... 적어도 그것이 사람들이 하는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지 몰라도, 말은 그렇게 한다.

나에게는 그 이상이라는 느낌이 든다. 나는 그애의 이야기를 듣고 싶고, 그애를 알고 싶다.

이해하고 싶다.

무엇을 할지.

무엇을 말할지.

(중략)

그러나, 평소와 마찬가지로, 기다려야 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어떻게 될지는 절대 모른다.

어쩌면 언젠가는 나도 이해할지 모른다.

언젠가는 여자를 얻을지 모른다.


언젠가는 심지어 세상을 얻을지도 모른다...... 조금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캐머런이 생각하는 '여자 얻기'는 단지 여자를 만나는 것이 아니다. 한 인간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인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세상까지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스스로를 패배자로 규정한 한 십대 소년이 외로움에서 벗어나 괜찮은 사람이 되기위해 발버둥을 친다. 세상을 이해하고 받아들여 괜찮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그렇게 캐머런은 늘 글을 쓰고 오래 생각을 한다. 각 장을 닫는 캐머런의 글은 짧은 시처럼 읽힌다. 여자를 얻는 것에 대해, 손뼉을 치는 행위에 대해, 한 여자가 자신을 떠나는 것에 대해, 깊게 생각하고 어른스럽게 정리해간 글을 읽고 있노라면 생각지도 못했던 표현에 감탄할 것이다. 눈물을 흘리는 것을 '얼굴이 떨어진다'고 표현하고, 여자아이가 자신에게 처음으로 마음을 연 날, 집으로 돌아오면서 공기의 맛이 좋다고 표현한다. 캐머런의 감정은 그렇게 과하지 않고 부담스럽지 않게, 시처럼 깊지만 담백하게 우리의 마음속으로 흘러들어온다.


한 작은 시인이 여자친구를 얻기 위해, 한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 세상을 이해하고 꽤 괜찮은 사람이 되기 위해 글을 써내려간 기록, 『내 첫번째 여자친구는』.  이 쓸쓸한 겨울밤을 달래줄 서정적인 작품이 될 것이다. 어딘가 외로워보이는 꼬마 시인 캐머런의 이야기를 꼭! 읽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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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한 호화로운 아파트.

1층 입구에 작은 공간이 있다.

텔레비전이 하루종일 켜져 있는 곳, 24시간 누구나 문을 두드리고는 세탁물을 받아달라, 우편물을 받아달라 불쑥 요청하는 곳.


하지만 여기 수위는 어딘가 다르다. 오십대의 수더분한 아줌마 르네 미셸은 남다른 지성과 교양이 있는 사람이다. 『안나 카레니나』를 읽고, 수많은 영화를 탐닉하는 수위 아줌마. 자신의 교양이 프랑스 상류층들에게 들킬까봐 부러 문법 실수를 저지르고, 엉뚱한 짓을 한다. 하지만 혼자 있을 수 있는 이 공간, 이 공간에서는 온갖 철학적 사색과 미적인 안목이 빛을 발휘한다.


호화 아파트에 사는 팔로마는 수위 아줌마가 어딘가 수상하다는 걸 눈치챈다. 미셸의 우아함을 눈치챈다. 이 아줌마가 남다른 교양과 안목이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다. 팔로마는 또래와는 다르게 유난히 똑똑한 아이다. 어른들처럼 어항속의 물고기처럼 살기 싫어, 이 호화로운 아파트에 불을 지르고 죽기로 결심한다. 호화로운 이 아파트는 가시처럼 번뜩이는 지적임을 숨기고 있는 두 고슴도치를 품고 있다. 나머지 허세와 허영으로 가득한 아프트 주민들 속에서 이 두 고슴도치들을 스스로를 숨기고 있다.


 

미셸 부인에겐 고슴도치의 우아함이 있다. 겉은 진짜 철옹성 같은 가시로 뒤덮여 있지만, 안은 부드럽고 섬세하다. 무딘 듯하나 무디지 않고 몹시도 고독하고 더없이 우아한 작은 짐승, 고슴도치처럼.

 

그러던 어느날 일본인 신사가 이사를 오게 되고, 그는 이 두 고슴도치를 알아본다. 그리고 르네 미셸의 지적임을 단번에 알아보고 그녀와 대화를 나누며 고슴도치를 세상 밖으로 꺼내려 한다.


그리고 찾아오는 충격적인 결말.

 

 


미셸과 팔로마의 시점이 번갈아가며 나오는 이 작품은 아이의 시선, 수위의 시선으로 프랑스 상류층의 허세를 비꼬아 말한다. 어른들에게 무시당하고 조금이라도 튀면 짓밟히는 아이의 시선으로 본 세상은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다. 프랑스의 피라미드 가장 아래층에 있는 수위 아줌마의 눈을 통해 상류층들이 얼마나 겉만 번지르르한지, 그 지저분한 부분이 드러난다. 진지한 면모도 있지만 더 돋보이는 건 통렬한 유머다. 시종 유머러스함을 잃지 않으며 소박한 에피소드들이 이어진다.



사회의 가장 밑부분을 맡고 있는 자들의 시선을 통해, 그리고 그들에게 손내미는 상류층의 한 신사를 통해 소박하게 우리 사회의 화합을 일러주는 책. 이 책을 관통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은 충격적인 결말 이후에도 우리 안에서 계속 이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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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태어났다는 소식이 들렸다. 남자는 아기를 보러, 애를 낳은 아내를 보러 한달음에 달려간다. 남자는 아들이라는 소식에 무척 들뜬다. 병원 문을 열고 들어간 순간, 남자는 병원의 이상한 분위기에 놀란다. 모두들 이렇게 끔찍한 건 처음 본다는 표정이었다. 심지어 간호사는 남자에게 당장 아이를 데리고 나가라고 한다. 남자는 영문을 모르고 당황한 표정이다. 아이를 보여달라고 요청하고, 병실로 간 남자는 아이를 보자마자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표정이 된다.



남자의 아이는, 할아버지였다. 칠순이 넘은 듯한 할아버지. 얼굴에는 주름이 자글자글하고 머리도 하얗게 변해 있었다. 간호사는 아이에게 입힐 옷을 요구했다. 그리고, 옷을 사러 나가는 남자에게 아들은 말한다.  '그리고 지팡이도, 아버지. 지팡이 갖고 싶어.'



태어나자마자 노인이었던 벤자민 버튼은 몇 년이 지나자 할아버지와 둘도 없는 친구가 된다. 하지만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직도 아들인 벤자민 버튼을 어려워한다. 그리고 또다시 몇 년이 지나자, 벤자민 버튼은 아버지와도 친구가 된다.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을 했음에도, 젊은 여자가 나이든 남자와 결혼했다고 추문을 이끌고 다니고, 대학게도 못가고, 점점 더 어려지는 덕분에 아들에게 '삼촌'이라고 부르라는 모욕적인 이야기를 듣는다. 노인이 되자, 벤자민은 소년이 되어버리고, 어렸을 때는 갈 수 없었던 유치원에 가게 된다. 무려, 손자와 함께.



일 년 뒤 로스코의 아들은 1학년에 진급했지만, 벤자민은 유치원에 머물렀다. 그는 매우 행복했다. 때로 다른 꼬마들이 커서 무엇이 될지 이야기를 나누면 그의 조그만 얼굴에는 그림자가 스쳐지나가곤 했다. 그건 자신이 절대 공유할 수 없는 경험이라는 걸 어린애다운 방식으로 어렴풋이 깨닫기라도 한 듯이.



벤자민 버튼은 역주행으로 삶을 살게 된다. 노인으로 태어나 아기로 삶을 마감한다. 역주행하는 삶은 어떨까. 정주행 하는 삶이 더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까. 역주행으로 살아보지 않는 한 모를 일이다. 노인으로 태어난 벤자민은 딱히 행복해보이지도, 불행해보이지도 않았다. 그정도의 불행은 정주행으로 사는 우리도 겪는 불행 아닌가. 세월은 역주행하는 자에게도, 정주행하는 자에게도 고만고만 불행하고 행복하게 흘러간다.



세월은 단조로운 것들로 채워진 채 흘러갔다. 삼 년째에도 유치원으로 돌아갔지만, 이제 그는 너무 어려서  화사하게 빛나는 종잇조각들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다른 아이들이 자기보다 크고 무서워서 그는 울음을 터뜨렸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에 실린 11편의 단편은 유쾌하고 기발하다. 작은 소동극을 보는 듯하다. 피츠제럴드가 그때그때 단편을 써서 먹고살았다던데, 순식간에 써낸 이 장편들이 이렇게 하나같이 유쾌하다니. 피츠제럴드가 괜히 천재라고 불리는 것이 아니었다.



제1차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은 재즈시대로 불렸다. 가장 풍요롭고 화려했던 미국 사회를 가장 잘 표현해낸 피츠제럴드. 경박하다가 시니컬하고, 우스꽝스럽고 기발하다가 어느새 쓸쓸해지는 이야기들만 모아놓은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피츠제럴드의 작품 세계를 가장 잘 엿볼 수 있는 단편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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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에만 두 번을 읽었다. 필립 로스의 <죽어가는 짐승>

또 두 권을 사서 선물을 했던 작품이다.

 

 

 

 

노 교수 데이비드 케페시가 등장한다. 인터뷰를 하듯,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자신의 성생활에 대해. 자신이 사랑했던 아이 '콘수엘라'에 대해. 자신의 아들에 대해. 그리고 콘수엘라의 가슴에 대해.


 

노 교수의 이야기를 듣는 '나'는 누구인지 모른다. 하지만 노 교수는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털어놓는다. 이 교수의 또다른 학생일지도....


 

케페시는 늘상 자신의 수업을 듣는 여학생들과 잠자리를 즐겼다. 하지만 이번에 만난 '콘수엘라'는 조금 달랐다. 케페시는 콘수엘라에게 굴복당했다. 자신의 사그라드는 생명력에 반해 그녀는 너무나 밝게 빛났다. 케페시는 콘수엘라가 만나는 다른 남자들에게 심한 질투를 느꼈고, 그녀를 만족시켜주고 싶었으며, 그녀가 만족하지 못할까봐 전전긍긍했다. 또 함께할 수 없는 미래를 생각하며 더욱더 힘겨워한다.


 

하지만 이런 불온한 사랑은 끝이 나게 마련이다. 콘수엘라는 몇 년 뒤, 다시 케페시에게 전화를 건다. 그리고 다시 나타난다. 자기의 아름다운 육체를 봐달라고, 사진으로 찍어달라고 한다. 콘수엘라의 찬란하게 빛나는 육체에 반했던 케페시는 그 제안을 거절하지 않는다.



 

우리나라 작품 <은교>와 여러 면이 비슷했던 작품이다. 점점 사그라드는 육체의 남성이 생명력으로 가득찬 젊은 여성에게 빠진다는 설정. <은교>도 영화화가 되었고, 이 작품또한 <엘레지>라는 제목으로 영화화 되었다! 페넬로페 크루즈가 젊은 콘수엘라 역할을 했는데 정말 예쁘다..... 몸매도 정말 예쁘고....

 

 

 

 


 

그 아이의 커다랗고 아름다운 가슴. 그리고 역동하는 생명력. 그리고 애써 부인해보지만 어쩔 수 없는 죽음.


 

이런 욕구. 이런 혼란. 절대 멈추지 않을까? 한참 지나고 나니 내가 간절히 바라는 게 뭔지도 잘 모르겠더라고. 그 아이 젖퉁이? 그 아이의 영혼? 젊음? 소박한 마음? 어쩌면 그보다 나쁠 수도 있어--어쩌면 이제 죽음에 다가가게 되니, 나도 은근히 자유롭지 않기를 갈망하는지도 몰라.

 

 

이 책을 다 읽고나자, 죽어가는 짐승이 누굴 뜻하는 것일지 모르겠다. 케페시를 뜻하는 것일까, 아니면 콘수엘라를 뜻하는 것일까. 아무튼 우리 모두 하루하루 죽어가고 있음이 틀림없고, 우리의 생명은 시간이 갈수록 사그라드는 것이 맞다. 하지만 우리의 욕망은 시간이 흐른다고해서 줄어드는 것이 아닐 것이다. 아름다운 것에 대한 소유욕은 언제나 강렬할 것이다.


 

 "내 심장을 살라다오, 욕망에 병들고

죽어가는 짐승에 단단히 들러붙어 있어

이 심장은 자기가 무엇인지도 모르니"

예이츠. 그래.  "모두 그 관능의 음악에 사로잡혀,"



사진을 찍었는데... 표지의 여인이 너무 추워보여서 낙엽 이불을 덮어주었다.

죽어가는 짐승과 생명을 다해 떨어진 낙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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