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으로 읽는 플라스틱 연대기
배진영.라병호 지음 / 자유아카데미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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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스틱의 시대다. 1800년대 천연수지를 이용해 만든 셀룰로이드 이후, 굿이어가 가황 천연고무를 발명한 이후, 상아로 만들던 당구공을 대체하기 위해 만든 셀룰로스 나이트레이트 이후, 리오 베이클랜드가 1909년 최초의 인조 플라스틱인 베이클라이트 개발에 성공한 이후, 그리고 폴리에틸린에 개발되고, 듀폰의 캐러더스가 나일론을 개발하고, 비닐이 개발되고, 폴리우레탄, 스판덱스가 탄생하고, 결국 2차 세계대전 이후 진정한 플라스틱 시대가 도래했다. 그리고 21세기에 이르기까지 플라스틱의 용도는 점점 더 많아졌고, 플라스틱 없이는 현대 문명 자체가 존립하기 힘든 지경까지 이르렀다.

그러는 사이에 플라스틱은 환경 문제의 상징적 존재가 되어 왔다. 태평양에 떠다니는 한반도의 넓이보다 더 넓은 플라스틱 섬, 플라스틱 빨대가 코에 꽂혀 괴로워하는 바다거북, 환경호르몬 등등. 플라스틱은 없어서는 안되는 물질이 되었지만, 또 있어서는 안되는 물질도 되어 버렸다.

이 플라스틱의 탄생에서 발달,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상세히 다루고 있다. 우리나라의 상황도 다루고 있어 이 산업에서의 우리나라의 위상(석유화학 분야 5위라고 한다)도 알 수 있다. 기업들이 어떤 노력을 펼치고 있는지도 알 수 있다. 플라스틱에 대해 이해하고, 나아갈 방향도 대체로 공감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책을 쓸 때 애초에 어떤 독자를 목표로 했는지 궁금하다. 일반 교양 도서로 읽기에도, 또 이쪽 분야의 전문가들이 읽기에도 서로 애매하다. 쉽고, 어렵고의 문제라기보다는 어떤 사람이 읽었으면 하는, 어느 정도의 목표가 있었으면 더욱 좋은 책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좋은 내용을 가지고, 왜 이렇게밖에 쓰지 못했을까 하는 아쉬움. 또 한 가지는 “최씨 일가의 SK 100년 기원” 운운은 좀 낯이 간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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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머스: 왜 그들만 유명할까
캐스 선스타인 지음, 박세연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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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질문들이다.

비틀스가 1990년대에 나왔더라도 지금처럼 유명해졌을까?

밥 딜런이 그토록 유명해진 것은 필연적인 결과였을까?

또는 오랫동안 잊혔던 코니 컨버스는 죽은 지도 한참 후에 어떻게, 이른바 역주행을 하게 되었을까?

생전에 별로 유명하지 않았던 존 키츠는 죽어서라도 유명해졌는데, 리 헌트는 지금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을까?

 

이런 질문도 가능하다.

좋은 책들은 많은데, 어떤 책들은 베스트셀러가 되고, 다른 책들은 그렇지 못한가?

과연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가 훌륭한 작품이라는 것은 알겠는데, 그만한 작품 중에 그만큼 명성을 얻지 못하는 작품들은 왜 그런 걸까?

 

말하자면, 왜 특정 인물이 유명해지는 이유에 대해 따져보고 있다. 캐스 선스타인은 법학자이면서, 행동경제학자이고(노벨경제학상을 받은 리처드 탈러와 함께 쓴 넛지를 언급할 수밖에 없다), 또 미국을 비롯한 각국의 정책 자문을 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 책은 어떤 국가적 정책을 제안한다든가, 사회적 변화를 촉구한다든가 하는, 커다란 이야기를 담고 있지 않다. 하지만 다 읽고 보면 왜 이런 데 관심을 갖는 것이 그저 호기심 차원의 것이 아니라 좀 더 넓고 깊은 생각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마치 넛지처럼 말이다.

 

앞선 질문들에 대한 답을 하자면, 즉 어떤 사람들이 유명해지는가에 대한 답을 하자면, ‘답은 없다’. 많은 사람들이 성공한 인물들, 성공한 기업들, 성공한 제품들에 대한 분석을 하지만 결국은 그게 끼워맞추기식이라는 것이다. 성공한 사람이 A, B, C라는 덕목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면, 그런 덕목을 갖춘 수많은 사람들이 그만큼 성공하지 못한 것을 설명하지 못한다. 또한 그런 덕목을 갖추지 못하고도 성공한 사람에 대해서도 설명하지 못한다(하버드대학을 중퇴한 빌 게이츠 vs. 프린스턴대학을 졸업한 제프 베소스!).

 

그래도 찾아야 한다면, 그건 상당히 우연적인 요소가 좌우한다는 것이다. 물론 사람은 우수한 자질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소설이나 시, 그림은 훌륭해야 하며, 스포츠 스타는 그만큼의 성과를 내야 한다. 그건 전제다. 그다음에 그런 사람과 작품을 그와 비견되는 다른 사람과 작품들을 뛰어넘는 유명세를 갖기 위해서는 몇 가지의 우연이 있어야 한다. 이를테면 초기의 팬덤을 형성한다든가(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다) 하는 것이다. 혹은 어떤 계기를 잘 이용해야 하는데, 그것을 도와주는 사람을 만나든가 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를 상상하게 되는데, 그것은 사실 우연적 요소가 겹친 것이라고 설명할 도리밖에 없다.

 

1부의 아이코닉이 그런 내용으로 성공의 공식을 찾아 성공을 원하는 이들에겐 다소 좌절(?)스런 내용이라면, 2부의 아이콘은 그런 우연, 혹은 어느 정도의 필연적 요소를 등에 업고 성공한 이들에 대한 작은 평전 같은 글들이다. 어떻게 보면 1부의 보완이면서, 그 내용을 부정하는 듯도 하지만, 결국은 일맥상통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데, 성공한 이들 혹은 작품(존 키츠, <스타워즈>, 마블의 아버지 스탠 리, 밥 딜런, 후디니, 에인 랜드, 비틀스)을 보면 그럴 만한 필연적인 이유가 있었다기 보다는 우연적인 요소가 마치 필연적인 운명처럼 다가왔다는 것을 알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실 2부의 이야기들은 정말 흥미롭다. 어떤 성공의 이면을 엿볼 수 있어서인데, 우리는 그만큼 성공의 이야기에 관심을 갖고 때로 환호한다. 나 역시도 그럴 수밖에 없는데, 그럼에도 이 이야기들 가운데 더 흥미로운 것은 별로 주목받지 못했던 존 키츠와 같은 이가 사후에 조명을 받고 유명해지는 이야기다. 고흐도 그랬고, 코니 컨버스도 그랬다. 이들의 이야기는 한편으로는 위안이 되면서, 또 한편으로는 애처롭다.

 

실은 이 책을 집어들 때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보면서 그 답을 찾고 싶었다. (나는 과학을 하는 사람이니까) 어떤 과학자가 다른 과학자보다 더 유명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예를 들어 페니실린 발견과 개발에 대한 지분에 대한 논란은 많지만 압도적으로 플레밍이 유명한 이유는 무엇일까?(플로리와 체인에 비해) 아인슈타인은 (물론 위대한 과학자이지만) 다른 물리학자들보다 압도적으로유명해진 이유는 무엇일까? 또는 그게 정당한 것인가? 뭐 그런 것들이다. 실은 이런 질문에 대한 나름대로의 답을 가지고 있지만, 확인하거나 또는 다른 이유가 있는지도 들어보고 싶었다.

 

그런 것에 대한 얘기는 없었다. 그러나 전혀 실망하지는 않는다. 여러 흥미로운 이야기들은 그것 자체로도 읽을 만하고, 이런 이야기가 전하는 메시지도 충분히 새겨들을 만하다. 여기의 메시지? 그건 이런 거다. 우리 주위에 충분히 유명해질 만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들은 기회만 새롭게 발견될 수도 있다. 그런 기회를 만들어지고 보다 많은 훌륭한 사람과 작품들이 우리 곁에 자리 잡는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의 사회가 보다 풍부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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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울어진 뇌 - 일상에서 발견하는 좌우 편향의 뇌과학
로린 J. 엘리아스 지음, 제효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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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제목이 ‘Side Effect’. 흔히 부작용으로 해석하지만, 이 책의 내용은 그게 아니다. 여기서 ‘side’왼쪽/오른쪽중 어느 한 쪽을 의미하고, 그래서 ‘Side Effect’는 왼쪽과 오른쪽 중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져선택하게 되는 상황을 의미한다. 누가? 바로 우리! 인간이.

 

당연히 오른손잡이/왼손잡이 이야기에서 시작한다. 인간에게서 왼손잡이는 10% 정도다. 아주 오래된 벽화로부터 나온 증거는 50세기 동안 오른손잡이 편향이 유지되어 왔다고 한다. 그렇다면 왜 그럴까? 여러 가설이 제안되어 왔지만 누구라도 인정할 수 있는 그런 정설은 없는 듯하다. 나이든 사람들에서보다 젊은 사람들에서 왼손잡이의 비율이 높다는데, 이에 대해서도 완전히 상반된 해석이 있을 정도다. 한 가지는 왼손잡이의 수명을 얘기하고, 다른 한 가지는 왼손잡이에 대한 사회적 편견의 변화를 거론한다. 역시 어떤 것이 정답인지는 아직 모른다.

 

이 오른손잡이/왼손잡이에서 시작한 편향성은 갖가지 편향으로 나아간다. 놀라운 것은 이에 관해서 적지 않은 연구자들이 간단한 관찰에서, 아주 기발한 실험으로 연구해왔다는 점이다(물론 이 책의 저자 로런 엘리아스가 그 중심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책은 그만큼 풍부해졌다고 할 수 있다.

 

여러 편향성 가운데 가장 놀랍고, 흥미로운 것은 두 가지다.

첫 번째는 키스의 편향성이다. 사랑하는 사이에 키스를 할 때 거의 대부분이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린다는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과연 그렇다. 또 여러 사진들, 혹은 드라마를 보더라도 그렇다. 왜 그럴까? 잘 모른다. 더군다나 아기에게 뽀뽀를 할 때나, 사랑하지 않는 사이에 하게 되는 키스에 편향성이 없다는 것을 보면, 뭔가 있기는 한데, 왜 그런지 모른다.

 

다음은 아기를 안는 방향의 편향성이다. 이에 대해서는 전혀 인식하지 못했었는데, 대부분이 한쪽으로만, 즉 왼쪽으로 안는다. 역시 생각해보니... 과연 그렇다. 왜 그럴까? 역시 몇 가지 설명이 있긴 하다. 심장이 왼쪽에 있어서. 왼쪽으로 안으면 오른손으로 무엇을 할 수 있으니까(대부분이 오른손잡이니까). 그러나 역시 정답은 모른다. 그저 추측일 뿐이다.

 

그밖에 사진을 찍을 때 한쪽 방향을 주로 보이는 편향성도 상당히 재미있는데, 그냥 그렇게 한쪽 방향을 많이 보인다는 것보다도 감성적인 면을 보이고 싶을 때랑, 이성적인 면을 보이고 싶을 때의 방향이 다르다는 점이 특히 흥미롭다. 과학자는? 그렇다. 오른쪽 뺨을 많이 보인다고 한다. 그런데, 이건 잘 모르겠다.

 

그런데 이런 편향성 가운데 적지 않은 것들이 문화적으로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은 편향성이 인간의 유전자에 심어진 것일지 모른다는 견해에 대해 다시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한다. 말하자면 글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쓰는 문화에서 보이는 편향성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쓰는 문화에서는 편향성이 없어지거나, 아니면 아주 약해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왼쪽, 오른쪽의 편향성은 문화적인 것인가? 꼭 그렇다고만은 할 수 없는 게,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글을 쓰고 읽는 문화에서 완전히 반대의 편향성이 나타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내 생각인데, 유전적인 편향성이 문화를 만나 증폭되거나 약화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재미있는 얘기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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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의 꿈
앨런 라이트맨 지음, 권루시안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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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아케이드에 있는 시계탑이 여섯 시를 알린 뒤 침묵을 지킨다. 젊은이는 책상머리에 축 늘어진다. 오늘도 그는 움직이지 않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새벽에 사무실로 나왔다. 머리칼은 헝클어져 있고 바지는 너무 헐렁하다. 손에는 구겨진 원고 스무 장이 쥐여 있다. 시간에 대한 그의 새로운 이론으로, 독일 물리학회지에 오늘 우송할 참이다.”

 

소설의 첫머리다. 여기의 젊은이는 다름 아닌 아인슈타인이다. 그는 막 특수상대성이론을 다룬 논문을 완성하고 새벽에 사무실, 그러니까 베른의 특허청 사무실에 출근한 참이다. 1905. 1666년 뉴턴의 기적의 해에 이은, 또 하나의 기적의 해’. 아인슈타인은 광전 효과에 대한 논문, 브라운 운동에 관한 논문, 그리고, 특수상대성이론 논문을 발표한다.

 

특수상대성이론은 시간에 대한 과학적 이해를 바꾸어 놓았다. 소설은 바로 그 시간에 관한 다양한 상상을 다루고 있다. 꿈이라고 가장하고 있지만, 그래서 꿈이니 무엇이든 상상할 수 있다고 하고 있는 듯하지만, 그래서 우리가 실제 그러하리라는 것을 실감할 수는 없지만, 그렇더라도 과학적 근거, 즉 아인슈타인의 이론에 근거하고 있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에 근거한 시간에 대한 꿈, 내지는 깊은 사유를 쓰고 있지만, 그렇다고 이 소설은 과학적 언어로 점절된, ‘과학적소설의 외피에는 많이 탈피해 있다.오히려 시적 언어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는 소설이라고 해야 한다. 미래가 없거나, 과거가 없거나, 서로 다른 시간 감각을 지니는 등등 시간에 관해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상상하고, 그랬을 때 우리의 삶이 어떠할지, 우리의 생각이 어떠할지를 진지하게 시적 언어, 짧은 소설적 구성을 통해 탐구하고 있다.

 

그런데, 가장 놀라운 것은 이 소설의 작가가 과학이 세상을 바꾼 순간(또는 과학의 천재들)의 저자와 동일 인물이라는 것이란 점이다. 정말 믿을 수 있을까 싶지만 진짜다. 앨런 라이트먼, 그는 물리학자다. 그래서 물리학에 관한 책도 쓰지만, 이렇게 소설도 쓴다. 이렇게 상상력 가득한 소설 말이다.

 

소설은 이렇게 맺는다.

 

아인슈타인은 원고를, 시간에 대한 그의 이론을 비서에게 준다. 여덟 시 6분이다. 그는 자기 책상으로 다가가서 서류 더미를 흘끔 보고는 책장으로 걸어가서 공책을 한 권 꺼낸다. ... (중략) ... 아인슈타인은 책상으로 돌아와 한동안 앉아 있다가 다시 창가로 돌아간다. 그는 텅 빈 느낌이다. 특허를 살펴본다거나, 베소와 이야기를 나눈다거나, 물리학 생각을 하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다. 그는 텅 빈 느낌이고 그래서 작디작은 까만 점과 알프스를 무심하게 바라본다.”

 

그가 그려낸 세상이 시간은 그 시각부터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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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양 창비세계문학 44
다자이 오사무 지음, 신현선 옮김 / 창비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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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이 오사무의 사양(斜陽)의 창비판은 <사양> 외에도 9편의 단편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거의 모두가 여성의 목소리로 쓰인 소설들이다. 남성 작가임에도 여성의 목소리로 소설을 쓴 다자이 오사무. 그럼에도 자기고백적 성격이 짙은 소설들이다. 어떤 이유가 있었을까?

 

다자이 오사무의 대표작 중 <인간 실격>보다 먼저 <사양>을 읽겠다고 마음먹은 까닭은 별것 없다. 먼저 집혔을 뿐. 혹은 <인간 실격>퇴폐와 파멸을 왠지 모르게 일단을 꺼리는 마음이 있었을까?

 

<사양>을 읽기 위해서 이 책을 펴 들었으니, 일단은 <사양>이라는 작품에 대해 감상을 써본다.

 

사양(斜陽)’은 저녁 무렵의 기울어지는 해를 의미한다. 시대의 변화와 그에 따른 쇠퇴를 의미하는 것이리라. 다른 작품들도 거의 그렇지만, 여기서 시대의 변화란 일본의 패망이다. 일본의 패망은 여러 사회적 변화를 가져왔겠지만, 다자이 오사무에게 결정적이었던 것 중 하나로 여겨진 것은 아마도 귀족의 몰락이었다.

 

가즈코(창비판에서는 카즈꼬라고 쓰지만, 아무래도 여전히 창비의 외래어 맞춤법은 어색하다)는 귀족 집안의 맏딸이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마지막 귀족 부인인 어머니와 함께 산다. 그녀는 이혼을 했고, 아이도 없다. 동생 나오지는 전쟁에 징집되어 남양 군도로 갔고, 생사를 모른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집안의 가세는 기울었고, 집도 팔고 작은 집으로 이사를 갈 수밖에 없었다. 생계를 이을 방법도 막막하다.

 

어머니는 귀족의 품위를 지킨다. 전쟁에서 겨우 살아 돌아온 동생 나오지는 자신이 귀족의 후손임을 부인하기 위해 애를 쓴다. 스스로 파멸의 길로 들어서고, 결국은 어머니의 죽음 이후 자살하고 만다(다자이 오사무의 자살과도 겹쳐진다).

 

그러나 가즈코는 다르다. 그녀는 살아남기로 작정한다. 방탕한 작가 우에하라와의 잠깐의 인연을 사랑으로 치장하고, 편지를 하다 결국은 찾아갔고, 또 결국은 하룻밤의 잠자리로 아이를 갖는다. 그리고 그 아이를 낳기로 결심한다. 말하자면 전통적 가치에 대한 전복인 셈이다. 그녀는 사랑과 혁명을 이야기하고, 또한 삶의 전투를 개시하며 이겼다고 선언한다. 지금 생각하면 몰락 귀족 집안의 여인이 불륜의 관계에서 아이를 낳는 것이 어떻게 거부와 저향, 그리고 혁명이라고 여길 수 있는지 의아하지만,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비추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여겨진다. 가츠코는 그렇게 사양을 거부하고, 새로운 아침을 맞이하며 미래를 자신의 아이에게 걸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사양>이라는 작품은 꽤나 희망적인 메시지를 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전후의 피폐한 일본이라는 분위기가 드러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어떻게든 희망을 찾아보려는 작가의 안간힘이 느껴진다고 할까(그러나 결국은 그 안간힘이 소용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만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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