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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 38선 충돌과 전쟁의 형성
정병준 지음 / 돌베개 / 2006년 6월
평점 :
1950년 6월 25일 한반도에서 남한과 북한 사이에 전쟁이 일어난 사실에 대해서는 아무도 의문이 없다. "북한이 막강한 화력과 잘 훈련·편제된 병력을 갖고 전면적으로 38선 전역을 돌파·남진했다는 점," "그리고 이 같은 전면공격이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조직되었다는 점도 확실했다." 그러나 누가 먼저 38선을 넘어 공격을 개시하였는냐에 대하여는 전쟁이 시작한 직후부터 논란이 점화되었다. 북한은 전쟁 발발 사흘 만인 1950년 6월 28일부터 남한이 6월 25일 새벽 전면적인 북침을 감행하였고, 북한은 이에 대해 반격에 나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북한은 북침의 증거로 서울을 점령한 후 경무대와 육군본부를 뒤져 노획한 문서들을 제시했다. 문서들에는 이승만을 비롯한 한국 정부의 고위 관계자들의 북침 의지가 적나라하게 담겨 있었다.
남한과 미국은 북한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 즉각 반발했다. 남한은 북한이 6월 25일 새벽에 38선을 넘어 전면적으로 기습 남침해 온 것이라고 주장했다. 북한 측이 제시한 문서들에 대해서는 위조된 것이라고 반박했다. 이번에는 미국이 전쟁 과정에서 노획한 북한 측 문서들이 남침의 증거로 제시되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북한이 그 문서들은 가짜라고 반박했다.
개전 초기부터 진행된 논란은 이후에도 해결점에 이르지 못했다. 남북한과 미국은 각자 자신의 입장을 담은 공식 전쟁사를 간행했다. 남한의 공식 한국전쟁사는 한국전쟁을 '불의의 기습남침'이라고 규정했다. 북한은 한국전쟁이 남한의 북침에 따른 '도발받은 정의의 반공격전'이라고 기술했다. 미국은, 북한이 기습적으로 남침하였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한국전쟁은 이러한 북한의 공격을 예측하고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한, '정보의 실패'라고 보았다.
그 후 "한국전쟁에 대한 남북·미소의 입장이 대립하는 와중에서 국제학계에서는 한국전쟁에 대한 다양한 가설과 견해를 도출해냈다." 한국전쟁을 북한의 기습남침이라고 보는 전통주의적 입장과, 남한 및 미국 측에 개전의 책임이 있다고 보는 수정주의적 입장이 대립각을 세웠다. 수정주의적 입장은 1952년 스톤(I. F. Stone)이 주장한, 미국과 남한이 공모하여 북한의 남침을 유도하였다는 이른바 '남침유도설'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수정주의적 견해들 가운데 굽타(Kupta)와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 등이 주장한 이른바 '해주공격설'이 특히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해주공격설'은 옹진반도에 주둔하던 남한의 군대가 6월 25일 새벽 38선을 넘어 해주를 선제 공격함으로써 남한이 북한의 공격을 앞당겼고, 이를 통해 남한은 미국의 전면적인 개입을 이끌어 냈다는 내용이다.
한국전쟁사에 대한 연구 가운데 브루스 커밍스가 내 놓은 연구의 영향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이는 다른 많은 연구자들과 달리 "커밍스는 오랜 문서관 연구에 기초해 광범위한 자료를 분석·활용"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 때까지 누구도 보지 못했던 미군정기 자료와 북한 노획문서를 검토했다." 그의 연구는 당시(1980년대 초반) "걸음마 단계에 있던 한국현대사 연구가 도저히 오를 수 없는 거대한 성벽이었다." 그때까지 학계에 제시된 많은 견해들은 "객관적인 자료에 의해 검증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기초적인 자료 정리보다는 이론틀과 가정에 집중"한 것이었고, 음모론에 지나치게 의존한 것이었다. 따라서 객관적인 자료에 대한 심도 있는 검토를 기반으로 한 커밍스의 연구는 한층 높은 설득력을 얻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1990년대 중반 이후 한국사회에서는 커밍스의 '수정주의' 사관이 한국현대사 연구를 지배하는 것처럼 묘사하고 비판하는 경향이 생겼났다. (그러나) 커밍스의 저작이 연구 초입에 있던 한국현대사 연구자들에게 큰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제시한 관점과 내용이 한국 학자들의 역사관을 결정했다는 설명은 과한 것이다." 학문 사회 내부에서 "진지하고 객관적인 연구 성과"를 통하여 커밍스에 대한 진정한 비판과 극복을 이루어 내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학문사회 외부에서 일부 언론과 학자들이 서로 주고받은 메아리 효과로 수정주의를 비판하면 할수록 커밍스의 영향력이 증폭하는 기현상이 연출되었다."
역사 연구의 출발점은 객관적인 사료의 확보 및 이에 대한 분석이다. 따라서 "한국전쟁의 주요 행위 주체인 미국, 북한, 소련의 자료가 공개될 때마다 전쟁사 연구는 충격의 파고를 넘어 격렬히 진행되었다." 1970년대 중후반 미국 측의 주요 자료가 공개되면서 한국전쟁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강조하고 미국의 역할을 재조명하는 수정주의가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1990년대 중반 이후에는 구소련의 문서들이 공개되면서 북한과 소련이 한국전쟁의 개전에 일차적인 책임이 있음을 입증하는 자료들이 등장하였다. 그에 따라 이른바 후기수정주의라고 불리는 새로운 연구 경향이 본격화되었다. 기존에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자료인 구소련 문서들을 활용할 수 있게 된 지금, 이들 새 자료를 분석하고 그 결과를 "이전의 한국전쟁 연구가 도달한 지점과 유기적으로 결합"시키는 것이 한국전쟁사 연구가 당면한 과제일 것이다.
이 책은 그 과제를 성실하게 수행한 결과물이다. 저자는 "지금까지 공개된 미국 자료, 소련 자료, 북한 자료(미국이 노획한 북한 문서들을 말한다) 등 한국전쟁의 주요 행위 주체였던 3개국의 자료를 비교·교차·분석하는 것을 주요 방법론으로" 삼는다. 이 책이 이와 같은 광범위한 자료를 검토하고 분석하여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해주공격설·유도설에 관해서 수십 년 묵은 논쟁·논란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고, 둘째는 미·소 양국의 38선 분할과 한반도 점령정책, 이에 영향을 받은 남북한의 적대적 동화 과정, 그리고 1949년 정점을 찍은 남북한 사이의 38선 무력 충돌 양상과 1950년 6월 25일의 개전 상황에 이르기까지, 1945년부터 1950년까지의 한반도 정세를 38선 문제를 중심축으로 삼아 살펴 봄으로써 한국전쟁이 '형성'된 과정을 보여 주는 것이다.
저자가 사용하는 전쟁의 '형성'이라는 용어는, "전쟁은 특정 시점에서 특정 세력에 의해 돌출적으로 창조·결정된 산물이 아니라, 미소·남북·좌우의 대립과 길항 과정에서 형성된 결과물"이라는 점을 염두에 둔 것이다. "전쟁은 해방 이후 한국 사회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미소라는 세계 패권국가의 대립, 남북한 간의 지역적 분립, 좌우익 간의 이념적 대결 등이 응축되어 폭발한 것이었다." 한국전쟁을 이처럼 '형성'된 것으로 파악하게 되면, 미소 냉전에서부터 시기상으로는 일제시대에 이르기까지 실로 광범위한 요소들이 한국전쟁을 형성하는 데 일조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그 중에서 특히 38선에 주목하면서 특히나 1949년의 대규모 38선 무력 충돌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는데, 바로 이 시기에 남북한과 미국이 추후 한국전쟁을 바라보게 되는 시각이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왜 같은 전쟁을 남한은 '불의의 기습남침', 북한은 '도발받은 정의의 반공격전', 미국은 '정보의 실패'라는 서로 다른 입장에서 바라보게 되었는지(저자는 이를 '전쟁관'이라는 용어로 표현한다)에 대한 해답이 바로 1949년의 38선 충돌에 있다는 것이다.
북침은 없었다. 북한이 증거로 제시한 문서들은, 당시 남한과 미국이 주장한 것처럼 위조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문서들은 1949년 당시 남한 수뇌부들이 전쟁의지로 가득차 있었다는 사실(이 사실은 한국전쟁이 북침에 의해 개시되었는가 하는 문제와는 다른 차원에서 나름의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남한 당국 또한 무력 통일을 진정으로 원하고 있었다는 점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남침에 의해 한국전쟁이 개시된 것은 틀림없지만, 그렇다고 남한의 대한민국 정부가 평화적인 방법에 의한 통일을 추구하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실제로 1949년 남한은 38선에서 대규모의 무력 충돌을 먼저 유발한 적도 있었다.)을 보여 줄 뿐이지, 1950년 6월 25일 남한이 북한을 침공하였다는 사실을 증명하지는 못한다. "나아가 1950년 6월의 현장에서 이승만이 공격을 명령하거나 지시한 증거는 단 하나도 노획되지 않았다."
반면, 북한이 1950년 6월 25일에 내린 공격명령과 작전명령은 분명히 존재한다. 미국이 전쟁 당시 노획한 이들 문서를 공개하자 북한은 이들이 위조품이라고 맞섰지만, 공개된 구 소련 자료들과 비교해 볼 때 이들 문서 또한 진품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구 소련의 문서들은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남한 공격을 건의하여 승인을 받는 과정, 그에 따라 소련이 북한에 무기를 공급하고 소련의 군사고문단이 공격 작전계획을 작성하여 제공하는 과정 등을 드러내고 있다. 남침을 증명하는 객관적인 자료는 명백하다.
해주공격설 또한 사실과 다르다. 분명 6월 26일 남한의 언론은 옹진 반도에 주둔하던 국군 부대가 해주를 점령하였다고 대서특필했고, 이는 미군에도 보고되었다. 이에 대한 이제까지 남한의 공식적인 입장은 이 보도는 지휘관의 말이 와전되어 발생한 오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간편한' 해명만으로 의혹이 가라앉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 때문에 지금까지 해주공격설은 한국전쟁사 연구에서 끊임없이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해주공격설이 제출된 1970년대부터 현재까지 무려 30여년이 지났지만 한국의 연구는 오보설에서 단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인 탓이 크다.
그러나 해주공격설은 오보나 와전의 결과가 아니었다. 현재 밝혀진 자료에 따르면 당시 한국군에게는 유사시를 대비해 작성해 둔 방어계획이 존재했다. 그리고 그 방어계획은, 옹진반도에 있는 17연대는 북한군의 침공이 있을 경우 육지로 역공하여 해주를 거쳐서 서울로 퇴각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옹진반도는 38선에 의하여 고립되어 있어 바다를 이용한 퇴각 외에는 38선 이북으로 역공하여 우회해서 퇴각하는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1950년 6월 25일 당시 육군본부는 이 방어계획에 따라 실제로 17연대에게 해주 공격 명령을 내렸을 가능성이 높다. 즉, "6월 25일 일느 새벽의 선제공격이 아니라, 북한의 대규모 공격이 있은 후인 6월 25일 오전에 내려진 방어 계획의 일환"으로 해주 공격 명령이 내려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전황상 17연대는 해주로 반격을 하기는커녕 바다로 철수조차 어려웠다. 따라서 실제로 해주 공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때마침 17연대의 병력 일부가 본부와 통신이 두절되었고, 본부에서는 그 병력이 명령대로 해주로 진공하였을 것이라는 낙관과 희망 속에서 잘못된 보고를 하고 말았던 것이다.
저자는 남침유도와 해주공격의 증거로 제시된 자료들의 신빙성을 검토함과 동시에 반대증거를 제시하면서 남침유도설과 해주공격설을 반박해 나간다. 나는 한국전쟁사 전문가가 아니다. 따라서 그가 자료를 분석한 내용이 다른 사료에 비추어 얼마나 타당한 것인지 판단할 능력이 없다. 그러나 적어도 평범한 일반 독자의 입장에서 볼 때, 저자의 논증은 자료와 이성에 근거를 둔 것으로서 설득력이 있다.
38선은 본래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해 미국과 소련이 합의한 경계선에 불과했다. 그러나 미국과 소련은 한국인들의 자치권을 인정하는 대신 군정을 실시하는 쪽으로 한반도 정책을 펴 나갔고, 여기에 미국과 소련 사이의 반목과 대립이 더해지자 38선은 본래의 국제법적 효력과 범위를 넘어서서 남북을 분단시키는 사실상의 국경선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런 상태에서 미국과 소련이 38선과 그들의 38선 정책이 남긴 유산을 고스란히 둔 채 철수해 버리자, 38선상에서는 남북한의 군사적 충돌이 격화되었다.
"38선을 일종의 국경선으로 고착화하고 사소한 월경이나 침범조차 용납하지 않았던 것은 미소 양군이었다. 충돌의 기본적 골격과 원인은 이들이 제공한 것이다. 그러나 미소 양군은 38선에서 철수했고, 나아가 남북한에서 철수했다. 이들은 철수하면서 남북한에 각각 10만을 헤아리는 군대와 경찰을 조직했고, 막대한 무기와 군수품을 남겨놓았다." 그리고 미소의 갈등은 곧 남과 북, 좌와 우의 갈등을 심화시켰다. 이런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남북한은 서로에 대한 적대심과 증오심을 키워 갔고, 이는 38선에서의 무력 충돌로 폭발했던 것이다.
38선이 생겨난 이래로 남북한 간의 무력 충돌은 심심치 않게 발생했지만, 그 규모 면에서 1949년의 충돌은 예전과는 달랐다. 남북한은 연대급 이상의 병력과 중화기를 동원해서 서로를 공격했다. 1949년에는 특히 남한이 적극적인 공세를 폈다. 이처럼 1949년에 남한이 주도한, 대규모 38선 무력충돌이 훗날 남한의 '불의의 기습공격', 북한의 '도발받은 정의의 반공격전', 미국의 '정보의 실패'라는 한국전쟁관을 낳는 직접적인 배경이 되었다.
무력에 의한 통일을 마음먹고 있던 김일성은 "1949년의 상황, 즉 남한의 표면적인 공격 태도와 '북침' 위협, 이에 대비되는 북한의 방어·수세적 입장이 전쟁의 진실인 것처럼 꾸몄다." 김일성은 남한의 무력 침공 위협을 들어 소련에 무기 공급을 요청했고, 선제공격의 필요성을 스탈린에게 납득시키려 했다. 한편 스탈린은 북한의 무력 침공을 승인했지만, 이를 남한의 공격에 대한 반격전으로 포장함으로써 국제사회의 비난을 피하고 미국의 개입을 저지하고 싶어했다. 1949년 남한이 보인 공세적인 태도는 북한에게 남침을 반격전으로 포장할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해 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북한은 개전 직후부터 서둘러 자신들의 공격은 남한의 북침에 대한 반격이었다고 국제사회에 선포하면서 한국전쟁을 '도발받은 정의의 반공격전'으로 포장하였던 것이다.
"한편 한국에선느 1950년 6월 25일 북한이 가한 '진정한 불의의 기습공격'만이 기억되었고, 1949년 남한측의 공세와 공격적 편성·방어 부재는 기억되지 않았다. 즉 한국군이 '공격 의지를 가진 방어형 군대'였다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았다. 한국군의 초기 붕괴는 북한의 병력·화력 우세 때문이었지만, 그 효과를 배가시킨 것은 '진정한 불의'의 공격을 가능하게 한, (1949년부터 1950년까지의) 한국군의 방어 부재 및 공격형 의도 및 편성이었다."
미국의 경우, 1949년 당시 남한이 보인 공격적인 태도를 보고 남한이 북한을 먼저 공격해서 한반도에 전쟁이 발발할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남한에게 제공한 중화기를 회수해 가기까지 할 정도였다. 여기에 더해서, 미국은 북한을 소련의 괴뢰국가로만 파악하고 있었다. 소련의 직접적 지시 없이는 결코 북한이 독자적으로 남침을 실행할 의지가 없으며, 소련은 미국과의 제3차 세계대전을 바라지 않기 때문에 북한에게 남침을 지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러한 두 가지 정세판단이 겹친 결과, 미국은 1950년 상반기 북한의 임박한 남침을 가리키는 수많은 징후를 포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북한이 남한의 공세에 대비해서 무장을 강화하는 것일 뿐이라고 상황을 오판하고 말았다. 그렇기 때문에 북한의 기습공격이 성공했다. 미국의 입장에서 한국전쟁은 명백한 '정보의 실패'였다.
이 책은 7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을 자랑한다. 그 덕에 사료에 대한 분석은 꼼꼼하고, 미시적인 사실관계까지도 분석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전문적인 역사 연구자가 아닌 일반 독자의 입장에서는 세세한 사실관계까지 모두 주의를 기울이며 읽기는 어렵다. 한국전쟁에 대해 사전 지식이 많지 않은 나로서는 한국전쟁사와 관련한 여러 견해와 주요 논란거리를 짚으며 한국전쟁사의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첫 번째 장과, 그 논란거리에 대한 나름의 해답을 제시하는 마지막 장이 가장 유익했다.
책장을 넘기는 내내 자료에 근거해서 사실을 추론해 나가는, 성실한 역사 연구의 모습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저자가 쓴 서문에서는 역사 연구에 대한 저자의 열정이 고스란히 묻어 나온다. 학문에 뜻을 둔 사람이라면 이 책이 전하는 내용뿐만 아니라 이 책의 글자들 뒤에 숨어 있는, 단단하고 꽉 찬 실사구시의 학문적 태도에서도 배울 점이 많다. 책을 끝까지 읽은 뒤 정리를 위해 앞부분을 다시 읽을 때, 서문의 마지막 글귀가 빛을 뿜어낸 것도 바로 그 때문이리라.
"나는 언제나 이 말을 기억해왔다. 모교의 휘장에 써 있어 늘 가슴에 울리던 그 말, '진리는 나의 빛'(VERITAS LUX ME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