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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또 내일 또 내일
개브리얼 제빈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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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이 유일한 취미인 반려인에게서 언젠가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자신이 즐겨하는 모든 게임에는 탄탄한 서사와 단단한 맥락이 담겨있다고. 스토리텔링에 감탄하고 감격할 수 없는 게임은 자신의 얼마 되지 않는 자유 시간이 아까워서라도 절대 하지 않는다고. 솔직히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땐 (반려인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래봤자 게임이 게임이지’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픽셀로 표현된 파도에 한참을 허우적대다 겨우 뭍으로 나왔을 때, 나는 반려인에게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안하게도 이제서야 당신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어떤 게임은 문학의 역할을 수행할 수도 있음을 나 또한 이제는 알게 되었다고. 게임과 게임을 만드는 사람의 서사를 담은 어떤 이야기는 내가 몰랐던 당신을, 내가 모르는 누군가를 이해할 수 있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그러니까 저 먼 대륙에서 백만 부 이상 팔린 이 소설이 영화로 제작되어 나올 언젠가에 우리, 울고 웃으며 함께 보자고. (그 전에 이 책을 같이 보면 더 좋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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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책장 앞에 서서 사 놓고 아직 읽지 않은 책이 몇 권인지 천천히 세어 보았다. (참고: 이것은 엄청난 용기를 내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스물한 권. 나는 스물한 권의 읽어야 할 책을 남겨두고서, 643쪽에 달하는 이 소설을 연달아 두 번 읽었다. (참고2: 올 해 연달아 두 번 읽은 작품이 딱 두 권있는데, 하나는 이 책이요, 다른 하나는 최은영 작가님의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였다.)
쉽게 놓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쉽게 종료할 수 없는 게임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내 앞의 다른 책으로, 눈 앞의 다른 할 일로 넘어가야 할 때. 박서련 작가님의 추천사를 옮겨 적으며, 더 오래 플레이하고픈 마음을 겨우 접어본다.
“영원히 이 안에 머무를 수 없어서 슬프지만, 다음 게임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아서 벅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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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 개브리얼 제빈 작가의 유명한 전작 ⟪섬에 있는 서점⟫의 리뷰를 올릴 때도 작품의 줄거리는 적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이 글에서도 ⟪내일 또 내일 또 내일⟫에 대한 줄거리는 언급하지 않으려고 한다. 스포일러를 방지하려는 게 아니다.(물론 “중요한 건 사건이 아니라 그 사건까지 가닿는 과정(P.537)”이라고 말한 주인공 샘의 말에도 전적으로 동감한다만) 이십년이 넘는 시간을 담아낸 방대한 서사 안에서, 나처럼 당신도 감격과 충격의 파도를 예고 없이 흠뻑 맞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사랑과 상실이 공존하고 성장과 파괴를 오고 갔던 당신의 삶을 이 소설 안에서 마음껏 겹쳐 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열 개의 챕터를 이루고 채운 그 어떤 묘사도, 그 어떤 설정도, 그 어떤 전개도 책장 밖 우리의 과거와 현재로부터 괴리되지 않았다는 것. 더불어 현실을 견디고 버티고 고치고 나아가게 할 유토피아적인 방향성 또한 놓아버리지 않았다는 것. 나아가 이 모든 것을 작품 속의 ‘게임’에서도 완벽하게 구현해 냈다는 것. 한 편의 소설로서 문학의 당위성을 성실히 실천함과 동시에, 소설 안에서 창조한 여러 게임에서도 문학의 가능성을 충실히 실현했다는 것. 이 모든 것에 한참을 감탄할 수밖에 없는 작품이다.
낙담과 비관이 점철된 현실이지만 그럼에도 낙관과 다정의 마음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이들에게 이 소설이 벅차게 안도하는 기쁨으로 다가갈 거라 생각해 본다. 나아가 게임 안팎에서 그리고 소설 안팎에서 “들소들의 통행이 보장되는 이토록 안전한 세상(p.586)”을 꿈꿀 수 있어 다행이라 생각하는 이가 나뿐이지만은 않을 거라고, 감히 자신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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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개발자의 서사로 인간과 인생을 기가 막히게 풀고 엮은 ‘로맨틱한’ 작품을 다시 또 만날 수 있을까? 이야기의 중심과 주변 모두 게임뿐인데, 그게 완전 말도 안 되는 비현실적인 설정이 아닐 수 있다니. 경탄의 수치가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다. 그래서 게임의 ㄱ자도 모르는 내가 이 책을 연달아 두 번 읽었나 보다. 순간순간마다 내 삶으로 끌어와 안고 기대고 싶은 문장이 너무 많아서. 그러니까, 말도 안 나올 만큼 너무 좋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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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에밀리 디킨슨의 시 한 편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도록 촘촘히 조직된 이야기를 만나게 되어 기뻤던 9월의 첫 주였다.
(사실, 이 한 문장만 적어놓아도 이 책에 대한 소감으로 충분했을 거로 생각한다만… 근데 이렇게 주절주절 길게 적어놓고선…)

(문학동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