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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 : 코끼리와 코요테 ㅣ 인생그림책 28
나현정 지음 / 길벗어린이 / 2023년 11월
평점 :
몸의 쇠락으로 죽음의 순간을 목전에 둔 코끼리. 체리 나무 밑에 앉아 얕은 숨을 겨우 내쉬고 있는 코끼리에게 민첩하고 가벼운 발걸음의 코요테가 다가온다. 한 걸음 도망칠 기운 조차 없는 코끼리에게 코요테는 반가울 리 없는 존재다.
만약 당신의 마음이 코끼리의 낡고 늙은 몸에 기운다면, 천연덕스러워 보이는 코요테의 표정과 자세가 얄미워 보일지도 모른다. 내게서 뭔가를 취하거나 나를 이용할 목적만을 갖고서 내게 다가왔고 나와 관계를 맺었던 그 누군가가 떠오를지도 모른다. 코끼리의 ‘적’으로만 코요테를 바라보며 경계하는 일, 그 자연스러움에 익숙한 서글픔을 느낄지도 모른다.
서사의 방향을 트는 순간은 이야기를 지켜보는 독자의 익숙한 관점을 바꾸는 순간과 동일하다. 코끼리와 코요테가 나누는 대화를 잠잠히 보고 들으며, 이야기 밖에 선 독자는 코요테를 그저 코끼리의 곧 죽을 몸만을 기다리는 적으로만 바라보지 않게 된다. 다 죽어가는 코끼리에게도 여전히 ‘가능’의 영역에 남아있는 ‘나다운’ 일이 남아있다고 말하는 코요테. 그를 향해 자연스럽게 품었던 경계의 마음을 조금씩 내려놓으며 어느새 이야기 곁에 선 당신은 코끼리와 함께 하나씩 톺아보게 될 것이다. 코끼리가 누볐던 생의 찬란한 장면을. 코끼리가 누렸던 생의 아름다운 변화를. 그리고 이 모두를 가능하게 했던 앞선 누군가의 필연적인 죽음을.
전작 ⟪너의 정원⟫, ⟪봄의 초대⟫, ⟪하루살이가 만난 내일⟫을 통해 경험했던 찬탄의 순간을 여전히 아름다운 그림체와 그에 깃든 ‘순환’이라는 새로운 주제 안에서 다시금 만날 수 있어 반가웠던 나현정 작가님의 신작, ⟪비밀 - 코끼리와 코요테⟫. 몽환적인 그림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담담한 문장을 한 줄씩 읽어 내려가며 생각해 본다. 앞서 살다 간 모든 생명에 의해 유지되어 왔던 삶과 죽음의 ‘비밀’을. 나아가 그 비밀의 위에서, 그 비밀에 의해서 뿌리를 내리고 꽃잎을 틔운 새 생명을 바라보며 상상해 본다. ‘적’으로 둘 수밖에 없는 (혹은 ‘적’으로만 두고 싶은) 이들 ‘덕’에 가능했던 (혹은 가능할지도 모를) 삶의 찬란한 장면을.
어쩌면 삶이 비극이지만은 않도록 우리를 살려줄 지 모를 아름다운 ‘비밀’을, 오래도록 쓰다듬었다. 코요테의 연갈색 털이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는 것만 같은 늦가을의 오후. 책 위로 한 잎씩 떨어지는 가을이 내게 속삭였다. 끝의 슬픔과 시작의 기쁨이 한데 엮여있는 이 순간, 이 장소, 이 계절에 지금 네가 앉아있다고.
+
나는 어떤 ‘똥’을 싸며 살다 갈 것인가. 내 몸에서 분비되는 (또는 분비될 수 밖에 없는) 무엇들에 대한 고민의 공간 안에, 이 그림책을 살포시 내려놓는다. 나로 인해 이 세상에 남는 것이 고이 썩지 못 할 쓰레기만은 아니어야 할텐데, 라는 생각을 놓지말기.
🔖⟪두더지 잡기⟫, 마크 헤이머, 카라칼출판사, p.84 /
인간과 관련된 것들 가운데 유일하게 영구적인 것은 인간의 쓰레기뿐이다. 자연의 존재들은 썩는다. 모든 자연의 존재들이 거치는 달콤쌉쌀한 존재의 상태, 그들이 예전의 모습을 관두고 무언가 새로운 모습이 되기 시작하는 단계가 있다.

* 길벗어린이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