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을 이긴 사람들 - 하워드 진 새로운 역사에세이
하워드 진 지음, 문강형준 옮김 / 난장 / 2008년 8월
평점 :
절판


처음에 제목을 봤을 땐 가슴 두근거리는 참 멋진 제목이라 생각했다. ‘권력’이라는 단어는 실체가 음흉하게 가려져 있는 거대한 회색 구름-제도, 정부, 법 등-을 연상시켰고, ‘사람들’은 피와 살과 감정을 가진 구체적인 실존으로서의 인간으로 다가왔다. 그러한 거대 권력을 이긴 사람들의 이야기라니, 얼마나 희망적인가. 제목 아래 인용구 역시 그 희망의 연속선상에 있다. “역사가 창조적이려면, 역사가 과거를 부정하지 않고서 가능한 미래를 예견하려면, 역사는 민중들이 저항하고 함께 모이고, 그래서 때로 승리했던 과거의 숨은 사건들을, 그것이 아무리 작고 보잘 것 없는 순간이었더라도, 드러냄으로써 새로운 가능성들을 강조해야만 한다.”

 


  하지만 이 책을 한 번 읽고 났을 때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들은, ‘무지’, ‘나약함’ 같은 비관적이고 부정적인 것들이었다. 그것들은 책을 향한 것이 아니라, ‘나’를 향한 감정들이었다. 이 책은 희망으로 가득차 있는데, 왜 그런 비관적인 생각이 들었냐는 말에 스스로도 당황했다. 왜 이러지? 그 때는 아마 심신이 피곤한 상태라서 그랬나 보다 생각했다.

 

  그래서, 몸과 맘을 좀 쉬어준 후, 다시 책을 집어들었다. 연필을 들고 다시 제대로 읽어보자 하며, 다른 일을 일단 제쳐놓고 한나절을 꼬박 읽었다. 두 번째 읽고 나서는, 책의 내용에 대해서도 더 명료하게 이해했고, 희망의 메시지들을 분명 더 많이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나의 감정적인 반응이다.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니 여전히 마음이 무겁다. 표정은 울 것처럼 침울하고 가슴에는 한기가 스민다. 나는 내 내부의 이 이상한 반응의 원인을 생각해 봐야겠다고 느낀다. 책의 내용에 대해서도 정리하겠지만, 이 책을 읽고 내가 이렇게 힘들어진 이유가 대체 무엇인지 말이다.


 

  옮긴이의 설명에 따르면, 이 책은 미국의 사회운동가이자 역사학자인 하워드 진이 2007년 발간한 A Power Governments Cannot Suppress 를 완역한 것인데, 진이 최근 잡지에 기고한 칼럼, 다른 작가들이 쓴 책에 부친 서문이나 후기, 그리고 새로 쓴 에세이들을 엮은 에세이집이다. 소재의 범위도 미국 건국 초기의 여러 역사적 사건들, 독립선언서, 남북전쟁, 제 1․2차 세계대전, 베트남 전쟁, 1960년대 민권운동, 2000년 대통령 선거, 9․11 사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침공, 반세계화운동 등에 이르기까지 매우 넓다.

진은 한국어 서문에서 책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이 책은 미국이 저지른 폭력적이고 정의롭지 않은 행동을 다룰 뿐 아니라 그런 행태를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의 운동을 다루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책은 어두운 시대에 희망을 제시하려는 시도입니다. 그 희망이란 안에서는 국부(國富)를 평범한 사람들의 복지를 위해 사용하고 밖으로는 세계 다른 나라의 절망적인 사람들을 도움으로써, 미국인들이 언젠가는 세계와 평화롭게 지내는 나라를 만들어낼 수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첫 두 문장에 나와 있듯이, 이 책은 크게 세 가지의 내용으로 나누어질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이 세 가지는 한 고리로 연결되는 것들이다.)

 

  첫째, 미국이 저지른 폭력적이고 정의롭지 않은 행동들의 폭로(알려지지 않았던 진실 알리기)이다. 책에 소개된 사건의 양으로만 보면 이 첫째 사례들의 양이 더 많은 듯하다. 미국의 역사라 이 부분에 대해 잘 모르는 내겐 아주 굵직한 사건들 외에는 낯선 이름들이 많다. 옮긴이가 많은 부분 보충 설명을 덧붙였음에도 여전히 생소하다. 그냥 어렴풋이 알고 있던, (이런 소식들을 접하게 되는 언론에서도 늘 어렴풋이 보도했듯이) 사건들에 미국이 어떻게 개입했었는지 그 전말이 소상히 드러난다.

 

  둘째, 민중들의 저항과 불복종의 역사, 평화· 정의· 인권 같은 보편적 대의를 거스른 정부에 맞섰던, 역시 잘 알려지지 않았던 수많은 사례들 드러낸다. 마크 트웨인이 반제국주의연맹의 부의장이었다는 것,「월든」의 저자로만 알고 있던 소로가 시민불복종운동을 주도했었다는 것, 유진 뎁스라는 사람에 대해서도 새로 알게 되었다. (아니, 알고는 있었으나 관심을 두지 않았던 부분이었다.) 여기 등장하는 사례들이 모두 반짝이는 승리의 사례들인 것은 아니다. 로자 파크스나 1954년 학교에서의 인종분리에 대한 브라운 판결 같은 잘 알려지고 기념되는 사례도 있지만, 알려지지 않았던 시도들, 투쟁들, 사코와 반제티(34장)의 경우처럼 사후 50년이 지나서야 재평가되는(제도권에서) 사건들도 있다. 이를 살펴보는 것은, 다시 인용하지만 “민중들이 저항하고 함께 모이고, 그래서 때로(언제나가 아니다) 승리했던 과거의 사건들을, 그것이 아무리 작고 보잘 것 없는 순간이었더라도, 드러냄으로써 새로운 가능성들을 강조해야만 한다.” 에서처럼, “드러내고” 새로운 가능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진은 ‘새로운 희망을 제시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했다. 그렇다면 무엇에 대한 희망인가? ’희망‘은 ’앞일에 대해 어떤 기대를 가지고 바람‘을 말한다. 현실이 부조리하거나 불만족스러울 때, 절망스러울 때 우리는 희망을 품는다. 모든 것이 만족스러운 상태에서 희망을 말하지는 않는다. 즉, 현실에 대한 문제를 인식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이 책의 희망의 메시지를 공감하기 위해서는 그 문제 인식부터 공유가 되어 있어야 한다. 책장을 덮고 나서 느꼈던 불편함의 한 이유도 여기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세상이 부조리로 가득 차 있다는 생각은 늘 있었지만, 이런 구체적인, 수많은 사례를 한꺼번에 접하는 것은 결코 유쾌하지 않다. 특히 전쟁에 관한 부분들이 그랬다. (이는 단지 진보냐, 보수냐의 구분을 넘어서는 것으로,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 - 자유, 평등, 인권, 행복 추구권 등 - 에 비추어 판단해야 한다.) 이것이 현실이었다면 그 오랜 시간 사람들이 무감각했던 것은 무엇 때문인가? 아마도 정부가 언론을 통해 국가주의, 애국, 민족 같은 말로 교묘하게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여론을 선동한 탓이 크리라.

 

  그래서 진은 정부나 국가에 의해 교묘하게 이용되고 있는 용어나 개념에 대해 다른 시각으로 바라봐야 한다고 말한다. (셋째 부분이다.) 그가 강조하는 단어들은, 국가, 정부, 계급 같은 것들이다. 계급에 대해서는 한 장을 할애하여 말하고 있다. (5장 금지된 단어, 계급)

 

 ..."오늘날에는 국민들이 계급으로 분리되어 있다는 주장을 아주 가볍게만 해도 분노의 반응이 터져 나온다. 하지만 현실은 계급 없는 사회란 신화에 불과하다는 것을 반복적으로 드러낸다." (p. 52)

 

이것은 우리나라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말이지 않을까. 이 ‘계급’이란 단어에 대한 금기 말이다. 나부터도 이 단어를 들었을 때 처음 드는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이 단어가 함께 연상시키는 다른 이미지들 때문에. 공산주의, 빨갱이, 투쟁, 그리고 (그야말로) 대강 알고 있는 우리나라 민주화의 역사, 고문 등. 상당히 선동적이고 부정적인 이미지들이다. 이상한 일이다. 나는 우리나라 민주화 운동이나 근․현대사에 관심이 되려 없는 쪽에 가까웠는데, 자연스럽게 저런 이미지를 떠올린 것은, 아마 저런 이미지가 우리나라 사람들의 집단적 무의식이 어서 그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렇다면 ‘계층’이란 말은 상대적으로 더 널리 쓰이는 것 같은데 ‘계층’과 '계급‘의 차이는 무엇일까? 읽으면서 들었던 의문 중 하나이다. (나중에 다른 책에서 보니, 'class'라는 용어를 우리나라 사회 분위기상 '계급'이라는 말로 섣불리 번역해 쓰기가 어려워 '계층'이라는 말로 썼다고도 한다. 용어에 대한 질문 한 가지 더. '인권 운동'과 '민권 운동'은 구별되는 것인지?

  

   ‘16장 누구를 위한 애국주의인가?’ 에서는 정부와 국가를 독립선언서와 트웨인, 엠마 골드만의 말을 통해 구별하고 있다.

 

독립선언서에 따르면 정부는 “생명, 자유, 행복추구”에 대한 모든 이의 동등한 권리와 같은 어떤 목표들을 지키는 일을 하라고 국민들이 세운 인위적 산물이다. 그리고 “어떤 형태의 정부라도 언제든 이 목표를 파괴하게 되면.... 그 정부를 바꾸거나 무너뜨리는 것은 인민들의 권리이다.” (p. 126)

 

여기서도 몇 가지 의문이 들었는데, ‘정부’에 대해서는 파악하기가 상대적으로 더 쉬웠던 반면, 여기서 인용된 여러 말들을 통해서 ‘국가’란 무엇을 말하는지 명확하지가 않았다. 트웨인은 ‘국가’와 ‘정부’를 구별한 반면 엠마 골드만의 인용문에서는 국가에 대한 충성 개념 자체를 비판하는 듯 보였다. 그 인용문에서 ‘국가’와 ‘정부’는 구별되지 않아 보였다. 또 한 가지는, ‘국민’, ‘민중’, ‘인민’, '시민'의 구별에 관한 것이었다. ‘민중’이나 ‘인민’은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을 전제로 한 용어인 데 반해, ‘국민’에서 계급이 연상되지는 않는다. 본문에서는 이 용어가 혼용되어 쓰이고 있는 것 같은데, 원문에도 그렇게 구별이 되어 있었는지, 다르게 구별한 이유가 있는 것인지 궁금하다. 사실, 비슷한 것 같지만 각 용어가 주는 어감은 상당히 다르다. ‘민중’, ‘인민’은 앞에서 말한 ‘계급’, ‘투쟁’과 같은 범주 안에 있는 인상을 주며, 이건 내게 그리 긍정적인 인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왜 그럴까? 단어의 역사적 배경(큰 줄기)에 관계없이 순전히 개인적 경험에 기초한 감정적 반응이다.

 

   나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그런 단어들을 들으면 자연스레 ‘운동권’이라는 말을 떠올린다. 내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은 IMF 사태 이후로 이런 운동권에 대한 관심이 대학생들 사이에서도 크게 사그라들었던 시기였고, 운동권하면 왠지 구시대적이고 낡았다는, 그리고 위험하다는 생각을 막연히 갖고 있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이 책을 통해 그런 단어들에 대한 내 무지에서 비롯된 편견을 다시 한 번 확인하면서 마음이 불편해졌던 것 같다. 이것은 내 개인적인 경험과 관련이 있기도 한데, ‘투쟁’이라는 단어가 불러일으킨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 때문이다. 전국 교대에서 정부의 어떤 정책에 대해 반대 시위를 한 적이 있었는데 나는 그 시위에 참가하지 않았고 그로 인해 과에서 엄청난 지탄을 받았다. 그 정책에 대해 달리 어떤 ‘나의 신념’이 있어서가 아니라 어떤 ‘믿음’ 때문이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정말 바보같을 정도로 순진했던 시절이었다.  내가 그 당시 옳다고 여겼던 그 믿음과, 그 믿음을 공유했던 사람들이 그러라고 했기 때문에 따랐던 것이지, '왜 그런가?", "과연 그러한가?" 하는 그에 대한 스스로의 치열한 고민은 부족했다. 그저 이 껄끄럽고 불편한 상황이 어서 지나가기만을 바라는 소극적이고 회피하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소위 ‘투쟁’을 한다는 사람들도, 평소엔 교육 문제에 별 관심도 없어 보이던 사람이 그럴 때만 앞에 나가 주먹 불끈 쥐고 ‘투쟁’을 외치는 게 일관성도 없어 보이고 위선적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니 그 행동이 내겐 별 설득력이 없었다. 꼭 저렇게 전투적으로 해야 하나?라는 회의를 들게 한 것도 사실이었다.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과정도 민주적이라기보다는 매우 강압적으로 느껴졌다. (이런 것이 대학생들이 소위 ‘운동’을 외면했던 이유이기도 했을 듯) 어쨌든 이 때 사건은 소심하고 맘 약하고 순진했던 내게는 큰 충격이었고, 거기서 비롯된 의문이 점점 커져 결국 조금씩 내 주변에 대해, 세상에 대해 의심과 회의를 품게 만들었다. 지금도, 그 시절의 나를 아는 사람을 만나면 난 얼굴이 화끈거린다. 그 때의 나는 제발 잊어주었으면! 하고 속으로 바라면서. 과거의 정체성을 부인하는 것이냐 할 수도 있겠지만, 창피한 건 어쩔 수 없다. (이 부분도 뭔가 마음에 걸린다. 그 당시 나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창피할 일도 아닌 것이다. 사람들이 '나의 신념과 양심'을 따른다고 할 때, 온전히 그 사람만의 신념이란 게 있을 수 있을까. 그 신념이 내가 속한 어떤 집단의 신념일 때 나는 그 집단의 일원이나, 그 신념이란 것에 내가 100% 공감 및 동의가 되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럴 때 개인은 무척 괴로워진다. 양심이란 것도 사회적, 문화적 가치에서 자유롭다고 하긴 어려울 텐데. ) 

 

  (다시 책으로 돌아와서) 진은 전쟁뿐만 아니라 “야만적이고 고삐 풀린 자본주의”에 대해서도 경고한다. 책을 읽으며 ‘그럼 뭘 어떻게 해야 하는데?’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는데, 바로 그 질문에 대답한 곳이 있다.

 

“그렇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지구상에서 시급한 도움이 필요한 모든 이들을 보살피기에 충분히 쓸 수 있는 막대한 부가 존재하는데, 이 부는 소수의 개인들에 의해 독점되고 있다. 이들은 수백만 명이 죽고, 수백만 명이 비참하고 지저분한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는 동안에도 사치품과 전쟁에 그 부를 탕진한다. 이것이야말로 세계 모든 곳의 사람들이 이해하고 있는 문제이다. ... 우리에게 가장 치명적인 적들은 해외의 동굴이나 숙소에 숨어 있는 게 아니라, (의도한 것은 아닐지라도, 이윤과 권력을 좇는 욕망이 낳은 ‘부수적 피해’로서) 수백만 명을 죽음과 비참함에 내주는 결정들이 만들어지는 기업 회의실과 정부 사무실에 있을지 모른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p. 227~228) (이 책 위험한 책 맞다.ㅋ)

 

  권력의 부조리와 횡포를 보면서도 그 거대함에 나는 그저 쉽게 압도당하고 마는 작은 존재다. 내가 뭘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기도 전에 나에게 어떤 불이익이 있지 않을까를 먼저 계산하고 있는 속물적인 모습이 솔직한 나의 모습일 것이다. 그 나약함에, 비겁함에 스스로를 자책하면서. 그런 내게, 진은 다시 희망을 이야기한다. 괜찮다고, 거대한 것이 아닌, 아주 작은 것부터 시작하면 된다고 어깨를 다독여준다. 그 부분을 옮겨본다.



 

  “혁명적 변화는 한 차례 격변의 순간(그런 순간들을 경계하라!)을 통해 오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사회를 향해 이리저리 움직여가는 가운데 등장하는 놀라움들의 끊임없는 연속으로 오는 것이다. 변화의 과정에 참여하기 위해 거대하고 영웅적인 행동을 할 필요는 없다. 작은 행동이 수백만의 사람들에 의해서 증식될 때 어떤 정부도 억누를 수 없는 조용한 힘, 세계를 뒤바꿀 수 있는 힘이 된다.

우리가 승리하지 못한다 해도, 다른 좋은 사람들과 함께 어떤 가치있는 일에 참여했다는 사실에서 오는 유쾌함과 성취감은 남는다. 우리에게는 희망이 필요하다. ... 사악한 시대에 희망을 품는 행위가 바보같이 낭만적인 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희망을 품는다는 것은 인간의 역사가 경쟁과 잔혹의 역사일 뿐만 아니라 공감, 희생, 용기, 친절의 역사이기도 하다는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 복잡한 역사 속에서 우리가 선택해 강조하는 바로 그것이 우리의 삶을 결정지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가장 나쁜 것만을 본다면, 그것은 뭔가를 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을 파괴해버릴 것이다. 만약 우리가 사람들이 위대하게 행동했던 시대와 장소들을 기억한다면 (그리고 그런 예는 너무나 많다), 그것은 우리가 행동할 힘을 불어넣을 것이고, 적어도 이 팽이처럼 핑핑 도는 세상을 다른 방향으로 옮길 수 있는 가능성을 높여줄 것이다. 그리고 어떤 사소한 방식으로라도 우리가 진정 행동한다면, 어떤 거대한 유토피아적 미래를 기다릴 필요는 없다. 미래는 현재의 끊임없는 연속이고, 우리를 둘러싼 모든 나쁜 것들을 거부하는 가운데 우리가 마땅히 살아가야 하는 방식이라고 믿는 바처럼 지금을 살아간다면 바로 그 자체가 위대한 승리이다.“ (p. 290~291)

 

  그러다가 옮긴이의 후기를 읽으면서 내 마음은 또 다시 가라앉았다. 한국인에게 갖는 의미를 논하는 곳에서, 우리나라의 역사적 사건들에 관한 내 무지를 또 한 번 발견하기 때문이다. 아, 다시 진의 희망 메시지로 돌아가자.  그리고, 공부하자.

 

하루가 꼬박 갔다. 글을 처음 쓸 때의 울 것 같은 침울함은 이제 사라졌다.


옮긴이의 바람대로, 이 책은 내게 ‘우리의 역사와 현실에 눈을 돌리게 하고 행동하게 만드는 ’위험한‘ 책’이 된 것일까. 행동까지는 더 두고 봐야 알겠지만, 최소한 현실을 이전보다는 더 넓어진 눈으로, 두려움을 한꺼풀 걷어내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서 의미 있는 행동의 변화가 여기저기서 일어나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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