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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지 앞에서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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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영 작가님의 소설을 읽을 때면 언제나 마음의 가장 약하고 부드러운 살을 들킨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했습니다. 타인의 고통을 함부로 재단하지 않고 그 곁을 묵묵히 지켜주는 문장들. 그런 소설을 쓰는 작가님의 마음은 도대체 어떤 모양일지 늘 궁금했는데, 첫 산문집인 <백지 앞에서>는 그 질문에 대한 가장 솔직하고 다정한 답장처럼 다가왔습니다.

​이 책은 화려한 소설가 최은영이 아닌, 하얀 모니터 앞에서 끊임없이 고뇌하고 주저하는 인간 최은영의 고백록입니다. 제목이 주는 서늘함처럼, 작가님은 글이 써지지 않아 도망치고 싶었던 순간들과 자신의 재능을 의심하며 괴로워했던 기억들을 날것 그대로 꺼내놓으십니다. 그동안 읽어왔던 아름다운 소설들이 사실은 이 지독한 백지와의 싸움, 그리고 스스로의 한계를 마주하는 고통 속에서 피어난 결과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특히 작가님의 유년 시절 기억이나 할머니와의 관계, 그리고 외로움에 대해 다룬 글들을 읽을 때는 대표작인 <밝은 밤>이나 <쇼코의 미소>의 흔적들이 겹쳐 보이기도 했습니다. 소설 속 인물들이 가졌던 그 깊은 시선과 온기가 결국 작가님이 살아온 삶의 궤적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는 과정은 무척 흥미롭고도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타인의 아픔을 감각하고 연대하려는 태도는 소설에서나 산문에서나 변함없이 단단했습니다.

​책을 덮으며, 무언가를 쓰고 만들어내는 일뿐만 아니라 저마다의 삶 속에서 자신만의 백지를 마주하고 있을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이 커다란 위로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신의 약점을 숨기지 않고 담담하게 털어놓는 작가님의 용기 덕분에, 역설적으로 저 역시 저의 부끄러운 부분들을 조금 더 다정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글 뒤에 숨겨진 인간적인 면모를 보고 나니, 작가님의 문장들이 이전보다 훨씬 더 가깝고 애틋하게 느껴집니다. 고통 속에서도 끝내 다정함을 잃지 않는 작가님의 시선이 담긴, 앞으로 나올 다음 작품들도 무척이나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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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번 레인 (30만 부 기념 Take your marks 에디션) ㅣ 보름달문고 82
은소홀 지음, 노인경 그림 / 문학동네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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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번 레인>은 수영부 에이스인 강나루가 라이벌 김초희를 만나면서 겪게 되는 고민과 변화를 그린 성장 이야기입니다. 나루는 원래 수영을 잘해 늘 좋은 성적을 거두었지만 초희에게 계속 밀리면서 자신감을 잃고 수영에 대한 마음까지 흔들리게 됩니다. 특히 자신이 항상 서던 4번 레인에서 5번 레인으로 밀려나는 상황을 통해 나루가 느끼는 불안과 초조함이 잘 드러났습니다.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나루가 초희를 이기고 싶다는 마음 때문에 잘못된 행동까지 하게 되는 장면이었습니다. 초희의 수영복을 훔친 것은 분명 잘못된 행동이었지만, 그 일을 숨기면서 괴로워하는 나루의 모습에서는 경쟁에서 뒤처지고 싶지 않은 마음과 죄책감을 함께 느낄 수 있었습니다. 결국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수영복을 돌려주는 모습을 보면서, 이기는 것보다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고 잘못을 바로잡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나루가 주변 사람들과 여러 가지 일을 겪으면서 자신이 왜 수영을 하는지 다시 생각하게 되는 과정도 좋았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1등을 하고 초희를 이기는 것이 가장 중요해 보였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것보다 자신이 정말 좋아하는 것을 계속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제목인 ‘5번 레인’도 단순히 수영장의 한 레인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남보다 뒤처졌다고 느끼는 순간에도 자신의 길을 계속 나아가는 모습을 의미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책을 읽고 저도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결과에만 너무 집착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누구나 항상 1등을 할 수는 없고 때로는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때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부족한 점을 인정하면서 다시 나아가는 것이라고 느꼈습니다. <5번 레인>은 수영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 결국 경쟁과 실패를 경험하면서 자신만의 속도로 성장해 가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준 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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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438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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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작가의 소설을 좋아했던 나에게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는 색다른 몰입을 선사했다. 소설 속에서 서사와 인물의 감정을 세밀하게 묘사해 내던 작가의 문체는, 시라는 정제된 틀 속에서 더욱 투명하고 서늘하게 빛나고 있었다.

시집 전반을 관통하는 가장 강렬한 주제는 언어와 상처였다. 작가는 언어가 침묵을 찢고 나오는 도구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존재의 고통을 모두 담아내지 못하는 불완전한 그릇임을 서늘하게 고백한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슬픔이나 비극 앞에서 언어는 종종 무력해지지만, 한강은 그 텅 빈 공간과 침묵을 조용히 지켜보며 시로 풀어낸다.

특히 어둠과 저녁이라는 시간적·공간적 배경이 인상적이었다. 제목에서 말하는 서랍은 침묵과 기억이 은밀히 저장되는 공간이고, 그 안에 넣어둔 저녁은 하루의 소란함이 가라앉고 스스로의 고독과 마주하는 시간이다. 우리는 누구나 말로 꺼내지 못한 슬픔과 아픔을 마음속 깊은 서랍에 감춰둔 채 살아가곤 한다. 작가는 그 묵혀둔 어둠을 억지로 밝은 빛으로 끄집어내려 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만져주며 곁을 지켜준다.

시집을 읽는 내내 시인의 문장들은 묵직한 조용함으로 다가왔다. 쓸쓸하고 다소 피투성이 같은 상처의 이미지들이 등장하지만, 그것은 결코 자극적이거나 절망적이지 않다. 오히려 고통을 마주하는 시인의 투명하고 진실한 태도 덕분에 이상한 안도감을 느끼게 된다. 내 안에 감춰둔 슬픔 역시 부끄러운 것이 아니며, 이 고독을 통과해야만 타인의 아픔에도 진심으로 공감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는 서둘러 위로를 건네거나 희망을 노래하지 않는다. 대신 깊은 침묵 속에서 우리의 아픔을 가만히 응시해 준다. 조용히 혼자만의 시간을 견디고 있거나, 언어로는 다 담아낼 수 없는 마음의 무게를 느낄 때 꺼내 읽고 싶은 아름답고 다정한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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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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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다른 사람을 쉽게 이해한다는 착각을 하고 살기도 합니다. 가족이라할지라도, 아니 오히려 물리적 거리가 가깝기때문에 내가 잘 알고있다는 착각에 빠지기 싶게 됩니다. 기억의 단편으로 각인된 인상을 오래토록 가지며 나만큼 이 사람을 아는 이는 없어라고 간과하는 일도 비일비재하고... 요새 유행했었던 mbti도 결국 내가 생각하는 나라는 자아에 대한 평가이니 그 사람을 잘 드러낼수밖에 없겠죠.

이처럼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나와, 남이 바라보는 나도 다른 개체이듯이, 언제나 타인이라는 노래제목처럼 우리는 상대를 다 안다는듯이 말해도 결국은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타인을 이해하기 어려운 이때에, 특히나 바쁜 현대사회에 수고로움을 덜고 그사람을 이해할수있는 이름표가 정의내려지니 얼마나 효율적일까요. 그렇지만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 내가 생각하는 나 못지 않게 남이 바라보는 나도 들여다볼 가치가 있지않나 싶습니다. 오히려 가끔은 나조차 몰랐던 내 모습을 타인의 눈을 통해 자각하는 경우도 있으니... 뭐 이게 타인을 의식해 나 자신을 포장하는것과는 별개라고 보지만요.

그렇기에 이 소설에서도 표현되었지만 상대를 이해하는 첫 걸음은 타인이 나와 다르다는걸 인정하고 그 차이를 인지하는것에서 시작된다고 생각이 되네요. 이 책을 읽고 나니 그 간극을 기본베이스로 해야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폭력적으로 바뀌지않도록 일정 막아주는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게 만들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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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라는 환상처럼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634
하재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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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 스스로를 완전하고 단단한 존재로 믿으며 살아갑니다. 기쁨과 슬픔을 느끼고, 타인과 관계를 맺고, 내일을 계획하는 일련의 과정 속에서 인간이라는 정체성은 지극히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여집니다. 그러나 하재연의 시집 인간이라는 환상은 그 견고한 믿음의 틈새를 파고들며 묻습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인간다움이란, 어쩌면 기억과 상실이 만들어낸 하나의 거대한 ‘환상’이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

​시집 전반을 관통하는 정서는 서늘할 정도로 투명한 고독과 슬픔입니다. 시인은 존재의 가득 참보다는 비어 있음에 주목합니다. 시 속의 화자들은 무언가를 끊임없이 상실하거나, 이미 사라진 것들의 흔적을 좇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그 슬픔이 격정적이거나 과장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담담하고 차분한 어조로 멀어지는 것들을 응시하는데, 이 정조가 독자에게는 더 깊은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마치 깨지기 쉬운 유리처럼 위태롭지만, 동시에 지극히 서정적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습니다.

​제목이기도 한 인간이라는 환상은 시집 속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됩니다. 시인은 인간을 완벽한 주체로 보지 않습니다. 대신 시간의 흐름 속에 마모되고, 기억의 왜곡 속에 흔들리며, 타인과의 완전한 소통에 실패하는 불완전한 존재로 그립니다. 우리가 ‘나’라고 믿는 존재는 결국 과거의 파편들과 타인이 남긴 흔적들의 조합일지도 모릅니다. 시집을 읽다 보면, 내가 딛고 서 있는 현실과 나라는 존재 자체가 한순간에 증발해 버릴 것 같은 기묘한 감각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집이 차가운 허무주의에 그치지 않는 이유는 시인이 그 환상의 상태를 외면하지 않고 끝까지 응시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인간이 환상에 불과할지라도, 사라져가는 것들을 기억하려는 마음, 닿지 않을 곳을 향해 말을 건네는 행위 자체가 역설적으로 우리가 인간임을 증명하는 고유한 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존재의 유한함과 소멸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진짜 성찰이 시작되는 셈입니다.

​인간이라는 환상은 바쁘게 흘러가는 일상 속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게 만드는 시집입니다. 명확한 답을 내려주기보다, 내 안에 존재하는 낯선 고독과 마주할 용기를 줍니다. 내가 가진 온기와 내가 겪은 상실의 의미를 다시금 돌아보게 만들며, 책을 덮은 후에도 서늘하고도 맑은 여운이 길게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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