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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라는 환상처럼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634
하재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6년 5월
평점 :
우리는 흔히 스스로를 완전하고 단단한 존재로 믿으며 살아갑니다. 기쁨과 슬픔을 느끼고, 타인과 관계를 맺고, 내일을 계획하는 일련의 과정 속에서 인간이라는 정체성은 지극히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여집니다. 그러나 하재연의 시집 인간이라는 환상은 그 견고한 믿음의 틈새를 파고들며 묻습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인간다움이란, 어쩌면 기억과 상실이 만들어낸 하나의 거대한 ‘환상’이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
시집 전반을 관통하는 정서는 서늘할 정도로 투명한 고독과 슬픔입니다. 시인은 존재의 가득 참보다는 비어 있음에 주목합니다. 시 속의 화자들은 무언가를 끊임없이 상실하거나, 이미 사라진 것들의 흔적을 좇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그 슬픔이 격정적이거나 과장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담담하고 차분한 어조로 멀어지는 것들을 응시하는데, 이 정조가 독자에게는 더 깊은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마치 깨지기 쉬운 유리처럼 위태롭지만, 동시에 지극히 서정적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습니다.
제목이기도 한 인간이라는 환상은 시집 속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됩니다. 시인은 인간을 완벽한 주체로 보지 않습니다. 대신 시간의 흐름 속에 마모되고, 기억의 왜곡 속에 흔들리며, 타인과의 완전한 소통에 실패하는 불완전한 존재로 그립니다. 우리가 ‘나’라고 믿는 존재는 결국 과거의 파편들과 타인이 남긴 흔적들의 조합일지도 모릅니다. 시집을 읽다 보면, 내가 딛고 서 있는 현실과 나라는 존재 자체가 한순간에 증발해 버릴 것 같은 기묘한 감각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집이 차가운 허무주의에 그치지 않는 이유는 시인이 그 환상의 상태를 외면하지 않고 끝까지 응시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인간이 환상에 불과할지라도, 사라져가는 것들을 기억하려는 마음, 닿지 않을 곳을 향해 말을 건네는 행위 자체가 역설적으로 우리가 인간임을 증명하는 고유한 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존재의 유한함과 소멸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진짜 성찰이 시작되는 셈입니다.
인간이라는 환상은 바쁘게 흘러가는 일상 속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게 만드는 시집입니다. 명확한 답을 내려주기보다, 내 안에 존재하는 낯선 고독과 마주할 용기를 줍니다. 내가 가진 온기와 내가 겪은 상실의 의미를 다시금 돌아보게 만들며, 책을 덮은 후에도 서늘하고도 맑은 여운이 길게 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