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화가 '마크 로스코'는 추상회화의 본질과 형상에 혁명을 일으킨 미국인 화가 세대에 속한다고 합니다.
다양한 형상적 표현으로부터, 관람자가 회화와 맺는 적극적 관계에 뿌리를 둔 추상양식으로 이르는 양식적 발전은 회화에 있어서 급진적 비전을 구체화했다고 합니다.
그런 마크 로스코의 일생과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읽을 수 있는 책이 《마크 로스코》입니다.
19세기 후반 이래 현대미술은 유럽을 중김으로 전개되었고 1952년에 근대미술관에서 열린 15인의 미국인전을 통해 뉴욕파는 구내외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마크 로스코의 본명은 마르쿠스 로트코비치라고 합니다. 러시아 드빈스크에서 네 남매 중 막내로 태어낫습니다.
형제들은 모두 마르쿠스보다 훨씬 나이가 많았습니다. 로스코의 아버지는 약사로 많지는 않아도 꾸준하고 안정된 수입원을 갖고 있었습니다.
유대계 러시아 지식인인 아버지는 자식들이 종교 교육을 받기보다는 세속의 교육을 받길 원했습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적극적이고 자유주의적이었던 마크의 아버지는 러시아의 잔학한 유대인 학살 사건 이후 정통파 유대교로 돌어서버렸습니다.
로스코가 2살일 때 유대인 공산주의자들의 학살 공포 속에 살게 되자 미국으로 이민 가기로 결심합니다.
미국 이민자가 되어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공부를 잘해 월반을 계속해 3년 동안 9학년 과정을 모두 마쳤습니다.
뛰어난 성적 덕분에 로스코는 장학금을 받고 예일 대학교에 진학했습니다. 마르쿠스는 인문학을 전공으로 택하고 의사의 집 다락방에서 세들어 살았습니다.
성적은 좋았지만 장학금 수혜 자격을 1년 만에 박탈당해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웨이터와 세탁물 배달원을 해야 했습니다.
예일 대학교를 2년 다니고 중퇴했지만 46년 후에 미술학부에서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하게 됩니다. 뉴욕으로 이사 간 마르쿠스는 생활을 위해 별별 일을 다 합니다.
뉴욕으로 돌아온 로스코는 소규모의 상업그래픽하고 뉴욕 디자인 학교에 등록합니다. 마르쿠스는 광고에도 경험을 쌓았습니다.
로스코는 실제 있을 법한 평범한 소재들을 취해 고독한 개인의 가장 무력한 순간을 보여준 것이 20세기 미술의 가장 위대한 업적이라고 합니다.
1946년 로스코의 수채화전이 열렸는데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다음해 로스코 개인전을 개최했고 정기적으로 전시회를 가졌습니다.
로스코는 색상을 매우 다채롭게 사용하긴 했지만 각각의 단계마다 한 가지 색만을 사용했습니다.
짙은 파랑이나 녹색 계열을 좀처럼 쓰지 않고 밝게 빛나는 적색, 황색을 선호했습니다. 각각의 층을 이루는 색들을 아주 가볍고 빠른 붓질로 칠했습니다.
대조적인 색채들은 서로 간의 상승효과뿐 아니라 로스코가 비극이라고 표현한 억제와 분출, 고착과 부유 사이으 간장에 의해서도 고양되었습니다.
로스코는 점점 인정을 받게 되었지만 자신이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다고 느꼈으며 사람들이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로스코는 자신의 미술은 추상이 아니라 살아 숨 쉰다고 했습니다. 자신이 뉴욕 화파와 동일시되는 것을 점점 더 거부했습니다.
위대한 색채 주의자로 분류되는 것도 싫어했다고 합니다. 비극, 황홀경, 운명같이 근본적인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는 데 관심이 있을 뿐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