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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리실 역은 삼랑진역입니다
오서 지음 / 씨큐브 / 2024년 12월
평점 :

아무도 찾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안해도 되잖아요.
바쁘게만 살아온 삶에 지친 채로
고향으로 향하는 기차에 오른 창화.
마찬가지로 고향으로 향하는 미정이
옆자리에 앉아 건넨 질문 하나로 두 사람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아무도 찾지 않는,
아무 것도 안해도 되는,
삼랑진이라는 곳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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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곳,
이곳은 삼랑진 역입니다.
인 서울.
성공을 위해선 반드시 가야만 할 것 같았던 그곳에서
창화와 미정은 완전히 지쳐버린 채로 기차에 올랐다.
빠르게 가는 ktx 대신
모든 역에 정차하는, 느리게 가는 기차 무궁화.
기차 안에서 옆자리에 앉았다는 이유로
대화에 물꼬를 튼 미정을 향해
저도 모르게 속사정을 털어놓는 창화.
크게 들리는 전화 통화 때문이었지만,
그건 두 사람을 이어주기에 충분했다.
아무것도 없는 시골이지만,
그렇기에 아무것도 안해도 된다는 말은
창화의 마음에 깊이 박혔고 고향집에 간 이후에도 계속 생각이 나서
부산과 30분 거리인 삼랑진으로 향했다.
삼랑진 역의 고즈넉한 풍경에 반해버린
창화는 그곳에서 마법같은 일을 겪게 되고
지친 마음을 달래줄 장소를 찾게 된다.
그리고 미정 또한 이대로 멈춰버리는 것 같았던 시간 속에서
창화와의 재회를 통해 나아갈 용기를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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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랑진, 이라는 곳은
나에게 추억의 장소이다.
어릴 적, 삼랑진의 한 동네에서 몇 년의 시간을 보냈고,
동네 친구들과 골목대장 놀이를 하며 곳곳을 누볐고,
삼랑진역의 구 역사가 신 역사로 바뀌는 것까지 봤었다.
지금은 많은 것이 바뀌었다.
초등학교 뒤편에 밀양 도서관도 생겼고,
편의점에 카페에, 도로도 넓어졌다.
그때의 삼랑진은 도로가 좁았고
구멍 가게가 전부였으며, 문방구 하나 달랑 있었다.
읍내로 나가 시장 주변이 그나마 번화가 였다.
우리 동네를 소개해준다는 미정의 말에
삼랑진에 소개할 거리가 있었나? 싶었는데
밀양에 있는 용암정과 위양지를 소개하는 걸 보고선
'우리 동네'의 범주가 넓구나, 라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삼랑진에 볼게 없긴 하지만,
가까운 안태호도 있고, 거기로 가는 아랫 길은
벚꽃길이 조성된 드라이브 코스이기도 한데
아마도 작품 배경이 여름이라 뺀 건가 싶기도.
책을 읽을수록
그때의 추억과 기억이 떠올랐다.
이용객이 많지 않은 삼랑진 역.
타는 사람도 내리는 사람도 적은 곳.
그나마 명절이어야 조금, 사람들이 늘어나는 곳.
그곳의 사계절 풍경이 눈에 그려져서
이 책의 이야기를 더 곱씹으며 한글자씩 읽어내려갔다.
빨리 빨리 를 외치는 사회에서
느리게 가는 기차를 선택하는 건 쉽지 않다.
빠르게만 살아왔다는 말은 마음을 뜨끔하게 만들기도 한다.
바쁘게만 살다보면 놓치는 것들이 많아진다.
누군가에겐 사랑일지도, 누군가에겐 사람일지도,
또 누군가에겐 건강이기도 한다.
어느 순간부터 사회는 바쁘게 살아야 한다며 등을 떠밀고,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그게 당연하다는 듯이 적응해버렸다.
인생을 마라톤에 비유하곤 하는데,
나는 종종 인생을 산책이라 말하곤 한다.
내가 썼던 짧은 소설 속에서도 인용하곤 했는데,
숨가쁘게 달려가야하는 마라톤과 같은 인생이라면
많은 것을 놓치며 살아가지 않을까.
그래서 앉아 쉬기도 하고, 천천히 걸으며 주변을 둘러보는 산책과 같은,
그런 삶을 살아야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느끼지 않을까 싶다.
삼랑진이라는 추억의 공간과
느리게 걸으며 비로소 활력을 되찾은 창화와 미정을 보며
아주 오랜만에 삼랑진을 한번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잊고 있던 어릴 때의 기억을 떠올리게 만드는,
아무것도 없어서 아무것도 안 해도 되어서
느리게 걷는 삶과 인생의 쉼표를 생각하게 만드는,
"괜찮아?"라는 말 한마디가 뭉클했던
'내리실 역은 삼랑진 역입니다' 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