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염병에 장남을 잃게 될까봐 두려워 학교조차 보내지 않았던 귀한 아들이었던 아버지가, 도리어 어린 나이에 전염병으로 이틀 간격으로 부모님을 하늘나라로 떠나보내고, 병역을 필하기 위해 손가락을 잘라야 했던 고단한 장남의 삶을 살아내야 했다. 이제는 몸과 마음이 모두 소진되어 버린 채 홀로 외로움을 삭히며, 창고에 뜯지도 않은 택배상자를 가득 쌓아놓은 눈물 많은 아버지가 되었다.
내게 아버지는 큰오빠였던 만큼 절로 지난날이 오버랩 되었다. 그때 당시 나의 큰오빠도 우리들을 두고 군대에 가면, 동생들이 먹고 살 길이 막막해서 손가락까지 자르지는 않았지만, 갖은 노력 끝에 군대를 면제 받은 걸로 알고 있다. 전쟁을 겪은 시기는 아니었지만, 건장한 대한민국 청년이라면 모두 군대에 가는 것이 의무이던 시절이었으므로….
나이 스물에, 열여덟이던 엄마와 결혼하여 서른도 되기 전에 아들을 셋(나중에 더 낳았다)이나 얻어 자식들 공부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고 살아온 아버지의 지난한 삶을 따라가노라면, 근현대사를 거쳐 힘겹게 살아온 우리 선조들의 삶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지금은 우리나라에 외국인근로자가 많이 들어와 살고, 내가 살고 있는 이 곳에도 길가다가 부딪히는 낯선 사람들이 당연하게 느껴진지 꽤 되었으나, 예전에는 이 책≪아버지에게 갔었어≫에서처럼, 돈을 벌기 위해 뜨거운 열사의 나라에 가서 고생한 노동자들이 많던 시기였다. 그나마 ‘헌’이의 큰오빠는 일반 노동자는 아니고 회사에서 발령받아 간 경우라 그 중 형편이 나은 경우였지만 ,이래저래 장남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추억 속으로 은은히 사라진 줄 알았던 나무궤짝에서 아버지와 큰오빠의 편지를 읽으며, 자신이 미처 몰랐던, 아들 앞에서의 조금은 나약해 보이는 아버지의 모습과 큰오빠가 느꼈을 장남의 무게를 가늠하게 되고…. 게다가 아버지에게도 처자식을 위해 영원히는 떠나지 못하고, 다시 돌아와야 했던 가슴시린 상처가 있음도 엿보게 된다.
특히 4장 “그에 대해 말하기”에서는 둘째 아들이 바라본 아버지와 ‘헌’이의 엄마인 아내가 남편을, 또 손자가 생각하는 할아버지, 지인이 회상하는 아버지의 같은듯하면서도 서로 다른 모습들도 직면하게 된다.
‘헌’이의 직업이 작가라서 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책≪아버지에게 갔었어≫를 읽으면서 저자와 많이 동일시가 되었다. 물론 여기에는 저자의 아버지도 있겠고, 그 시대를 살며 자신의 꿈을 자식과 맞바꾼 무수히 많은 우리의 아버지들, 대단한 일을 해내고서도 드러내지 못하는 누군가의 아버지 모습도 찾을 수 있겠다. 차마 표현할 수 없어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아버지들이 여기에 있을 테니까….
예전에는 ‘아버지의 날’이 없었고, 지금의 5월 8일은 ‘어머니의 날’이었다. 그러다가 부모님 모두를 공경하자는 뜻에서 ‘어버이 날’로 바뀐 것으로 알고 있다. 그동안 우리는 어쩌면 어머니에 대한 애틋함은 있어도 아버지에게 있어서는 냉담 그 자체였는지도 모르겠다. 아버지 또한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왔을지도….
저자는 이 책에서 ‘생각지도 못한 일들은 언제나 일어난다’. 고 적고 있다. 그 말처럼 우리의 삶은 생각지도 못한 일들의 연속인지도 모른다. 나는 이 책에서 지난 아픈 시절을 회상하며 나에게 아버지였던 그리운 큰오빠를 만났지만, 누군가는 자신의 모습을, 또 다른 누군가는 자신의 아버지를 만나 화해하고 용서를 구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