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는 꽃 기생
가와무라 미나토 지음, 유재순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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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이 양귀비를 일컬어 '해어화(解語花)'라 하여 말을 알아듣는 꽃이라 하였다 하지 않았는가? '말하는 꽃 - 기생' 이라 함은 그 정도는 되어야지 싶은데 나는 언제나 내가 원하는 그런 그림이 나오려나 싶어 끝까지 숨은그림찾듯 찾았지만 끝끝내 일본 사회학자는 나를 배신했다.

나는 풍류를 알고 싶었다. 먼저 세상을 등진 기생의 넋을 기리며 맑은 곡주 한 잔을 들고 오언이나 칠언시 하나 읊조리며 가을 바람 부는 고샅길을 돌아 벽계수가 흐르는 정자에서 읽어야지 제 맛이 나려나 했는데 책은 자꾸 미아리나 588 텍사스촌과 쉬파리골목같은 윤락가로 안내를 하려든다. 거기다가 일본의 식민지 사관이 교묘하지도 못하게 슬슬 기어 나오고 있으니 읽는 내내 개운함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생'을 쉽게 놓아 버리지 못함은 언젠가부터 조선시대 기생을 동경하던 내 관념 속의 기생을 버리지 못하고 또, 누군가에게 전생에 기생이 아니었을까 싶다 라는 말을 서슴없이 했던 내 발그레했던 얼굴이 떠올라 난 쉽게 일본학자에게 내 기생의 관념을 싼값이 팔아 넘길 수 없었다. 그만큼 기생은 나에게 '슬픈 아름다움'같은 존재였다.

책에서도 잠깐 언급이 되고 있지만 기생하면 황진이며 매창에서 논개에 이르기까지 절개와 기품과 풍류와 사랑을 아는..., 그렇게 말하는 꽃이어야 하지 않을까. 환락가의 암초로 변해버린 기생. 필요악이라하여 엄연히 있는 윤락방지법이 있으면서도 우리에게 쉽게 통용되는 매춘이라는 말. 이젠 '말하는 꽃'이 아니라 '몸 파는 작부'가 되어버린 세상. 시(詩) 서(書) 화(畵)를 그리워하며 나는 매창의 시를 읊어 본다.

'내 정령(精靈) 술에 섞여 님의 속에 흘러들어 구곡간장을 마디마디 찾아가며 날 잊고 님 향한 마음을 다스리려 하노라.'

내 영혼을 님의 술잔에 담아 님에게 가려하는 매창의 시 하나만이라도 건졌으니 그로 위로를 삼아야 할 것인가?

한국의 멋을 그대로 살릴 줄 아는 그런 기생을 책을 통해 만났으면 좋겠다. 저자가 미국의 여성 사회학자가 쓴 '게이샤'를 보고 부끄러움과 분노를 느꼈다고 하였는데 이런 기분이 바로 그런 것인가 싶다. 한국의 현대사에 얼룩진 식민지적 발언 속에 제대로 된 조명을 갈급해 하는 나의 심정. 속죄를 동정이나 공감의 의미로 사용하는 일본인 저자. 그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어진다. '늬들이 한국의 풍류를 알아!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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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딴방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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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난 맨발이다.

한 여름이 아니고서는 집에서도 꼭끼는 양말을 신고 다녔는데 찬바람 선득거리는 이 거리를 맨발로 나섰다. 내 발에 자유를 부여하고 싶었는데 삶의 테에 너무 익숙한 발은 자꾸만 움츠려들고 나는 한 발짝도 이 사무실을 나설 수 없다. 모두가 내 맨발을 보려할 것만 같다. 발을 부벼 본다. 내 발의 온기를 그대로 느끼며 난 꼼짝할 수 없는 갇힌 자의 슬픔을 본다. 결국 길들여진 것들 속에서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다는 절망감에 사로잡힌다. 난 언제까지 내 사랑을 참아야만 하는가? 과연 분출의 순간은 올 것인가?

맨살을 다 보이고 나서야 내 몸의 흉터를 다 보이고 나서야 껍데기를 완전히 벗겨내야만 그 속살이 다시 돋아나는 그렇게 처절하게 벗겨내야만 하는 것인가. 그녀의 외딴방은 그녀가 열여섯살부터 시작되는 공장생활과 산업체 고등학교를 다니던 고교시절의 이야기이다. 나비가 변신을 거듭하고 뱀이 외피를 다시 만드는 고통 뒤에 아름다움과 성장을 기대할 수 있는 것처럼 신경숙은 그렇게 벗기로 작정했다. 삶의 가장 깊은 치부를. 그래야 새살을 볼 수 있는 뱀처럼.

'오빠, 나 좀 이곳에서 빨리 데려가줘' 신경숙의 외침은 나의 외침이 된다. 나도 누군가 여기서 날 데려가 줬으면 나의 바램이기도 하기에 오랫동안 그 한 줄에 목이 메인다. 왈칵 울어버릴 수도 없는 서른하나. 열여섯도 아닌 내가. 고립무원의 이곳에서 보이지 않는 그물망을 두르고 한쪽 귀는 'Yumeji's Theme'로 막아버리고 있어도 불안과 초조뿐인 이 자리. 이젠 섣불리 내 자리를 박차고 나설 수도 없는 현실 속에서 누가 내 다리에 쇠스랑이라도 찍어 줬으면 하는 바램. 그 바램으로 읽는다.

'글쓰기, 내가 이토록 글쓰기에 마음을 매고 있는 것은, 이것으로만이, 나,라는 존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소외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은 아닌지' 그녀의 고백 속에서 울컥이는 내 소외가 느껴진다.

그녀가 말하는 초년고생. 그녀는 초년이 서른둘까지였으면 이라, 한다. 나도 늘 초년고생이라는 말이 따라다녔다. 나는 지금 서른 하나...., 나도 서른둘까지였으면 좋겠다라는 바램을 한다. 일년쯤이야 더 버티지 못할 것도 없다. 그러면 나도 이 지긋지긋한 곳에서 나를 데려갈 누군가를 만나게 될지도 모르니.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겨우 점심시간에 옥상에서 햇볕을 쬐는 창백한 그늘로' 구속은 더 깊은 갈증을 느끼게 한다. 숨통을 조여오는 답답증에 내 발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나도 주체하지 못하고 그 발자국을 따라갈 때가 있다. 그 길도 어느새 내가 다니던 길이었음을 알아버리는 내 몸의 기억력에 치를 떨 때가 있다.

'이 집은 좋아..... 누가 죽어도 모를 거야' 나는 옥상의 화분생각이 난다. 물을 줘야겠다. 그 화분에 나무가 죽어도 아무도 모를 것이..., 갑자기 슬퍼진다.

이렇게 수시로 그녀의 소설은 나의 일상을 파고든다. 딱히 아름다울 것도 없는 데 나는 자꾸 오버랩 되는 나를 본다. 그러나 그녀처럼 처절하지도 의지가 굳지도 않은 내 열여섯과 열일곱. 다시 돌아가면 나도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라고 주문처럼 외우고 다니며 모든 것과의 단절을 이룰 수 있을까? 나는 늘 그랬던 것처럼 다시 나에게 말한다. '지금도 늦지 않았어'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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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 지구에서 가장 특이한 종족
디트리히 슈바니츠 지음, 인성기 옮김 / 들녘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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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너무 오랫동안 '남자'를 끄리고 있다. 이제 '난 늬가 지겨워' 라고 말하고 싶다. 내 안에 내가 아닌 또 다른 나를 '남자'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알고 싶었다. '지구에서 가장 특이한 종족' 그것은 가장 본능적이면서 현학적이었다. 무지하게도 난 깊은 이해를 한답시고 적거나 생각하거나 해석하려했다.

그래도 천만다행인 건 내가 이 책을 다 덮기 전에 알아버린 것이다. '해석을 반대한다' 수전 손택의 '해석의 자리에 쾌락과 관능을 도입하라'는 주문을 받아들인 것이다. 온갖 상징과 치밀한 구조적 글쓰기에 단련된 내 온 몸의 관행 속에서 자유가 허락되지 못했던 것처럼 분석하고 상징을 굳이 이해하려 애쓰는 글읽기 또한 나를 억압하고 있다는 것을. 책읽기와 글쓰기 속에서 체질처럼 되어버린 관행들을 훌훌 벗어 던지고 나를 규제하려는 논리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을 먼저 주문한다. 적어도 '남자'를 읽는 그 순간만큼이라도.

우리는 가끔 사람에 대한 환상에 사로잡힌다. 여자는 남자에게 남자는 여자에게. 이 책을 읽고 난 후에 가장 나를 번민스럽게 하는 것은 내가 이 책의 '남자'를 기준으로 하여 '남자'를 보려한다는데 있다. 리얼리티를 좋아하지만 그 리얼리즘에서 꿈틀거리는 희망이라는 환상을 갖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시종일관 그런 환상은 '집어치워!'라고 말한다.

책 안에 특별한 남자는 없다. 우리가 누대에 걸쳐 익히 들어왔던 전형적 남자가 있을 뿐이다. 거기에다가 투정부리기까지 한다. '이런 남자를 좀 이해하고 폭 넓게 포용해야 한다고' 조금은 과장된 동물적 본능과 상황대처. 남성의 초상화를 우선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이나 <피그말리온> 또는 근래의 통속버전인 <귀여운 여인>에서 클린턴과 모니카 리윈스키의 행각에 이르기까지 남자가 여자를 구원한다는 차원으로 낯추거나 '남자는 항상 여자의 알몸을 보고 싶어하는 반면에 여자는 항상 남자의 벌거벗은 영혼을 보고 싶어한다'랄지 '여자는 태어날 때부터 여자이고 남자는 추후에 남자로 만들어진다' 까지 여성과의 의사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굳이 의사소통을 하려하기 보다는 남자의 특성을 이해하라는 투다.

남자의 섹스는 <착한 사마리아인>이라 하면서 외도를 정당화시키는 뻔뻔함도 자연스럽게 끌어낸다. 그리곤 끝내 이렇게 말한다. '모든 악순환에서 벗어나는 길은 하나뿐. 그것은 모든 분노를 벗어 던지고 자신의 권리와 주장에 대한 모든 생각과 결별하는 것이다' 가장 본능적으로 행동하라고 말한다. 왜냐면 그것이 남자이니까.

교육되어진 남자는 없다. 그저 본능에 입각하여 여자를 판단하려는 남자가 있을 뿐이다. 다시 절망하게 됨은 그런 남자가 우리 주변에 숱하게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난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진화하는 남자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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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기 길 위에서 듣는 그리스 로마 신화
이윤기 지음 / 작가정신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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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기의 어떤 글도 이렇게 친절하지 않았다. 나는 그가 쏟아내는 신화이야기에 매료되었다. 외국지명이나 이름 외우기에 약한 내 치명적 약점을 잘 알고 있기에 그가 안내하는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으며 내가 술술 읊어대는 고대의 여신과 남신 그리고 한번도 가본 적 없는 그리스의 도시들에 대해 영상을 만들어 내는 것을 깨달으며 신통해 하기도 한다.

그가 앞에서 보여줬던 신화이야기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신선함을 요구했던 나의 독서편력에 약간의 실망감을 주기는 했지만 작가가 얘기한대로 우리의 일상과 현실 속에서 신화가 전해주는 예술적 매력과 그 안의 상징성에 대해서 생각하기엔 좋은 책이지 않았나 싶다.

시를 공부하고 소설을 즐겨 읽으면서 가끔 상징에 대해 절대성을 부여하려는 나의 독서태도에 가끔 일침을 가하듯 또 다른 상상력을 펼쳐주는 책을 만나면 기분이 묘하니 카타르시스를 느낄 때가 있다. 인간의 상상력은 오랜 습관과도 같은 것이지 싶다. 신화를 통해본 상상력은 특히 상징성 앞에서 그 틀을 벗어나기 힘이 든다.

많은 부분 중에 금강역사가 사자가죽을 쓴 까닭은 개중 흥미롭다. 우리에겐 우리 고유의 문화가 있다. 그리스문화가 아무리 훌륭하다고 해도 우리 전통문화와 접목시킨다는 건 왠지 먼 나라 얘기처럼 별개로 들렸던 게 사실이다. 읽었던 얘기 또 읽는 것 같은 식상함 속에서 나에게 일침을 놓으며 책제목이 왜 '길 위에서 듣는 그리스 로마신화'인가를 알게 해준 부분이기도 하다.. 나는 거기서..., 다시 처음부터 새로 읽는다.

간다라 미술..., 나는 분명 이 간다라라는 말을 무지하게 많이 들었고 한때는 시험을 위해 달달 외웠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누군가가 간다라 미술에 대해 설명하라면 난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간다라에 대해 읽으면서 흩어져있던 지식이 한 실에 꿰어지는 그런 정연함을 느꼈다. 간다라는 지역이름으로 서아시아와 중앙아시아 교역의 중심지로 과거 인도에 속해있었다고 한다.

서아시아는 유럽으로 이어지고 중앙아시아는 중국, 일본, 한국으로 이어진다. 이는 곧 두 문화가 접합되는 곳으로 고대 인도 땅에서 발전한 그리스 로마풍의 불교 미술이라는 것이다. 인도의 대승불교를 받아들였던 이천여년전의 우리문화, 석굴암의 아미타불상에 나타난 간다라불상의 모습. 거기에 그리스로마문화가 있었던 것이다. 예시와 고증을 통해 우리가 걷고 있는 많은 길들 속에 신화가 있다고 저자는 얘기한다.

작가의 또 다른 매력은 어디에선가 들은 듯한 얘기. 어렵다 생각되어 머릿속에서 정립되지 않고 산만스러웠던 것들을 원인과 과정, 결과를 통해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는 것이다.

책을 덮으며 나는 전에 읽었던 신화이야기처럼 신화를 이해하려 애쓰지 않았다. 그저 내 생활과 길을 걸으면 볼 수 있는 인간의 무한한 상상력 그리고 상징성들에 대해 오늘부터 나의 근시안을 좀 늘려보려 할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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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 도둑
아사다 지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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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방 窓 앞엔 작년에 학교측에서 심어놓은 재래종 벚나무가 한 그루 있다. 학교를 두르고 있는 건 메타세쿼이아 나무인데 우리집 앞에 메타세쿼이아 죽었는지 그루터기만 있다. 분명 자발스러울듯한 학교장은 빈 구석 같은 그 공간을 못마땅해했을 것이고 뭔가 심어야지 벼르다가 작년에 유행했던 재래종 벚나무를 심기로 결정했나보다. 어머니는 우리 집 뒷켠에 나무가 없는걸 다행으로 여겼다.

우선은 장독대를 가려 햇살을 받을 수가 없어 장이 맛이 없어지고 둘째는 가을이면 나뭇잎이 떨어져 하수구며 옥상이며 가릴 것 없이 수북히 쌓여 청소하기가 힘에 겹다는 거였다. 올해도 봄에 분홍빛 벚꽃이 장독대위로 수북해지니 어머니는 투덜거리신다. 꽃잎까지 떨어진다고. 그러나 난 내심 좋다. 창 밖으로 떨어지는 낙화의 은근함에 마음이 다소곳해지고 장독대위에 고인물로 떨어지는 분홍빛 꽃잎의 투명함을 보는 것도.

그러나 난 알고 있다. 한때 어머니도 남의 집 어여쁜 꽃을 탐하던 그런 때가 있었음을.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처녀적 이웃집 담장위를 타고 오르는 능소화가 그렇게 이뻐서 옷에 꽃물을 들였다 라는 얘기를 아련한 눈빛으로 읊어 댈 수 있었겠는가?

모든 것이 완벽해 보이지만 인간에겐 남의 집 어여쁜 꽃의 위로 같은 채워지지 않는 선천적 질병을 소유하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현대의 우리는 너무 쉽게 남이 소중하게 가꿔온 화원의 꽃을 꺾는다. 이 책에선 그걸 과감하게 '도둑'이라고 명명한다. '장미도둑'

장미는 요이치와 아버지 캡틴의 유일한 취미라고 말할 정도로 아끼는 꽃이다. 요이치의 가정뿐만 아니라 요이치가 사랑한 헬렌과 그의 친구들 모두. 그 마을의 상징과도 같은 것이며 가정에서는 여자와 같은 것이며 정성 드려 가꿔야할 소중한 것의 상징이다. 장미가꾸기를 무엇보다도 소중하게 생각하는 그 마을에 미나미 신이치로라는 서른다섯의 독신이며 과거 농구선수였다가 영화배우가 될 뻔한 교포2세가 요이치의 신임 선생으로 부임한다.

요이치의 아버지는 상선회사에 다니며 일년의 반 이상은 항해를 하고 일년에 1번 3월에서 6월까지 세계일주를 하는 배의 캡틴이다. 그의 어머니는 뛰어난 미모와 부를 가지고 있으나 왠지 늘 심심해 보이는 그래서 화장을 아침에 1시간씩 하는 그런 사람이다. 평화로운 그 마을에 장미도둑이 출몰한다. 요이치의 집뿐만 아니라 헬렌의 집과 다른 두 친구의 집까지. 글은 아주 능청스럽게 전개된다. 왜냐면 이 책은 요이치가 아버지 캡틴의 항해동안에 보내게 되는 편지로만 이어지기 때문에. 이 글의 작중화자는 그러니까 초등학교 고학년인 요이치이다.

바람둥이 선생과 어머니의 갈등. 그리고 이웃여자들의 시기는 그저 헬렌을 사랑한다고 생각한 요이치의 고백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아이의 순수한 사랑과 어른들의 도둑질 속에서 그 도둑을 잡으려하고 장미를 지키려는 아이의 시선 속에 잘 버무려져있다. 모든 것이 완전범죄이길 바랬던 어른들의 허상은 아이의 눈 속에서 무참히 짓이겨진다.

'소중한 장미꽃을 단 한 송이도 도둑맞지 않도록 마미와 둘이서 똑똑히 지키겠습니다. 부디 안심하세요.' 라고 말하는 요이치의 마지막 말. 누군가 허점만 보이면 씀뻑 베어가버릴 것 같은 것. 똑똑히 지키지 않으면 소중한 것들은 손가락 틈의 모래알처럼 흩어질 것이다.

'아사다 지로' 나는 이 낯선 일본작가의 이름을 오래도록 쳐다본다. 나는 영화 철도원을 보았고 파이란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 글을 쓴 '아사다 지로'를 알고자 함에는 인색했다. 오랜 선입견과 부정적 견해가 또 하나의 편견을 낳았던 것이다. 그는 기발한 작가이며 그의 단편을 통해 섬세하게 흐르는 인간의 내면을 엿보는 재미는 아주 솔솔했다. 장미도둑뿐만 아니라 정리해고 당한 한 가장과 한물간 무희와의 묘사가 돋보이는 '수국꽃 정사' 부만 쌓다가 허무하게 죽어 가는 고위층인사를 다룬 '죽음 비용', 한 사람의 죽음을 통해 보여지는 인간군상의 모습을 묘사한 '나락'과 슬픈 밑바탕 위의 따순 그림 같은 '하나마츠리'. 어느 것 하나 버릴 것 없는 훌륭한 단편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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