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토리아 대논쟁 1 - 도덕 & 지식인 히스토리아 대논쟁 1
박홍순 글.그림 / 서해문집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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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만만치 않다.

 

고대 그리스 철학의 거장 두 사람이 좌석한다.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텔레스이다. 서로의 이론에 상당한 반감을 가지고 있는 두 사람은 ‘안다는 것’과 ‘실천한다는 것’에 대한 대논쟁을 벌인다. 두 번째 논쟁의 주인공은 샤르트르와 리오타르이다. 이들은 지식인이란 무엇이며 지식인은 보편적이 주체의 역할을 할 수 있는가? 를 놓고 논쟁한다. 고대철학의 대표주자 두 사람과 현대철학의 대표주자 두 사람을 오늘 이 자리에 모이게 한 것은 ‘지식’과 ‘지식인’에 대한 논쟁을 벌이기 위해서이다.

 

소크라테스 철학의 기본은 지행합일이다. 지식과 행동, 이론과 실천을 분리하지 않았다. 어떤 행위를 할 때 무엇 때문에 그 일을 해야하는가에 대한 확실하고도 분명한 인식을 갖지 않으면 그 행위를 할 수 없다고 보았다. 지식과 실천을 하나로 본 것이다. 따라서 알고서도 행하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주의주의자다. ‘의지’가 지성보다 우위에 있다고 본다. 덕은 단순히 지식을 통해 성취되는 것이 아니고 선한 행위를 실천하고자 하는 “선의지”. 즉 실천의지의 중요성이다.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안다는 것이 행동하는 것이라고 본 소크라테스에 대한 반발이라고 볼 수 있다. 혹자들은 소크라테스철학을 발전시킨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 책을 읽다보면 이 부분에 있어서 소크라테스는 상당한 민감하게 반응한다.

 

소크라테스가 이처럼 민감한 이유를 나는 그들이 국가에 대한 법을 이해는 차원에서 해석해봤다. 아니, 좀 더 구체적으로 죽음을 맞이했던 입장일지도 모른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철학에 맞게 죽음을 맞는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도 마찬가지다. 소크라테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끝나고 그의 이론과 산파술이 젊은이들에게 악영향을 미친다며 ‘신에 대한 불경죄’로 고발당한다. 그는 “사람들이 진정한 덕을 갖고 있지 않은데도 가지고 있는 양 착각하는데 단지 지혜와 진리, 영혼의 향상을 위해 힘쓰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덕일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진정으로 이를 안다는 것은 이를 실행할 의지도 함께 갖고 있을 때.” 라며 “내가 동의한 그 법에 따라 이 국가에서 한평생을 살아왔기에 중요한 순간에도 이를 어길 수 없다는 이유”로 사형을 받아들인다.

 

그런가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관계가 깊다는 것과 일치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며 안다는 것과 실천하는 것에는 간극이 존재하는데 이를 메울 수 있는 것은 ‘선의지’라고 말한다. 선의지는 알고 있는 것을 실천하는 것으로 실행의 문제에서 어떻게 해야 덕이 실현될 수 있는가 하는 방법론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잠깐, 아리스토텔레스의 죽음을 말하기에 앞서 죽음의 배경을 설명하자면 이렇다. 그가 태어났던 BC 384년은 스파르타가 아테네를 지배했던 시기로 당시 그리스 세계를 지배했던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왕 때이다. 필리포스왕은 아리스토텔레스를 자신의 어린 아들인 알렉산드로스의 개인교육을 담당하게 한다. 아테네시민들은 알렉산드로스가 아테네를 점령하면서 자유를 박탈당했다고 생각했으며 알렉산드로스가 죽었을 때 그와 각별한 사이였던 아리스토텔레스를 ‘신에 대한 불경죄’로 고소한다. 소크라테스의 사례를 보았을 때 사형을 예상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소크라테스처럼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아테네 시민들이 철학에 두 번씩이나 죄를 짓지 못하도록 한다는 이유를 들며 도주한다. 그의 철학대로 얘기하자면 ‘선의지’가 안다는 것과 실천하는 것에 대한 간극을 메우지 못한 격이 되는 것인가? 나의 얄팍한 지식으로는 쉽게 단정 지을 수 없는 대목이다.

 

극단적이긴 하지만 이것이 바로 안다는 것이 덕이라고 생각했던 소크라테스와 덕은 별도의 선의자가 필요하다고 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차이라고 말한다면 극히 단말마적일진 모르겠으나 난 그렇게 이해했다.

 

그렇다면 지식인에 대한 논쟁을 벌인 ‘사르트르’와 ‘리오타르’는 어떠한가?

 

사르트르(1905~1980)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20세기 사상가이다. 문학가로서 일생 동안 기존의 지배계급을 비판하고 고발하면서 참된 지식인이 되고자 노력했으며 지식인은 고독한 민주주의의 옹호자로서 실천하는 지식인상을 주장한다. 진정한 실존의 문제는 사회와의 교감에서 기초해야하며 나가서는 실천적인 성격을 띠어야 한다고 말한다. 자신만의 안위를 위해 일하지 않고 사회와 민중을 위해 일하는 것. 이것이 사르트르가 말하는 지식인인 것이다.

 

리오타르(1924~1998)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선두주자로 앞서 얘기한 사르트르가 지식인을 선구자로 봤다면 리오타르는 지식인의 종언을 주장하며 다양한 사회에서 하나의 이론적 틀로 해명하려는 기존의 거대이론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보이면서 지식인의 역할은 이제 대중이 스스로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탈중심적 사고, 탈이성적 사고를 가장 큰 특징으로 하고 있다. 그는 일률적인 것인 거부하고 다양성을 주장했으며, 칸트가 ‘순수이성이 만들어낸 산물’이라 했던 이념의 실현을 불가능하다고 주장함으로 정치철학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어떤 이는 철학의 새 천년이 1968년 프랑스 ‘68혁명’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정재영’쌤은 ‘우리가 근대라고 부르는 역사의 한 시대가 마감되었다는 사인’을 즉 포스트모더니티의 새 시대의 징후를 1968년 파리의 낭테르대학 운동장에서 찾은 것이다.

‘68혁명’은 이전의 사회운동 또는 사회 혁명과 달리 그 주장이 선명하지 않다. 시위에 등장한 구호가 어지럽고 산만하다. ‘우리는 그 무엇도 주장하지 않는다. 우리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우리는 단지 점거한다.’, ‘지루함은 반혁명이다.’, ‘상상력에 권력을’, ‘행복은 살 수 없다. 그것을 훔쳐라.’, ‘금지하는 것을 금지하라’, ‘행복이야말로 새로운 이념이다.’ 이것이 ‘68 시위에 등장했던 구호들이다. 시위대는 낡는 세계에 대한 ’이의 제기‘의 표시로 돌멩이를 던졌다는 것이다. 이를 대표하는 철학자가 바로 오늘 이 토론장에 나타난 리오타르이다.

 

이들의 대논쟁에 휩쓸리면서 나의 얇은 귀는 더욱 얇아졌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선의지가 옳은 것이라 생각했으나 소크라테스의 철학은 개인주의적이고 얄팍한 이기주의에 사로잡힌 우리에게 많은 배울 점을 시사하고 있으며, 사르트르가 말한 지식인에 대한 생각이 옳다고 생각했으나 리오타르의 주장 또한 우리 스스로의 힘과 내가 든 돌멩이라는 좀 더 실천적 생각에 적극성을 주었다는 점에서 이번 대논쟁은 나의 생각을 뒤집어 놓았다고 볼 수 있다. 철학은 씹을수록 그 맛이 달콤 쌉싸래하여 나의 오감을 자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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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능력이 많으세요 하나님을 배워요 시리즈
캐린 맥켄지 글, 데릭 매튜 그림, 장인식 옮김 / 토기장이(토기장이주니어)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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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이들은 별을 좋아한다.

우리 아이들은 해를 좋아한다.

우리 아이들은 바람소리를 좋아한다.

이것들은 내가 모두 좋아하는 것들이다. 밤에 잠을 자지 않으려는 애를 재워야할 때면 나는 별을 가지고 유혹을 한다. “은교야, 엄마 업고 밖에 나가서 별도 보고, 바람도 만나고 나무랑 얘기도 하자.” 그러면 울다가도 내 등으로 올라온다. 그러면 나는 아이를 업고 별을 보러 나간다. 바람소리를 느끼라고 얘기해 주고 나무가 몸을 부비는 것은 서로 그리워서라고 말해준다. 말도 제대로 못하는 아이들이지만 별이 나오는 그림책을 보면 고사리 같은 손으로 반짝반짝을 해보인다. 해가 나오는 그림책을 보면 창밖을 가리킨다. 나무나 새 그림이 나오면 ‘어어어’하면서 앞에 있는 산을 가리킨다.

 

하나님을 배워요. 시리즈를 처음 들고 간 날. 아빠 곁에 앉아 ‘하나님은 능력이 많으세요’를 보여주자 그림책에 나오는 별과 우주, 해를 보며 반가워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바람이 세차게 불게도 하시고 부드럽게 불게도 하신다는 부분을 보면서는 나무와 모자의 흔들림을 손으로 흉내까지 내는 것이다. 아주 작은 변화이고 남들이 보면 하잘 것 없는 행동이어도 이제 세상에 조금씩 눈떠가는 아이들의 달라진 행동에 엄마는 감동 그 자체이다. 커다란 파도가 일게도 하시고 거친 바다를 잔잔하고 고요하게도 하는 부분에서도 파도 흉내를 내며 커다랗게 손을 움직이고 잔잔한 바다는 흐르듯이 손 모양을 만드는 모습을 보며 신기하기도 하고 감사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세요’에서도 여러 가지 그림들에 반응하는 아이들의 다채로운 표정이 나를 신나게 만들었다. 마지막 우리가 그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도 알고 계세요에서 하트를 그리는 부분을 보며 머리에 ‘사랑해요’ 하트를 만드는 모습은 너무도 사랑스러웠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세요’ 또한 잠 잘 때도, 놀 때도, 슬플 때도, 예배할 때도, 항상 함께하신다는 내용으로 언제나 혼자가 아니라는 부분을 들려줄 수 있어서 교육적으로도 참 좋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글 밑에는 영어로도 되어있어 늦게까지 우리 아이들 곁에서 유용하게 읽힐 좋은 책이었다. 글도 그렇지만 데릭 매튜의 그림 또한 아이들에게 친근감을 주는 좋은 그림들이어서 보기에 더욱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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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그대로가 아름답습니다 이철수의 나뭇잎 편지 4
이철수 지음 / 삼인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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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즈넉한 절 초입의 찻집으로 저물녘의 긴 햇살이 따스하게 찻잔을 비추던 날이었다.

아마도 배꽃이 지던 늦은 봄쯤이었을 거다. 하얀 모시천에 까맣게 흩어지는 것이 별 빛 같기도 하고 긴 밤에 뿌려지는 봄비 같기도 했다. 그것은 하얗게 지는 배꽃이었다. 저렇게 작은 그림 속에 온갖 이야기가 쏟아지는 느낌. 그래서 나는 그 절집을 나오는 길에 그 하얀 보자기를 두고올수 없어 가슴에 품고 나왔다. 지금도 내 테이블에는 그날의 기억이 고이 간직된 채로 ‘배꽃 하얗게 지던 밤에’ 풍경이 있다.

 

봄비가 내리던 날이었다. 창호지 틈으로 불어오는 바람소리에 그리운 사람 그리워하며 밤을 지새우던 날. 동살이 비취기 시작하는 어스름 녘에 뒤안 문을 열어보니 비에 젖은 배꽃이 장독대 위에 곱게도 내려 앉아 있었다. 그 하얀 배꽃이 어찌나 내 맘 같던지 눈물 흘리던 스무 살의 내가 있었다. 지금은 생각만으로도 따뜻한 기억이다. 철수님의 책을 읽다보면 잊혀졌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피어난다. 유배되듯 발령 났던 변방의 사업소에서 점심밥을 먹고 산책 다녔던 마을길에 탱자꽃과 역원이 한 명 뿐이었던 시골 간이역의 측백나무 그늘 밑 낡은 나무 벤치. 낮은 기와담장 밑으로 피어났던 사랑초와 상사화...., 그 꽃 깊이 보고 싶어 기척도 없이 대문을 넘었던 오롯이 나만 있었던 감성들. 그 누구도 철없는 나를 훔쳐보지 않았고 그래서 행동이 더 자유스러웠던 기억. 철수님의 그림들이 내 기억을 수 놓는다. 돌이켜보면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그 변방에서의 삶이. 그런데 나는 왜 다시 그런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걸까? 늘 선택은 나에게 주어지는 것임에도,

 

지금은 충북 제천 외곽의 농촌에서 아내와 함께 농사를 지으며 판화작업을 하고 있단다. 자연 속에서 사는 그의 사계가 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겨울, 봄, 여름, 가을... 읽는 내내 마음이 따뜻해서 아주 천천히 읽었다. 토시하나 버릴 것 없는 마음의 길이 느껴졌다. 자연 속에 다 있었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잣대도, 너그럽게 바라볼 줄 아는 넉넉함도, 작고 초라해도 소중한 것이 생명이라는 것, 어른이 된다는 것, 사람이 만든 세상이니 사람이 바꿀 수 있는 것이 세상이라는 것, 흔들리지 않는 둥치로 커나간다는 것, 온통 봄햇살 같은 사람, 그 곁에 있고 싶다는 것. 내 마음까지 온통 붉게 만드는 시 같은 그림과 그림 같은 이야기들. 짧아서 더 귀하게 와 닿는 잔잔한 미소 같은 글귀들. 많은 위로를 받았다.

 

고맙습니다. 철수님. 덕분에 맘속이 시원해졌고 ‘미풍에도 가지 끝이 흔들리는 여리고 무성한 잎 같아서’ 늘 걱정이었는데 이 또한 긍정해 주니, 감사합니다. ‘관록의 둥치’를 알게 하시니 고맙습니다. ‘제 욕심의 늪에 불꽃을 빠뜨려 스스로 자진하는 욕심의 운명을 지닌 살찐 초’로 살지 말자 하시니, ‘얼핏 아름답고 솔깃하지만 핏기는 없는 관념의 언어들’ 버리게 하시니, ‘가난의 의미가 선택이고 결단이 되길’ 바라는 그 마음 알게 하시니 고맙습니다.

바깥기운에 끄달리지 않고 살기 위해 노력하며 판단의 기준이 ‘우리들’이 되도록 노력하겠으며, 저를 온통 긍정하느라 붉디붉은 저 꽃색 처럼 살고자...., 그렇게 오는 봄을 맞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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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문학여행 답사기
안영선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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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문학기행 한 번 써보고 싶었다. 내 생각의 흐름이 있는 서정성과 사실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함께 있는 여행답사기. 그러나 쉽지 않았다. 사실을 설득력있게 전하는 문체는 대부분 건조하고 강건한데 반해 내 생각을 표현하는 서정적인 부분은 만연체나 우유체가 어울렸기 때문이다. 내 문체의 흐르는 방향을 뻔히 짐작하기에 힘든 고행이 되리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아무리 용을 써도 아마 이와 같은 여행답사기가 나오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의 직업이 선생님이라서 그런지 상당히 참고서적인 답사기였다. 

 

이 책에는 모두 21명의 작가가 나온다. 일제강점기에 활약했던 우리나라 근대 작가들이 대부분이고 조선시대 송강 정철과 허균과 허난설헌, 윤선도, 김삿갓 정도를 소개하고 있다. 저자가 몸담고 있는 곳이 학교여서 그런지 주로 교과서에 나오는 작가의 작품들을 소개하고 그 작품들에 대한 줄거리와 작품이 탄생하게 된 역사적, 시대적 배경과 작가의 사상, 생각들을 작품과 함께 소개해준다. 그 다음 장에서 ‘나의 문학 여행답사기’라 하여 저자의 생각과 답사하는 작가의 작품의 배경이 된 현지를 방문하면서 느낀 소감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문학 속에 남겨진 그곳의 다양한 여행코스를 소개해준다. 숙식과 먹거리까지 친절하게 팁으로 남겨주고 있다. 아! 학습포인트 까지 첫 장에 소개시켜 주고 있으니 초등학교 고학년이나 중학생을 둔 부모가 아이들을 데리고 여행하기에 안성맞춤이라는 생각이 든다.

 

책과 문학에 대한 관심이 높다보니 내가 살고 있는 곳과 가까운 남도지역의 작가들은 내 발길이 닿은 곳들이 많았다. 당시에 얻고자 했으나 시간이 부족하고 방대한 자료를 정리하지 못해 발품만 팔았던 여행지에 대한 생각들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내 생각과 비슷한 부분을 만날 때도 있었으나 조금 다른 부분들을 접할 때도 많았다. 나는 저자가 몰라서 그랬다기보다는 대중적인 부분들과 교육자적인 면모로 집필에 대한 한계에서 나왔으리라는 조심스런 제멋대로 추측도 해보았다.

 

심훈, 이병기, 이육사, 송강정철, 조지훈, 신석정, 윤선도, 이효석, 허균과 허난설헌, 홍명희, 김삿갓, 김유정, 신동엽, 채만식, 한용운, 김영랑, 박용철, 서정주, 이무영, 정지용, 박경리.  우리 현대문학의 뿌리와도 같은 그들의 작품세계와 작가들의 면모, 그들의 혼이 살아 숨 쉬는 이 땅의 숨결과 그들을 업적을 계승 발전시키려는 후손들의 열정.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불운에서 펜을 들고 살아야했던 그들의 고난을 되새길 수 있었던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첨언 : 한 권의 책을 만들기 위한 심열이 느껴졌음에도 이 점은 꼭 집어주고 싶다. 사진 하단에 설명이 없다는 부분과 신석정 시인의 부안 마을 사진과 서정주 시인의 고창 마을 사진이 똑같았다. 편집상의 오류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제판이 된다면 수정해야할 부분 같아서 첨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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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노희경 지음 / 김영사on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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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나는 한때 나 자신에 대한 지독한 보호본능에 시달렸다.

사랑을 할 땐 더더욱이 그랬다.

사랑을 하면서도 나 자신이 빠져나갈 틈을

여지없이 만들었던 것이다.

가령, 죽도록 사랑한다거나, 영원히 사랑한다거나,

미치도록 그립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내게 사랑은 쉽게 변질되는 방부제를 넣지 않은 빵과 같고,

계절처럼 반드시 퇴색하며, 늙은 노인의 하루처럼 지루했다.

...............

그래서 헤어질 땐 울고불고 말고 깔끔하게, 안녕.

나는 그게 옳은 줄 알았다.

그것이 상처받지 않고 상처주지 않는 일이라고 진정 믿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드는 생각.

너, 그리 살어 정말 행복하느냐?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죽도록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살 만큼만 사랑했고,

영원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언제나 당장 끝이 났다.

내가 미치도록 그리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도 나를 미치게 보고 싶어 하지 않았고,

그래서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사랑은 내가 먼저 다 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

버리지 않으면 채워지지 않는 물잔과 같았다.

 

*

 

나도 감옥 같은 방에 앉아 반성문 같은 글이나 쓰련다. 내 마음을 다 주지 않았고 내 마음을 버리지 않았고 미치게 보고 싶어 하지 않았고 살 만큼만 사랑했기 때문에. 사랑이라는 것이 스무 살의 상징처럼 때론, 청춘남녀의 눈 먼 불장난이라고만 생각하지 않는 나이가 되었음에도 늘 사랑에 서툴다. 가족에 대한 사랑이 그렇고, 동료에 대한 사랑이 그렇고, 소외된 이웃에 대한 사랑이 그렇다. 상처받지 않을 일들을 먼저 생각했고 나에 대한 지독한 보호본능으로 인하여 분명 배신 받게 될 내 여린 가슴한구튕이만 바라봤기 때문이다. 내 것을 다 비우고 내 것을 다 주지 않으면 결코 채워지지도 받지도 못하는 것이 사랑이라는 걸 알면서도 오늘도 서툰 내 자아본능만이 나를 지킨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미 깨진 뒤웅박이 된 뒤에야 뼈아픈 후회를 한다. 사랑했던 모든 자리마다 폐허가 되었다고.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걸어 들어온 적 없는 나의 폐허. 이젠 아무도 기다리지 않으며 그 누구도 나를 믿지 않고, 기대하지 않는 죽은 짐승 귀에 모래의 말을 넣어주는 바람이 떠돌다 지나갈 뿐인 그 자리. 뼈아픈 후회만이 남는 것이다. (황지우의 뼈아픈 우회 인용)

 

죽은 시체처럼 축 늘어진 지나간 사랑을 질질 끌고 다니고 싶진 않다. 하지만 나를 보호하겠다는 이유하나 만으로 오지도 않은 상처를 걱정하며 지금의 사랑을 유보하진 말아야겠다. 누군가에게서 느껴지는 그 건조한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시들시들 말라버리는 우를 범하지 않겠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유죄이기 때문이다. 가족과 동료와 친구에게 그리고 나를 품고 있는 익명의 다른 누군가에게 죄를 짓기 때문이다.

 

이 책을 같이 읽은 선배가 말했다.

“이 책 서평을 어떻게 써야할지 모르겠다.”

“왜? 어려웠어.”

“아니, 할 말이 너무 많어.”

알 것 같다. 그 말의 의미를.

책이 참 예쁘고 작가의 그 마음이 참 예쁘다. 맨 앞장의 전문을 다 옮기는 것이 예의이겠으나 조금 추렸다. 단 두줄이나 석줄로 이해될 말이 아니어서 장문을 옮겼다. 좀 빼볼까도 생각했지만 더 이상은 그럴 수 없었다.

감성의 울림이 깊은 드라마작가로 유명한 저자의 드라마들을 즐겨봤다. 그의 극본에는 빨려 들어가게 하는 강한 끌림이 있다. <꽃보다 아름다워>가 그랬고 <고독>이 그랬으며 <거짓말>이 그랬다. 소외되고 손가락질 받을 사건들을 따뜻하게 보듬는다. 인간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넓혀준다. 나는 왜 이렇게 밖에 쓸 수 없을까? “사람은 누구나 이해받고, 사랑받고, 아름다울 자격이 있다.”고 말하는 그 따뜻한 마음이 그의 드라마를 더 아름답게 만드는 거였다. 그 보편성에 기대본다. 이해받고, 사랑받고, 아름다울 자격이 있는 것. 그것이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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