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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 도둑
아사다 지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2년 4월
평점 :
절판
내방 窓 앞엔 작년에 학교측에서 심어놓은 재래종 벚나무가 한 그루 있다. 학교를 두르고 있는 건 메타세쿼이아 나무인데 우리집 앞에 메타세쿼이아 죽었는지 그루터기만 있다. 분명 자발스러울듯한 학교장은 빈 구석 같은 그 공간을 못마땅해했을 것이고 뭔가 심어야지 벼르다가 작년에 유행했던 재래종 벚나무를 심기로 결정했나보다. 어머니는 우리 집 뒷켠에 나무가 없는걸 다행으로 여겼다.
우선은 장독대를 가려 햇살을 받을 수가 없어 장이 맛이 없어지고 둘째는 가을이면 나뭇잎이 떨어져 하수구며 옥상이며 가릴 것 없이 수북히 쌓여 청소하기가 힘에 겹다는 거였다. 올해도 봄에 분홍빛 벚꽃이 장독대위로 수북해지니 어머니는 투덜거리신다. 꽃잎까지 떨어진다고. 그러나 난 내심 좋다. 창 밖으로 떨어지는 낙화의 은근함에 마음이 다소곳해지고 장독대위에 고인물로 떨어지는 분홍빛 꽃잎의 투명함을 보는 것도.
그러나 난 알고 있다. 한때 어머니도 남의 집 어여쁜 꽃을 탐하던 그런 때가 있었음을.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처녀적 이웃집 담장위를 타고 오르는 능소화가 그렇게 이뻐서 옷에 꽃물을 들였다 라는 얘기를 아련한 눈빛으로 읊어 댈 수 있었겠는가?
모든 것이 완벽해 보이지만 인간에겐 남의 집 어여쁜 꽃의 위로 같은 채워지지 않는 선천적 질병을 소유하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현대의 우리는 너무 쉽게 남이 소중하게 가꿔온 화원의 꽃을 꺾는다. 이 책에선 그걸 과감하게 '도둑'이라고 명명한다. '장미도둑'
장미는 요이치와 아버지 캡틴의 유일한 취미라고 말할 정도로 아끼는 꽃이다. 요이치의 가정뿐만 아니라 요이치가 사랑한 헬렌과 그의 친구들 모두. 그 마을의 상징과도 같은 것이며 가정에서는 여자와 같은 것이며 정성 드려 가꿔야할 소중한 것의 상징이다. 장미가꾸기를 무엇보다도 소중하게 생각하는 그 마을에 미나미 신이치로라는 서른다섯의 독신이며 과거 농구선수였다가 영화배우가 될 뻔한 교포2세가 요이치의 신임 선생으로 부임한다.
요이치의 아버지는 상선회사에 다니며 일년의 반 이상은 항해를 하고 일년에 1번 3월에서 6월까지 세계일주를 하는 배의 캡틴이다. 그의 어머니는 뛰어난 미모와 부를 가지고 있으나 왠지 늘 심심해 보이는 그래서 화장을 아침에 1시간씩 하는 그런 사람이다. 평화로운 그 마을에 장미도둑이 출몰한다. 요이치의 집뿐만 아니라 헬렌의 집과 다른 두 친구의 집까지. 글은 아주 능청스럽게 전개된다. 왜냐면 이 책은 요이치가 아버지 캡틴의 항해동안에 보내게 되는 편지로만 이어지기 때문에. 이 글의 작중화자는 그러니까 초등학교 고학년인 요이치이다.
바람둥이 선생과 어머니의 갈등. 그리고 이웃여자들의 시기는 그저 헬렌을 사랑한다고 생각한 요이치의 고백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아이의 순수한 사랑과 어른들의 도둑질 속에서 그 도둑을 잡으려하고 장미를 지키려는 아이의 시선 속에 잘 버무려져있다. 모든 것이 완전범죄이길 바랬던 어른들의 허상은 아이의 눈 속에서 무참히 짓이겨진다.
'소중한 장미꽃을 단 한 송이도 도둑맞지 않도록 마미와 둘이서 똑똑히 지키겠습니다. 부디 안심하세요.' 라고 말하는 요이치의 마지막 말. 누군가 허점만 보이면 씀뻑 베어가버릴 것 같은 것. 똑똑히 지키지 않으면 소중한 것들은 손가락 틈의 모래알처럼 흩어질 것이다.
'아사다 지로' 나는 이 낯선 일본작가의 이름을 오래도록 쳐다본다. 나는 영화 철도원을 보았고 파이란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 글을 쓴 '아사다 지로'를 알고자 함에는 인색했다. 오랜 선입견과 부정적 견해가 또 하나의 편견을 낳았던 것이다. 그는 기발한 작가이며 그의 단편을 통해 섬세하게 흐르는 인간의 내면을 엿보는 재미는 아주 솔솔했다. 장미도둑뿐만 아니라 정리해고 당한 한 가장과 한물간 무희와의 묘사가 돋보이는 '수국꽃 정사' 부만 쌓다가 허무하게 죽어 가는 고위층인사를 다룬 '죽음 비용', 한 사람의 죽음을 통해 보여지는 인간군상의 모습을 묘사한 '나락'과 슬픈 밑바탕 위의 따순 그림 같은 '하나마츠리'. 어느 것 하나 버릴 것 없는 훌륭한 단편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