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의 여행자 - 손미나의 도쿄 에세이
손미나 지음 / 삼성출판사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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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아침 눈을 뜨고 귀를 기울여 들어보니 어디선가 멀리서 북소리가 들려왔다. 아득히 먼 곳에서, 아득히 먼 시간 속에서 그 북소리는 울려왔다. 아주 가냘프게. 그리고 그 소리를 듣고 있는 동안, 나는 왠지 긴 여행을 떠나야만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먼 북소리』 중에서)




그 소리를 연모한 그녀는 스페인으로 떠났다.  그렇게 돌아 온 그녀는 KBS 아나운서라는 직함에 사표를 던지고 여행전문가로 변신한다.  그런 그녀가 다시 펴낸 두 번째 여행기록... 도쿄 에세이. 




여기서도 하루키는 어김없이 그녀의 여행에 동기자가 되어준다.




“4월의 어느 해맑은 아침, 하라주쿠의 뒤안길에서 나는 내게 100퍼센트 완벽한 여자 아이와 스쳐 지나간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4월의 어느 해맑은 아침, 100퍼센트의 여자 아이를 만나는 일에 관하여』 첫 문장)




이 소설을 읽고서 하지 않으면 못 견딜 또 한 가지가 바로 하라주쿠에 가보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인생의 빛나는 순간에 가슴을 통째로 뒤흔든 감동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퇴색되지 않는가 보다.”며 하루키를 기억하는 그녀.  난 너무 하루키를 늦게 만난 것일까?  먼북소리를 읽으며 지루함을 느끼던 나를 지금도 기억하니 말이다.




짧다면 짧은 여행을 (스페인은 1년이었으나, 도쿄는 여름 한철이었으니) 이렇게 긴 문장으로 만들어 내는 그녀의 능력(?)은 ‘하루키와 비슷하다’라는 생각을 했다.  우선은 책이 무척 독특하다.  소박한 표지와는 달리 그 안은 정말 ‘일본’스럽다. 현란한 그림들과 사진들.  ‘스페인 너는 자유다’를 읽으며 느꼈던 감동과도 사뭇 다르다.  글의 비워진 부분들을 사진이 채웠다라는 억지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전작에 미치지 못하는 후작은 더 큰 작품을 만들어 내는 거름이 되기도 하고 때론, 전작을 이겨내지 못하고 피그르르 말라 가기도 하지만 내가 느낀 그녀는 분명 월척을 들고 다시 나타나리라.  그러기 위해서는 절대 서둘러서는 안 되리라는 생각이 이 책을 읽는 솔직한 마음이다.  그럼에도 내가 만약 도쿄에 간다면 이 책을 들고 갈 것이다.  그녀만의 여행 감각이 나에게 전염돼 나도 이런 용기를 혹시나 갖지 않을까 하는 ‘혹시나’의 기대감 때문이다. 




  일본에 대해 관대해 지기는 참으로 어렵다.  오랜 역사의 화인이 몸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어 머리보다 몸이 더 먼저 거부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고리타분한 몸을 가지고 도쿄를 여행하기가 얼마나 복장터지겠는가?  ‘역시나’하며 돌아올지도 모르겠지만 그녀의 푸릇한 물고기의 팔딱거림은 바다에 건져지면 제 성질에 못 이겨 바로 죽어버린다는 갈치나 새우 같은 나에게 어항 속에서도 싱싱한 활어 같은 질긴 생명력을 줄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도쿄를 빛나게 해주는 많은 이들 중에서 그녀의 친구인 류이치와 하키코 부부는 그녀가 묻는 결혼 선배로서의 조언에 이런 말을 해준다.




"결혼생활에서는 무엇보다 서로의 차이점을 인정하는 일이 가장 중요해.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서 두 가지를 융합시켜 새로운 문화를 만드는 과정이 바로 결혼인 것 같아.  남편의 습관과 문화를 존중해주면서 동시에 자신의 주장을 확실히 펴는 것도 아주 중요해.  한쪽이 다른 한쪽에게 끌려가거나 상대를 무시하면 행복할 수가 없어.  그 과정을 잘 밟을 수 있다면 다음에는 서로의 차이점이 더 재미있을 수 있을 거야.  한국과 일본도 마찬가지잖아?  서로의 문화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하면 더 좋은 사이가 될 수 있겠지."




‘서로를 인정해 주고 존중해 주는 좋은 사이’를 우리가 늘상 강조해야만 하는 일본.  저자는 ‘마음을 홀딱 빼앗기기’도 하고 ‘꿈만 같기도’ 하다는 일본이 그 만큼 실감나지 않는 이유가 무언지 나는 분명 도쿄에 가봐야 할 것이다.  그 실제를 보기위해.  그래서 하라주쿠의 꽃가게도 찾아보고 신주쿠 탐험도 해보고 아사쿠사의 리키샤도 체험해 보고 새벽의 츠키지 시장도 돌아보고 싶다. 야나카에서 길을 잃어도 좋으리라.




그녀가 소개한 값진 선물이 또 하나 있으니 오키나와 할머니와의 만남이다.




“친구가 되는데 나이가 무슨 상관이 있어.  난 내가 몇 살인지 자꾸 잊어버려..... 올해부터는 한 해에 한 가지씩 새로운 도전을 하려고 해. 사실 난 올 겨울에 이 다이버 친구들과 따뜻한 나라로 여행을 떠날 거야.  그것 때문에 요즘 너무 설레서 잠이 다 안 온다니까.  거기서 스쿠버 다이빙을 할 계획이야.....” 일흔넷의 나이에 처음으로 스쿠버 다이빙에 도전하다니.  오키나와산 야채 말고 할머니가 젊음을 유지하는 또 하나의 비결이 있다면?  “그거야 물론 앞만 보고 가는 거지.  인생은 무조건 앞만 보고 가야 하는 거야.  난 한 번도 후회 따위는 해본 적 없다고.  앞만 보고 가면서 매순간 최선을 다하는 거야.”

.... 왠지 그 사람을 닮고 싶다고 소망하게 만드는, 어느 날 문득 그 사람을 잠시나마 마주할 수 있었다는 사실 만으로도 주책없이 눈물이 핑 돌게 하는.... 그녀에게 할머니는 그랬고 나에게도 그렇다.  저자와 너무 잘 어울리는 할머니의 철학이 밑줄 긋게 만든다.  앞만 보고 간다는 그 말이 이렇게 멋지게 들릴 줄이야.  그녀가 건져 올려준 싱싱한 도쿄를 먼지 쌓이게 두지 않고 가까운 날에 태양을 들이마시는 기분으로 가고 싶다. 




마지막으로 그녀의 여행 철칙을 옮겨본다.  분명 본받고 싶은 여행 덕목이기에. 더불어 즐기는 자의 여유가 숨 쉬고 있기에.




『 여행을 떠날 때는 모든 현실을 접어두고 새로운 세상에 흠뻑 젖어들 것이며 여행을 끝마칠 때는 다시 모든 것을 그곳에 두고 완벽하게 현실로 돌아가자는 것이 나만의 여행 철칙이다.  ..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이야기하는 낯선 차림의 사람들 속에 서 있는 순간, 현실 속의 나를 잊고 이방인으로서 한없는 자유를 누림과 동시에 철저히 나 자신일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지는 ‘여행’ 』 p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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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취한 코끼리 길들이기 - 몸, 마음, 영혼을 위한 안내서
아잔 브라흐마 지음, 류시화 옮김 / 이레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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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재밌다.  ‘재밌다’에는 여러 가지 의미들이 있다.  깨달음을 주는 재미가 있을 것이고 혼자 웃음을 품게 만드는 재미가 있을 것이고 남에게 들려주고 싶어 안달이 나는 재미도 있을 것이다.  이 모두를 포함한 재미가 바로 이 책에서 내가 얻은 ‘재밌다’의 정의이다. 




두 명의 수행자가 있었다.  평생을 가까운 친구로 지내다 죽은 다음 한 사람은 천상계에서 천신으로 환생하고 한 친구는 한 무더기 똥 속에 벌레로 환생했다.  천신으로 환생한 친구가 다른 친구를 찾아 해매이다 냄새 지독한 소똥더미 속에 한 벌레로 환생한 친구를 발견했다.  불행한 환생으로부터 자신의 오랜 친구를 구해야겠다고 생각한 친구는 천상계에 대해 설명하지만 똥무더기가 세상에서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 친구는 끝내 더 깊은 똥무더기로 들어가서 나오지 않는다.  그렇게 설득한 횟수가 108번이었단다. 

이 책에 실린 108가지 얘기를 뜻하는 것이다.  결국, 인간의 선택은 스스로가 하는 것이다.  108번의 설득이 먹혀들어가든 들어가지 않든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똥무더기 속이 가장 행복하고 좋다고 생각하는 벌레의 마음도 인정하자는 거다.  행복의 척도가 꼭 천상계에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은 혹자는 나의 이런 주장에 대해 책을 잘못 이해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이 책에 실린 108가지의 이야기들은 서두에 말한 ‘재밌다’라는 말을 실감나게 한다.




다음 이야기는 책을 심각하게 읽고 있던 나에게 푸하하 웃음을 던져줬다.

 

부유한 의사가 신형 스포츠카를 구입하여 햇빛 화창한 날 차를 몰고 평화로운 농장지대를 요란하게 달리고 있었다.  조용하던 시골길에 신형 스포츠카의 굉음은 스스로가 생각해도 민망한 일이었으나 속도가 주는 쾌감에 의사는 계속해서 속도를 높였다.

그때 한 농부가 운전자가 들을 수 있도록 목소리를 높여 고함을 쳤다.

“돼지!”

의사는 오로지 자신만의 쾌감을 위해 행동하고 있음을 깨달았지만

“무슨 상관이야! 나도 내 자신을 즐길 권리가 있다.”며 농부에게 외쳤다.

“당신이 뭐 잘났다고 나보고 돼지라고 부르지?”

그 짧은 몇 초 동안 그의 시선은 도로를 벗어났고 그 순간 도로 한가운데 버티고 서 있던 커다란 돼지와 정면으로 충돌하고 말았다.  이제 갓 구입한 그의 신형 스포츠카는 완전 박살이 났다.  뿐만 아니라 몇 주 동안 병원 신세를 져야했다.

그 의사는 에고 때문에 친절한 마음씨를 가진 농부가 해준 경고의 말을 부정적으로 잘못 판단했던 것이다. 

우리에게 이런 일들은 또 얼마나 자주 일어나는가?  남의 친절을 의심하고 계산하다가 스스로 갇혀 버리는 일들.  그게 바로 우리를 돼지라고 부를만한 충분한 이유이다.




“당신이 당신 자신의 에고를 버릴 때, 누구도 당신을 놀릴 수 없다.  누군가 당신을 바보라고 부른다면,  당신이 기분 나빠하는 유일한 이유는 그 말이 사실일지 모른다고 당신이 믿기 때문이다. ”

모욕에 웃음으로 대응하는 것을 얼굴을 붉히며 기분 나빠하는 것보다 훨씬 나은 방법임을 가르쳐주고 있다. 




다음 이야기는 나에게 깨달음과 함께 내 삶의 지표를 만들어 주는 이야기였다.




교수가 책상위에 유리 항아리를 하나 올려놓았다. 학생들 앞에서 그 항아리 가득 돌을 넣었다.  그리곤 항아리가 가득 찼냐고 묻는다.  학생들은 가득 찼다고 말했으나 교수는 다시 두 번째 주머니를 꺼낸다.  큰 돌들의 틈새로 작은 조약돌을 집어넣는다.  그리곤 다시 그 틈새에 많은 양의 모래를 흔들어 넣는다. 그 후로 물병을 꺼내 물을 붓기 시작했다.  그는 학생들에게 물었다. 

“자, 이것이 그대들에게 가르쳐주는 교훈이 무엇인가?”

한 학생이 “ 아무리 일정이 바쁘다 해도 언제나 다른 무엇인가를 끼워 놓을 공간이 있다는 것입니다.!” 라고 말하자 교수는 “틀렸다.”라고 말한다.

“이것이 보여주는 교훈은, 큰 돌을 집어넣기 원할 때는 그것들을 맨 먼저 집어넣으라는 것이다.”




나에게 가장 큰 돌은 무엇인가? 생각해 본다.  정말 먼 미래를 생각할 때 차근차근 쌓아가야 할 무언가가 있다면 그 계획을 가장 우선해야 하지 않을까?  바쁘다고 핑계대지 말고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제일 먼저 항아리에 담아야 할 것이다. 




명상은 내 영혼의 자유를 찾아가는 길이다.

늘 치열한 삶을 살고자하는 나에게 명상은 맞지 않는 코드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나 같은 사람에게 명상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내 영혼이 내 육신을 따라오지 못해 길 잃고 헤맬 수 있기 때문이다. 

요가를 배우면서 가장 좋았던 것은 해거름 녘에 했던 우주와 나의 호흡이었다.  숨을 들이 쉬고 내쉬는 것만으로도 육신과 영혼이 평안해지는 그 느낌..., 그 느낌은 해거름 녘이 가장 좋았다.  해가 숨고 달이 뜨는 시간.  그 시간의 교차점에서 내 영혼이 쉬어가는 것이다.  이 책은 단순한 잠언서 이상이다.  곱씹어 생각할수록 그 맛이 달다.  누군가에게 들려주고 싶은 얘기들이 가득하다.  다 옳은 말만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내 식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다만, 지혜를 얻기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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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언제 이 숲에 오시렵니까 - 도종환의 산에서 보내는 편지
도종환 지음 / 좋은생각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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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동안 내내 겨울하늘은 어두웠고 간혹 눈발을 날리기도 했다.
어느 날은 빗방울이 내리기도 했다.  내 집 앞 숲 속에 나무들은 바람에 흔들리기도 하고 내리는 눈을 머리위에 이고 있다가 온전히 비를 맞으며 떨어내기도 한다.  시인의 숲을 읽는 동안 내 숲에도 꽃이 피고 비가 내리고 눈이 온다.  나비가 사랑을 하고 새로운 싹이 움트고 따뜻한 장작나무 군불이 지펴진다.  들국화 꽃무리 속에서 나비잠이 들었다가 코스모스 꽃그늘 아래서는 꽃이 어른거려 깊이 잠들지 못하는 노루잠을 잤다가 억새밭 사이에 누워 여윈잠에 들기도 한다.  가을 한낮의 다디단 쪽잠도 좋다.  언제든지 더 험한 벌판으로 내팽개칠 수 있다는 걸 알려주는 겨울에 감사하며 차가운 새벽빛에 이마를 씻는 시인의 나지막한 음성.  시인은 산방 문을 열어 놓고 누군가를 기다리며 치유의 숲에 오라고 한다.

그리곤 한 없이 내 유년의 숲으로 나를 이끌고 내 어미의 지린 가랑이 사이에서 들던 단잠을 기억나게 하고 매서운 겨울바람을 뚫고 찾아 가던 친구의 숲 속 집을 생각나게 한다. 알몸을 한 11월의 산들을 기억하게 하고 누군가 그리워하는 내 마음을 엿보게도 한다.

요즘에 난 내가 도통 마음에 들지 않다.  나를 자학해야하는 그 괴로움은 가족에게 양도되어 서로를 괴롭힌다.  내 마음의 문제라고만 하기엔 골이 깊어져 이대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해결책은 막연하기만 하다.  거울을 보기가 두려울 정도로 침울한 내 표정들 ‘잘 익은 빛깔의 성숙한 과일’이기를 그렇게 늙어 가기를 원했던 나는 어디에 있는가?

시인의 품 같은 그 숲에 나를 부려놓고 싶다.  아니면 시인의 숲에서 내 유년의 기억들이 나를 치유해 주길 바란다.  오롯이 나를 찾을 수 있는 여행을 떠난다.  발이 갈 수 없는 그곳을 마음으로...., 

내 유년의 숲은 놀이터였고 먹거리 가득한 식탁이었고 꿈꾸기 좋은 푹신한 목화솜이불이었다.  진달래 무성한 산마루를 넘어서 찾아가는 친구의 집엔 늘 고구마가 있었다.  어느 계절이든 아름답지만 봄빛 머금은 숲은 생동감 그 자체이다.  눈 속을 비집고 나오는 여린 꽃들과 고사리들.  햇살에 달궈진 너럭바위 등은 오수를 즐기기엔 맞춤이었다.  모내기가 끝날 무렵엔 지천으로 오디가 익어갔다.  검둥이가 돼서 히히거리던 우리의 손톱 끝은 언제나 까맸다.  여름이면 칡넝쿨로 나무와 나무를 이어 아지트를 만들기도 했다.  연보랏빛 칡꽃이 너울너울 아롱거리는 꽃문을 만들기도 했다.  가을이면 지천으로 널린 먹거리가 산에 있었다.  모든 것을 떨구어낸 겨울 숲은 경이롭다.  

나는 시인의 숲속에서 내 유년의 숲을 찾아 돌아다녔다.  잘 익은 과일처럼 곱게 늙고 싶다. 숲에서 내 일생을 마치는 날을 기약해 본다.  숲에 있지만 시인은 결코 은둔하려는 자가 아니다.  그렇게 믿는다.  “버리고 다시 시작 하지 않으면 거듭날 수 없고, 일어나 문을 열고 나가지 않으면 새로운 세상과 만나지 못한다.”고 말씀하신다. “화이부동”이라 했다.  조화를 이루고 화합하지만 똑같지 않은 상태.  제소리와 다른 소리가 어울리면서 서로를 살리는 소리.  한 소리가 다른 소리를 지배하지 않고 작은 소리가 큰 소리를 따라다니며 제소리를 잃어버리지 않아야 낼 수 있는 소리.  소리마다 제 음을 지니면서 뇌동부화하지 않아야 유려한 음악을 만들어 내듯 우리네 삶도 그렇다고 말씀하신다. 


아껴가며 읽은 마지막 장엔 서로를 어여삐 여기며 사랑하다 남편을 먼저 저세상으로 보낸 부인이 한지에다 직접 붓으로 써서 남편의 수의 속에 넣어준 편지가 소개된다.  언젠가는 다시 부부가 되어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나고 남편이 뒤에 남아 아내에게 눈물로 편지를 쓰고 그렇게 업연을 갚았기를 바라는 시인의 마음이 애상하다.

노래를 들을 때는 노래만 듣고 책을 볼 때는 책만 보고 사람을 만날 때는 오직 그 사람만 생각하며 마음 내려놓고 살고 싶다. 책 속엔 좋은 구절들이 구구절절했지만 한 단락만 옮기겠다.  나는 이렇게 늙고 싶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늘도 잘 익어가고 있을까요.  사람은 자연 속에 있게 해보면 그가 제대로 익은 사람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자연 속에서 드러나는 얼굴빛과 표정 그리고 눈빛과 행동거지를 보면 그가 얼마나 익은 사람인지를 알 수 있다고 합니다.  그대도 잘 익은 빛깔의 성숙한 과일이기를 바랍니다.”

덧글>

별을 5개 주지 않은 이유는 책의 디자인이 책의 내용과 맞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원색의 그림들을 나도 좋아지만 책의 내용과 맞지 않는 삽화들이 종종 눈에 거슬렸고 간간이 보이는 많은 여백은 그 의도가 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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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는 진보다
박민영 지음 / 포럼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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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다시 공자인가?
공자가 2,50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우리에게 하고자 하는 얘기는 무엇인가 ?
내가 던지기엔 이미 우문이 되었다.  어느새 공자와 논어에 대한 재해석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기류가 되어 있다.  중국은 현재 전통문화 부흥과 새로운 정치이념 정립의 일환으로 공자의 사상을 재평가하고 있다.  이는 급속한 경제발전으로 인한 빈부격차와 사회모순을 조화롭게 해결하기 위함으로 해석된다. 

과연 논어에는 어떤 철학이 담겨있기에 물질과 정신이라는 양대 산맥을 견인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일까?  보수의 전형과도 같은 공자를 진보라 단언하는 저자는 이렇게 운을 뗀다.
“ 논어도 2,500여 년이라는 세월의 두께만큼 무거운 권위에 짓눌린 텍스트이다.  권위는 고전을 오늘날까지 살아남게 한 힘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고전을 박제화시키는 힘이기도 하다”  박제화된 논어를 어떻게 풀어낼 것인지.  이것이 이 책의 화두이다.

우리는 인류의 3대 성인으로 예수와 붓다와 공자를 논한다.
저자의 논증에 대해 비판하기엔 기본지식이 없어 좀 벅찰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이 책은 논어를 쉽게 풀이했다.  2,500년 전의 공자가 아닌,  지금의  정치, 경제, 사회 현실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어 인문학적 논평을 읽는 느낌이 더 강했다.  꼭 공자의 사상에 빗대지 않더라도 이 책은 분명 읽을 만하다.  

저자는 제1장을 통해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공자에 대한 편견을 논어를 통해 풀이하고 있다.  제2장에서는 공자의 정치학을 소개하면서 우리시대 정치의 문제점과 군자가 나아가야할 길(道)을 제시한다.  제3장에서는 공자의 인간학, 제4장에서는 공자의 철학을 소개하고 있다. 종래의 해석과 저자의 새로운 해석으로 달리 표현하고 있는데 정확한 의도를 흘려보내면 그 말이나 이 말이나,,, 뭐,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사실 한자의 다의적 표현들을 비전문가인 내가 옳게 해석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저자는 ‘도시문명과 사회적 윤리의 탄생’이라는 서문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역사적 배경과 무관한 텍스트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논어도 마찬가지다.  공자가 살았던 시기는 성읍이라는 도시문명이 정착된 시기였다.  도시문명의 출현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소규모 사회에서 대규모 사회로 이전되는 빅뱅의 변화였다.  이때 동서양에서는 대규모 사회에 걸맞은 도덕적 덕목을 설파한 사상가들이 출현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공자, 예수, 붓다였다.  칼 야스퍼스는 이 시기를 ‘기축시대’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문명의 역사를 구동시키는 사상가들이 동양과 서양에서 동시에 출현했다는 의미였다.  공자, 예수, 붓다는 각각 인, 사랑, 자비를 설파했다.  공자, 예수, 붓다는 각기 멀리 떨어져 살았지만, ‘낯선 타인에 대한 사랑’을 주장했다는 점이 같다.”

그들의 덕목이 불변의 가치를 갖는 것은 우리가 여전히 도시적 환경에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첨언한다.  이러한 도시적 환경은 더욱 강고해지고 커져서 지역공동체의 붕괴와 생존경쟁의 심화, 기술문명으로 인한 정서의 파편화, 거대 조직 안에서 개인의 무력감, 방향을 상실한 증오와 분노가 우리를 감싸고 있어 이들의 철학이 더욱 절실해 진다는 얘기다.

네이버 검색어만 치만 주루룩 쏟아지는 논어에 대한 설명은 생략하겠다.  그리고 무엇이 오역이고 무엇이 옳은 번역인지를 논하는 것도 생략하겠다.  논어가 철학적 논리임에도 생활의 논리가 되었다고 한탄하는 것 또한 상관하고 싶지 않다. (사실, 그럴만한 역량이 나에겐 없다.) 

다만, 이 말은 꼭 하고 싶다. 

첫 번째로 군자가 나아가야할 바와 우리는 어떤 이유로 옳은 정치인을 선택할 권리를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인지 “ 子曰 其身正, 不令而行, 其身不正, 雖令不從 (그 자신이 바르면 명령하지 않아도 행하고 그 자신이 바르지 않으면 비록 명령한다 하더라도 따르지 않는다.)

두 번째로 집단의 논리가 가져다주는 사회적 파장은 무엇인지. “子曰 人之過也 各於其黨 觀過 斯知仁矣(사람의 잘못이란 각자 자기 집단에 치우쳐 있는 것이다.  이 잘못을 보는 것이 곧 인을 아는 것이다.)

세 번째는 자유로운 비판적 정신을 의미했던 子曰 君子不器 (군자는 그릇이 아니다.) 정도만 얘기하겠다.

다산의 [목민심서]의 각론에 해당하는「이전(吏典)」의 첫째 조항에서 목민관(지도자)이 지녀야 할 덕목에 공자의 다음 말을 첫머리로 인용하였다.  (束吏之本 在於律己 其身正 不令而行 其身不正 雖令不行) 간단히 말해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다는 얘기다. 

정치적 관심이 거의 무관심에 가까웠던 내가 지난 대선을 지켜보며 민주주의의 퇴보가 가져다 줄 미래의 파장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자는 나와 그 해석이 다를지 모르겠으나 저자의 글을 그대로 옮겨 보건데 ‘부도덕한 질서’에 대한 염려가 나와 비슷한 생각이지 않을까 싶다.

“사회지도층에게 어떠한 뜻과 도덕을 발견할 수 없는 사회에서 백성은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기본적인 도리를 포기하고, 대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지 하게 된다고 보았다.  그런 사회에서는 백성도 온갖 편법과 술수를 처세술로 여기고,  부도덕한 질서에 영합해 자신의 이익을 도모한다.  지배층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엄격한 규율로 백성을 다스리고 백성 역시 법망만 피할 뿐 온갖 수단을 동원해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는 것이다.

“그 자신이 바르면 명령하지 않아도 행하고 그 자신이 바르지 않으면 비록 명령한다 하더라도 따르지 않는다 其身正, 不令而行, 其身不正, 雖令不從 - 자로/6”

일반적으로 자신의 이익을 내세우는 정치인보다 선으로 포장된 정치인은 사회적으로 더욱 위험하다.  자신의 이익을 내세우는 정치인의 마음은 백성들의 눈에 보이지만, 선으로 포장된 정치인의 마음은 백성들의 마음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선으로 자신을 포장하는 정치인은 자신과 대비되는 악인을 필요로 한다.  사회악을 일소한다면서 행해지는 공포정치는 언제나 그렇게 행해져왔다.  p50

성장지상주의와 시장만능주의 아래서 과연 사회경제적 민주주의가 제대로 실현될 지 의문스럽다.  또한 검찰권에 대한 국민적 의혹을 흐지부지하는 사태까지 벌어져서는 안 된다고 본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이미 폐기된 학설까지 들먹이지 않더라도 말이다.  현실 정치의 작태를 보며 공자의 덕목을 다시 생각해 본다. 

첫 번째가 지도자상이라면 두 번째는 집단논리를 통해 나와 남 그리고 우리에 대한 생각을 해보고자 한다.  뉴스를 보고 있자면 방송 3사가 약속이라도 한 듯 똑같은 내용을 똑같은 멘트로 아나운서만 바꿔서 얘기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미디어의 생각이 곧 일반 대중의 생각이라고 생각하는 허다한 경우를 생각할 때 집단의 논리가 줄 수 있는 폐단은 실로 무서운 것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미디어를 이용한다는 건 지나가는 개도 아는 일이다.

“집단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집단의 논리’를 개발한다.  집단에서 벗어나 생활할 수 없는 인간에게 집단의 논리는 압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대부분의 인간은 몸만 집단에 소속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도 그에 소속되어 있다.  ...... 집단의 논리를 벗어나지 않고서는 인의 자리가 좀처럼 확보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집단의 논리는 주로 남과 우리를 가르고 그에 따른 차별과 배제의 원리를 기본으로 삼기 때문이다.  집단의 논리는 인간의 의식을 유치하게 만드는 가장 큰 주범이다.  ........ 공자는 “이로움에 빠져 행동하면 원망하는 일이 많아 진다”고 했다. p56

정치논리는 기본적으로 집단의 논리에 기초하고 집단의 논리는 집단의 이익에 기초한다.  깨달은 자는 어느 정도의 추종자들을 양산하지만, 그 세력이 커지면 집단의 논리를 벗어나 있는 까닭에 일종의 위험세력으로 간주되며, 권력의 희생양이 되기 쉽다.  예수는 그러한 깨달은 자의 전형적 운명을 보여준다. ............ 사회의 주류는 집단의 논리에 기초하고 있다.  깨달은 자는 아웃사이더의 운명을 가질 수밖에 없다.  p388

마지막으로 나의 마음을 끌리게 한 子曰 君子不器 (“군자는 그릇이 아니다”)를 얘기하고 싶다.  저자는 틀에 갇히지 말라는 의미로 두 가지 해석을 내 놓았다.  그 해석이 사뭇 마음에 들어 옮겨본다.  첫째.  인을 가슴에 담아두는 것만으로는 모자라며, 그것을 체현하는 경지에 올라야 한다는 의미로 ‘마음 내키는 대로 행하더라도 법도를 넘지 않는’경지이다. 

둘째는 어떠한 가치를 확고한 형태의 진리로 품지 말라는 말이다. 어떠한 가치를 확고한 것으로 여길 경우, 반드시 교조화된 형태를 보이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사상이라도 그 뜻을 취할 뿐, 그것을 절대 숭배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절대화된 가치는 다른 무수한 여타의 가치를 무시하거나 종속시킨다.  그럴 경우 뜻은 사라지고 지적 권력과 권위만 남게 된다는 것이다.  .... 공자가 자유로운 비판적 지식인의 모습을 갖출 수 있었던 것은 틀(그릇)에 얽매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틀을 만들어 생각의 자유를 가두어 둘 때가 있다.   얼마 전 코미디 프로로 인해 이런 말이 유행했다.  ‘그때그때 달라요’ 이 말의 깊은 뜻이 아마도 두 번째 의미에 있지 않나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는 곧 중용과도 이어지는 말이 아닐까 싶다.  저자는 논어의 중용에 대해서 ‘역동성’있다고 표현한다.  극단에 치우쳐 절대적 기준을 두고 선택과 배제를 일삼지 않고 상황에 따라 판단과 행동이 변화무쌍한 중용의 미를 역동성이 있다는 표현에 동감한다.  자신을 절대적인 가치로 판단하지 않고 역동성있게 표현할 때 깊은 공감을 느낄 때가 있는데 이것이 곧 중용의 미가 아닐까 싶다.  그 말이 참 마음에 든다. ‘중용의 역동성’ 공자의 중용의 미를 나타낸 말이 있는데 옮겨보면 이렇다.

“ 온화하면서도 엄격하셨고, 위엄이 있지만 사납지 않으셨으며, 공손하면서도 편안하게 대했다. ”

나에게 처음 중용의 리드미컬한 아름다움을 알게 한 것은 옥타비오 파스의 활과 리라 도입부이다. 그 후로 중용은 나에게 하나의 미덕이 되었다. 그래서 더 쉽게 공자의 중용을 받아 들였지 싶다.

간단히 소개하면 이렇다 .

 “시는 앎이고 구원이며 힘이고 포기이다.  시의 기능은 세상을 변화시킨 것이며 시적 행위는 본래 혁명적인 것이지만 정신의 수련으로서 내면적 해방의 방법이기도 하다.  시는 이 세계를 드러내면서 다른 세계를 창조한다.  시는 선택받은 자들의 빵이자 저주받은 양식이다.  시는 격리시키면서 결합시킨다.  시는 공(空)을 향한 기원이며 무(無)의 대화이다. .... 시는 우연의 소산이자 계산된 결과물이다. ”


다시 한 번 말하자면,
이 책은 굳이 논어가 아니더라도 읽어볼만한 충분한 가치를 지닌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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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의 유령
가스통 르루 지음, 성귀수 옮김 / 문학세계사 / 2001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서로 사랑한다는 것과 사랑에 집착한다는 것에 대해서 생각한다.'크리스틴과 라울은 서로가 사랑했고 에릭은 크리스틴에게 집착했다' 이렇게 표현한다면 나는 지극히 평범한 독서에 상식적인 생각을 가진 여자이겠지. 그러나 나는 오페라의 유령을 읽기 전부터 그렇게 정의 내릴 수 없는 것이 사랑이란걸 알고 있다. 나도 사랑을 해봤고..., 집착스럽게 오랜 시간을 그리워 해봤고 어느 순간 새록거리는 사랑에 눈멀었기 때문에, 사랑의 고통을 그저 집착이라고 말하기엔 얼마나 가엾은 것인가? (크리스틴이 에릭에게 품었던 마음처럼)

오페라의 유령은 에릭이다. 그는 실제 유령이 아니라 유령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가진 인간이다. 혐오스러운 얼굴로 세상사람들을 회피했고 절대적 사랑을 받아야할 부모로부터 버림받아 천재적 재능에도 불구하고 오페라 극장의 지하에 침거하면서 그가 사랑한 크리스틴을 향한 헌신적인 사랑은 광적인 행동을 이끌어낸다. 그의 과도한 사랑과 크리스틴과 멋진 귀족청년 라울의 사랑. 받지 못하는 사랑에 재앙을 퍼붓는 에릭. 그는 광분한 가엾은 한 인간에 불과하다.

그는 어쩌면 가장 솔직한 인간의 유형을 가진 자이다. 분노함에 격분할 줄 알고 사랑함에 광적일 줄 알고 놓아줌에 과감할 줄 아는. 평생을 어두운 지하 속에서도 가면을 쓰고 다닐 수밖에 없는 인간의 콤플렉스로 똘똘 뭉쳐진 유형이지만 그는 분명 한 여자를 사랑했고 그 사랑에 단순할 정도의 순진성을 보이는 한 남자에 불과한 것이다. 사랑함에 요령 같은 건 없다. 그저 치닫는 사랑에 충실할 뿐이며 헌신할 뿐이다. 그러나 그가 가진 가장 큰 단점은 콤플렉스를 극복하지 못함에 있다. 가엾은 에릭.

거기에 비해 라울은 유약하기 그지없다. 귀족이라는 신분부터가 여자로 하여금 보호본능을 갖게 만든다. 날 정말 사랑하냐고 묻는 라울은 '만약 에릭이 잘생긴 사람이었다 하여도 그래도 날 사랑할 것인가'라고 묻는다. 겨우 생각한다는 게 생긴 것이라니..., 크리스틴이 오래 전부터 마음에 품고 있었던 사랑이 아니었다면 라울은 용서받지 못할 생각을 하는 멍청한 귀족청년임에 틀림없었을 것이다. 그의 행동은 유약하고 그의 말은 의심에 차 있으며 그의 발걸음엔 두려움이 있다. 그 질문에 크리스틴은 이렇게 말한다. '이런 딱한 사람 같으니.... 왜 운명을 두고 저울질을 하는 거죠? 마치 죄를 감추듯이 내 의식 저 밑에 감추어둔 것을 굳이 들추어내려는 의도가 대체 뭐예요?' 라고.

세기를 막론하고 우리 삶은 삼각관계 속에 있다. 그래서 갈등구조가 형성되는 것이고 그로인해 간절해지는 것이고 고민하는 속에서 삶은 아이러니하게도 활기를 찾게 되는 것이다. 아름다운 여인 크리스틴은 에릭이 가엾은 인간임을 안다.

사랑받길 원했던 남자 에릭. 어느 누구와도 다를 게 없어 보이는 가면도 새로 만들었어. 이젠 아무도 힐끔거리지 않을 거야.... 당신은 이 세상 누구보다도 행복한 여자가 될 거라구.... 그리고 우리는 둘이 함께 둘만을 위해서 죽도록 노래를 부르겠지.... 오, 당신은 우는군..... 나를 두려워하고 있어.... 하지만 나는 속까지 그렇게 나쁜 인간은 아니야! 나를 한번 사랑해봐, 그럼 알게 될거야.... 나도 사랑만 받는다면 얼마든지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어. 당신이 날 사랑만 해준다면, 나는 양처럼 온순해질 거야... 당신이 바라는 대로 뭐든 될 거라구...'

에릭은 크리스틴이 라울을 사랑한다는 사실 앞에서 납치할 정도의 집착을 보이지만 끝내 가면을 버리고 크리스틴을 라울에게 보낸다. 정말 사랑할 줄 아는 자라면 상대가 행복해지길 원하는 것이리라. 가려야할 그 무언가가 있다면 그 이상의 것들은 이미 현실이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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