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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는 진보다
박민영 지음 / 포럼 / 2008년 1월
평점 :
절판
왜 다시 공자인가?
공자가 2,50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우리에게 하고자 하는 얘기는 무엇인가 ?
내가 던지기엔 이미 우문이 되었다. 어느새 공자와 논어에 대한 재해석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기류가 되어 있다. 중국은 현재 전통문화 부흥과 새로운 정치이념 정립의 일환으로 공자의 사상을 재평가하고 있다. 이는 급속한 경제발전으로 인한 빈부격차와 사회모순을 조화롭게 해결하기 위함으로 해석된다.
과연 논어에는 어떤 철학이 담겨있기에 물질과 정신이라는 양대 산맥을 견인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일까? 보수의 전형과도 같은 공자를 진보라 단언하는 저자는 이렇게 운을 뗀다.
“ 논어도 2,500여 년이라는 세월의 두께만큼 무거운 권위에 짓눌린 텍스트이다. 권위는 고전을 오늘날까지 살아남게 한 힘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고전을 박제화시키는 힘이기도 하다” 박제화된 논어를 어떻게 풀어낼 것인지. 이것이 이 책의 화두이다.
우리는 인류의 3대 성인으로 예수와 붓다와 공자를 논한다.
저자의 논증에 대해 비판하기엔 기본지식이 없어 좀 벅찰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이 책은 논어를 쉽게 풀이했다. 2,500년 전의 공자가 아닌, 지금의 정치, 경제, 사회 현실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어 인문학적 논평을 읽는 느낌이 더 강했다. 꼭 공자의 사상에 빗대지 않더라도 이 책은 분명 읽을 만하다.
저자는 제1장을 통해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공자에 대한 편견을 논어를 통해 풀이하고 있다. 제2장에서는 공자의 정치학을 소개하면서 우리시대 정치의 문제점과 군자가 나아가야할 길(道)을 제시한다. 제3장에서는 공자의 인간학, 제4장에서는 공자의 철학을 소개하고 있다. 종래의 해석과 저자의 새로운 해석으로 달리 표현하고 있는데 정확한 의도를 흘려보내면 그 말이나 이 말이나,,, 뭐,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사실 한자의 다의적 표현들을 비전문가인 내가 옳게 해석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저자는 ‘도시문명과 사회적 윤리의 탄생’이라는 서문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역사적 배경과 무관한 텍스트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논어도 마찬가지다. 공자가 살았던 시기는 성읍이라는 도시문명이 정착된 시기였다. 도시문명의 출현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소규모 사회에서 대규모 사회로 이전되는 빅뱅의 변화였다. 이때 동서양에서는 대규모 사회에 걸맞은 도덕적 덕목을 설파한 사상가들이 출현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공자, 예수, 붓다였다. 칼 야스퍼스는 이 시기를 ‘기축시대’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문명의 역사를 구동시키는 사상가들이 동양과 서양에서 동시에 출현했다는 의미였다. 공자, 예수, 붓다는 각각 인, 사랑, 자비를 설파했다. 공자, 예수, 붓다는 각기 멀리 떨어져 살았지만, ‘낯선 타인에 대한 사랑’을 주장했다는 점이 같다.”
그들의 덕목이 불변의 가치를 갖는 것은 우리가 여전히 도시적 환경에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첨언한다. 이러한 도시적 환경은 더욱 강고해지고 커져서 지역공동체의 붕괴와 생존경쟁의 심화, 기술문명으로 인한 정서의 파편화, 거대 조직 안에서 개인의 무력감, 방향을 상실한 증오와 분노가 우리를 감싸고 있어 이들의 철학이 더욱 절실해 진다는 얘기다.
네이버 검색어만 치만 주루룩 쏟아지는 논어에 대한 설명은 생략하겠다. 그리고 무엇이 오역이고 무엇이 옳은 번역인지를 논하는 것도 생략하겠다. 논어가 철학적 논리임에도 생활의 논리가 되었다고 한탄하는 것 또한 상관하고 싶지 않다. (사실, 그럴만한 역량이 나에겐 없다.)
다만, 이 말은 꼭 하고 싶다.
첫 번째로 군자가 나아가야할 바와 우리는 어떤 이유로 옳은 정치인을 선택할 권리를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인지 “ 子曰 其身正, 不令而行, 其身不正, 雖令不從 (그 자신이 바르면 명령하지 않아도 행하고 그 자신이 바르지 않으면 비록 명령한다 하더라도 따르지 않는다.)
두 번째로 집단의 논리가 가져다주는 사회적 파장은 무엇인지. “子曰 人之過也 各於其黨 觀過 斯知仁矣(사람의 잘못이란 각자 자기 집단에 치우쳐 있는 것이다. 이 잘못을 보는 것이 곧 인을 아는 것이다.)
세 번째는 자유로운 비판적 정신을 의미했던 子曰 君子不器 (군자는 그릇이 아니다.) 정도만 얘기하겠다.
다산의 [목민심서]의 각론에 해당하는「이전(吏典)」의 첫째 조항에서 목민관(지도자)이 지녀야 할 덕목에 공자의 다음 말을 첫머리로 인용하였다. (束吏之本 在於律己 其身正 不令而行 其身不正 雖令不行) 간단히 말해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다는 얘기다.
정치적 관심이 거의 무관심에 가까웠던 내가 지난 대선을 지켜보며 민주주의의 퇴보가 가져다 줄 미래의 파장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자는 나와 그 해석이 다를지 모르겠으나 저자의 글을 그대로 옮겨 보건데 ‘부도덕한 질서’에 대한 염려가 나와 비슷한 생각이지 않을까 싶다.
“사회지도층에게 어떠한 뜻과 도덕을 발견할 수 없는 사회에서 백성은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기본적인 도리를 포기하고, 대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지 하게 된다고 보았다. 그런 사회에서는 백성도 온갖 편법과 술수를 처세술로 여기고, 부도덕한 질서에 영합해 자신의 이익을 도모한다. 지배층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엄격한 규율로 백성을 다스리고 백성 역시 법망만 피할 뿐 온갖 수단을 동원해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는 것이다.
“그 자신이 바르면 명령하지 않아도 행하고 그 자신이 바르지 않으면 비록 명령한다 하더라도 따르지 않는다 其身正, 不令而行, 其身不正, 雖令不從 - 자로/6”
일반적으로 자신의 이익을 내세우는 정치인보다 선으로 포장된 정치인은 사회적으로 더욱 위험하다. 자신의 이익을 내세우는 정치인의 마음은 백성들의 눈에 보이지만, 선으로 포장된 정치인의 마음은 백성들의 마음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선으로 자신을 포장하는 정치인은 자신과 대비되는 악인을 필요로 한다. 사회악을 일소한다면서 행해지는 공포정치는 언제나 그렇게 행해져왔다. p50
성장지상주의와 시장만능주의 아래서 과연 사회경제적 민주주의가 제대로 실현될 지 의문스럽다. 또한 검찰권에 대한 국민적 의혹을 흐지부지하는 사태까지 벌어져서는 안 된다고 본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이미 폐기된 학설까지 들먹이지 않더라도 말이다. 현실 정치의 작태를 보며 공자의 덕목을 다시 생각해 본다.
첫 번째가 지도자상이라면 두 번째는 집단논리를 통해 나와 남 그리고 우리에 대한 생각을 해보고자 한다. 뉴스를 보고 있자면 방송 3사가 약속이라도 한 듯 똑같은 내용을 똑같은 멘트로 아나운서만 바꿔서 얘기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미디어의 생각이 곧 일반 대중의 생각이라고 생각하는 허다한 경우를 생각할 때 집단의 논리가 줄 수 있는 폐단은 실로 무서운 것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미디어를 이용한다는 건 지나가는 개도 아는 일이다.
“집단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집단의 논리’를 개발한다. 집단에서 벗어나 생활할 수 없는 인간에게 집단의 논리는 압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대부분의 인간은 몸만 집단에 소속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도 그에 소속되어 있다. ...... 집단의 논리를 벗어나지 않고서는 인의 자리가 좀처럼 확보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집단의 논리는 주로 남과 우리를 가르고 그에 따른 차별과 배제의 원리를 기본으로 삼기 때문이다. 집단의 논리는 인간의 의식을 유치하게 만드는 가장 큰 주범이다. ........ 공자는 “이로움에 빠져 행동하면 원망하는 일이 많아 진다”고 했다. p56
정치논리는 기본적으로 집단의 논리에 기초하고 집단의 논리는 집단의 이익에 기초한다. 깨달은 자는 어느 정도의 추종자들을 양산하지만, 그 세력이 커지면 집단의 논리를 벗어나 있는 까닭에 일종의 위험세력으로 간주되며, 권력의 희생양이 되기 쉽다. 예수는 그러한 깨달은 자의 전형적 운명을 보여준다. ............ 사회의 주류는 집단의 논리에 기초하고 있다. 깨달은 자는 아웃사이더의 운명을 가질 수밖에 없다. p388
마지막으로 나의 마음을 끌리게 한 子曰 君子不器 (“군자는 그릇이 아니다”)를 얘기하고 싶다. 저자는 틀에 갇히지 말라는 의미로 두 가지 해석을 내 놓았다. 그 해석이 사뭇 마음에 들어 옮겨본다. 첫째. 인을 가슴에 담아두는 것만으로는 모자라며, 그것을 체현하는 경지에 올라야 한다는 의미로 ‘마음 내키는 대로 행하더라도 법도를 넘지 않는’경지이다.
둘째는 어떠한 가치를 확고한 형태의 진리로 품지 말라는 말이다. 어떠한 가치를 확고한 것으로 여길 경우, 반드시 교조화된 형태를 보이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사상이라도 그 뜻을 취할 뿐, 그것을 절대 숭배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절대화된 가치는 다른 무수한 여타의 가치를 무시하거나 종속시킨다. 그럴 경우 뜻은 사라지고 지적 권력과 권위만 남게 된다는 것이다. .... 공자가 자유로운 비판적 지식인의 모습을 갖출 수 있었던 것은 틀(그릇)에 얽매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틀을 만들어 생각의 자유를 가두어 둘 때가 있다. 얼마 전 코미디 프로로 인해 이런 말이 유행했다. ‘그때그때 달라요’ 이 말의 깊은 뜻이 아마도 두 번째 의미에 있지 않나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는 곧 중용과도 이어지는 말이 아닐까 싶다. 저자는 논어의 중용에 대해서 ‘역동성’있다고 표현한다. 극단에 치우쳐 절대적 기준을 두고 선택과 배제를 일삼지 않고 상황에 따라 판단과 행동이 변화무쌍한 중용의 미를 역동성이 있다는 표현에 동감한다. 자신을 절대적인 가치로 판단하지 않고 역동성있게 표현할 때 깊은 공감을 느낄 때가 있는데 이것이 곧 중용의 미가 아닐까 싶다. 그 말이 참 마음에 든다. ‘중용의 역동성’ 공자의 중용의 미를 나타낸 말이 있는데 옮겨보면 이렇다.
“ 온화하면서도 엄격하셨고, 위엄이 있지만 사납지 않으셨으며, 공손하면서도 편안하게 대했다. ”
나에게 처음 중용의 리드미컬한 아름다움을 알게 한 것은 옥타비오 파스의 활과 리라 도입부이다. 그 후로 중용은 나에게 하나의 미덕이 되었다. 그래서 더 쉽게 공자의 중용을 받아 들였지 싶다.
간단히 소개하면 이렇다 .
“시는 앎이고 구원이며 힘이고 포기이다. 시의 기능은 세상을 변화시킨 것이며 시적 행위는 본래 혁명적인 것이지만 정신의 수련으로서 내면적 해방의 방법이기도 하다. 시는 이 세계를 드러내면서 다른 세계를 창조한다. 시는 선택받은 자들의 빵이자 저주받은 양식이다. 시는 격리시키면서 결합시킨다. 시는 공(空)을 향한 기원이며 무(無)의 대화이다. .... 시는 우연의 소산이자 계산된 결과물이다. ”
다시 한 번 말하자면,
이 책은 굳이 논어가 아니더라도 읽어볼만한 충분한 가치를 지닌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