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언제 이 숲에 오시렵니까 - 도종환의 산에서 보내는 편지
도종환 지음 / 좋은생각 / 2008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을 읽는 동안 내내 겨울하늘은 어두웠고 간혹 눈발을 날리기도 했다.
어느 날은 빗방울이 내리기도 했다.  내 집 앞 숲 속에 나무들은 바람에 흔들리기도 하고 내리는 눈을 머리위에 이고 있다가 온전히 비를 맞으며 떨어내기도 한다.  시인의 숲을 읽는 동안 내 숲에도 꽃이 피고 비가 내리고 눈이 온다.  나비가 사랑을 하고 새로운 싹이 움트고 따뜻한 장작나무 군불이 지펴진다.  들국화 꽃무리 속에서 나비잠이 들었다가 코스모스 꽃그늘 아래서는 꽃이 어른거려 깊이 잠들지 못하는 노루잠을 잤다가 억새밭 사이에 누워 여윈잠에 들기도 한다.  가을 한낮의 다디단 쪽잠도 좋다.  언제든지 더 험한 벌판으로 내팽개칠 수 있다는 걸 알려주는 겨울에 감사하며 차가운 새벽빛에 이마를 씻는 시인의 나지막한 음성.  시인은 산방 문을 열어 놓고 누군가를 기다리며 치유의 숲에 오라고 한다.

그리곤 한 없이 내 유년의 숲으로 나를 이끌고 내 어미의 지린 가랑이 사이에서 들던 단잠을 기억나게 하고 매서운 겨울바람을 뚫고 찾아 가던 친구의 숲 속 집을 생각나게 한다. 알몸을 한 11월의 산들을 기억하게 하고 누군가 그리워하는 내 마음을 엿보게도 한다.

요즘에 난 내가 도통 마음에 들지 않다.  나를 자학해야하는 그 괴로움은 가족에게 양도되어 서로를 괴롭힌다.  내 마음의 문제라고만 하기엔 골이 깊어져 이대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해결책은 막연하기만 하다.  거울을 보기가 두려울 정도로 침울한 내 표정들 ‘잘 익은 빛깔의 성숙한 과일’이기를 그렇게 늙어 가기를 원했던 나는 어디에 있는가?

시인의 품 같은 그 숲에 나를 부려놓고 싶다.  아니면 시인의 숲에서 내 유년의 기억들이 나를 치유해 주길 바란다.  오롯이 나를 찾을 수 있는 여행을 떠난다.  발이 갈 수 없는 그곳을 마음으로...., 

내 유년의 숲은 놀이터였고 먹거리 가득한 식탁이었고 꿈꾸기 좋은 푹신한 목화솜이불이었다.  진달래 무성한 산마루를 넘어서 찾아가는 친구의 집엔 늘 고구마가 있었다.  어느 계절이든 아름답지만 봄빛 머금은 숲은 생동감 그 자체이다.  눈 속을 비집고 나오는 여린 꽃들과 고사리들.  햇살에 달궈진 너럭바위 등은 오수를 즐기기엔 맞춤이었다.  모내기가 끝날 무렵엔 지천으로 오디가 익어갔다.  검둥이가 돼서 히히거리던 우리의 손톱 끝은 언제나 까맸다.  여름이면 칡넝쿨로 나무와 나무를 이어 아지트를 만들기도 했다.  연보랏빛 칡꽃이 너울너울 아롱거리는 꽃문을 만들기도 했다.  가을이면 지천으로 널린 먹거리가 산에 있었다.  모든 것을 떨구어낸 겨울 숲은 경이롭다.  

나는 시인의 숲속에서 내 유년의 숲을 찾아 돌아다녔다.  잘 익은 과일처럼 곱게 늙고 싶다. 숲에서 내 일생을 마치는 날을 기약해 본다.  숲에 있지만 시인은 결코 은둔하려는 자가 아니다.  그렇게 믿는다.  “버리고 다시 시작 하지 않으면 거듭날 수 없고, 일어나 문을 열고 나가지 않으면 새로운 세상과 만나지 못한다.”고 말씀하신다. “화이부동”이라 했다.  조화를 이루고 화합하지만 똑같지 않은 상태.  제소리와 다른 소리가 어울리면서 서로를 살리는 소리.  한 소리가 다른 소리를 지배하지 않고 작은 소리가 큰 소리를 따라다니며 제소리를 잃어버리지 않아야 낼 수 있는 소리.  소리마다 제 음을 지니면서 뇌동부화하지 않아야 유려한 음악을 만들어 내듯 우리네 삶도 그렇다고 말씀하신다. 


아껴가며 읽은 마지막 장엔 서로를 어여삐 여기며 사랑하다 남편을 먼저 저세상으로 보낸 부인이 한지에다 직접 붓으로 써서 남편의 수의 속에 넣어준 편지가 소개된다.  언젠가는 다시 부부가 되어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나고 남편이 뒤에 남아 아내에게 눈물로 편지를 쓰고 그렇게 업연을 갚았기를 바라는 시인의 마음이 애상하다.

노래를 들을 때는 노래만 듣고 책을 볼 때는 책만 보고 사람을 만날 때는 오직 그 사람만 생각하며 마음 내려놓고 살고 싶다. 책 속엔 좋은 구절들이 구구절절했지만 한 단락만 옮기겠다.  나는 이렇게 늙고 싶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늘도 잘 익어가고 있을까요.  사람은 자연 속에 있게 해보면 그가 제대로 익은 사람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자연 속에서 드러나는 얼굴빛과 표정 그리고 눈빛과 행동거지를 보면 그가 얼마나 익은 사람인지를 알 수 있다고 합니다.  그대도 잘 익은 빛깔의 성숙한 과일이기를 바랍니다.”

덧글>

별을 5개 주지 않은 이유는 책의 디자인이 책의 내용과 맞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원색의 그림들을 나도 좋아지만 책의 내용과 맞지 않는 삽화들이 종종 눈에 거슬렸고 간간이 보이는 많은 여백은 그 의도가 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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