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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의 여행자 - 손미나의 도쿄 에세이
손미나 지음 / 삼성출판사 / 2008년 2월
평점 :
품절
“어느 날 아침 눈을 뜨고 귀를 기울여 들어보니 어디선가 멀리서 북소리가 들려왔다. 아득히 먼 곳에서, 아득히 먼 시간 속에서 그 북소리는 울려왔다. 아주 가냘프게. 그리고 그 소리를 듣고 있는 동안, 나는 왠지 긴 여행을 떠나야만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먼 북소리』 중에서)
그 소리를 연모한 그녀는 스페인으로 떠났다. 그렇게 돌아 온 그녀는 KBS 아나운서라는 직함에 사표를 던지고 여행전문가로 변신한다. 그런 그녀가 다시 펴낸 두 번째 여행기록... 도쿄 에세이.
여기서도 하루키는 어김없이 그녀의 여행에 동기자가 되어준다.
“4월의 어느 해맑은 아침, 하라주쿠의 뒤안길에서 나는 내게 100퍼센트 완벽한 여자 아이와 스쳐 지나간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4월의 어느 해맑은 아침, 100퍼센트의 여자 아이를 만나는 일에 관하여』 첫 문장)
이 소설을 읽고서 하지 않으면 못 견딜 또 한 가지가 바로 하라주쿠에 가보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인생의 빛나는 순간에 가슴을 통째로 뒤흔든 감동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퇴색되지 않는가 보다.”며 하루키를 기억하는 그녀. 난 너무 하루키를 늦게 만난 것일까? 먼북소리를 읽으며 지루함을 느끼던 나를 지금도 기억하니 말이다.
짧다면 짧은 여행을 (스페인은 1년이었으나, 도쿄는 여름 한철이었으니) 이렇게 긴 문장으로 만들어 내는 그녀의 능력(?)은 ‘하루키와 비슷하다’라는 생각을 했다. 우선은 책이 무척 독특하다. 소박한 표지와는 달리 그 안은 정말 ‘일본’스럽다. 현란한 그림들과 사진들. ‘스페인 너는 자유다’를 읽으며 느꼈던 감동과도 사뭇 다르다. 글의 비워진 부분들을 사진이 채웠다라는 억지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전작에 미치지 못하는 후작은 더 큰 작품을 만들어 내는 거름이 되기도 하고 때론, 전작을 이겨내지 못하고 피그르르 말라 가기도 하지만 내가 느낀 그녀는 분명 월척을 들고 다시 나타나리라. 그러기 위해서는 절대 서둘러서는 안 되리라는 생각이 이 책을 읽는 솔직한 마음이다. 그럼에도 내가 만약 도쿄에 간다면 이 책을 들고 갈 것이다. 그녀만의 여행 감각이 나에게 전염돼 나도 이런 용기를 혹시나 갖지 않을까 하는 ‘혹시나’의 기대감 때문이다.
일본에 대해 관대해 지기는 참으로 어렵다. 오랜 역사의 화인이 몸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어 머리보다 몸이 더 먼저 거부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고리타분한 몸을 가지고 도쿄를 여행하기가 얼마나 복장터지겠는가? ‘역시나’하며 돌아올지도 모르겠지만 그녀의 푸릇한 물고기의 팔딱거림은 바다에 건져지면 제 성질에 못 이겨 바로 죽어버린다는 갈치나 새우 같은 나에게 어항 속에서도 싱싱한 활어 같은 질긴 생명력을 줄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도쿄를 빛나게 해주는 많은 이들 중에서 그녀의 친구인 류이치와 하키코 부부는 그녀가 묻는 결혼 선배로서의 조언에 이런 말을 해준다.
"결혼생활에서는 무엇보다 서로의 차이점을 인정하는 일이 가장 중요해.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서 두 가지를 융합시켜 새로운 문화를 만드는 과정이 바로 결혼인 것 같아. 남편의 습관과 문화를 존중해주면서 동시에 자신의 주장을 확실히 펴는 것도 아주 중요해. 한쪽이 다른 한쪽에게 끌려가거나 상대를 무시하면 행복할 수가 없어. 그 과정을 잘 밟을 수 있다면 다음에는 서로의 차이점이 더 재미있을 수 있을 거야. 한국과 일본도 마찬가지잖아? 서로의 문화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하면 더 좋은 사이가 될 수 있겠지."
‘서로를 인정해 주고 존중해 주는 좋은 사이’를 우리가 늘상 강조해야만 하는 일본. 저자는 ‘마음을 홀딱 빼앗기기’도 하고 ‘꿈만 같기도’ 하다는 일본이 그 만큼 실감나지 않는 이유가 무언지 나는 분명 도쿄에 가봐야 할 것이다. 그 실제를 보기위해. 그래서 하라주쿠의 꽃가게도 찾아보고 신주쿠 탐험도 해보고 아사쿠사의 리키샤도 체험해 보고 새벽의 츠키지 시장도 돌아보고 싶다. 야나카에서 길을 잃어도 좋으리라.
그녀가 소개한 값진 선물이 또 하나 있으니 오키나와 할머니와의 만남이다.
“친구가 되는데 나이가 무슨 상관이 있어. 난 내가 몇 살인지 자꾸 잊어버려..... 올해부터는 한 해에 한 가지씩 새로운 도전을 하려고 해. 사실 난 올 겨울에 이 다이버 친구들과 따뜻한 나라로 여행을 떠날 거야. 그것 때문에 요즘 너무 설레서 잠이 다 안 온다니까. 거기서 스쿠버 다이빙을 할 계획이야.....” 일흔넷의 나이에 처음으로 스쿠버 다이빙에 도전하다니. 오키나와산 야채 말고 할머니가 젊음을 유지하는 또 하나의 비결이 있다면? “그거야 물론 앞만 보고 가는 거지. 인생은 무조건 앞만 보고 가야 하는 거야. 난 한 번도 후회 따위는 해본 적 없다고. 앞만 보고 가면서 매순간 최선을 다하는 거야.”
.... 왠지 그 사람을 닮고 싶다고 소망하게 만드는, 어느 날 문득 그 사람을 잠시나마 마주할 수 있었다는 사실 만으로도 주책없이 눈물이 핑 돌게 하는.... 그녀에게 할머니는 그랬고 나에게도 그렇다. 저자와 너무 잘 어울리는 할머니의 철학이 밑줄 긋게 만든다. 앞만 보고 간다는 그 말이 이렇게 멋지게 들릴 줄이야. 그녀가 건져 올려준 싱싱한 도쿄를 먼지 쌓이게 두지 않고 가까운 날에 태양을 들이마시는 기분으로 가고 싶다.
마지막으로 그녀의 여행 철칙을 옮겨본다. 분명 본받고 싶은 여행 덕목이기에. 더불어 즐기는 자의 여유가 숨 쉬고 있기에.
『 여행을 떠날 때는 모든 현실을 접어두고 새로운 세상에 흠뻑 젖어들 것이며 여행을 끝마칠 때는 다시 모든 것을 그곳에 두고 완벽하게 현실로 돌아가자는 것이 나만의 여행 철칙이다. ..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이야기하는 낯선 차림의 사람들 속에 서 있는 순간, 현실 속의 나를 잊고 이방인으로서 한없는 자유를 누림과 동시에 철저히 나 자신일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지는 ‘여행’ 』 p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