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으로 꼭 알아야 할 세계의 명화
사토 아키코 지음, 박시진 옮김 / 삼양미디어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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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은 나에게 허기짐이다.

너무 늦게 만난 사랑에 열병을 앓아야하는 중년의 애달픔이다.

그 사랑은 세련되지 못하여 찌질찌질 문 밖에 서서 혼자 애타는 날이 더 많다.




언제부터였을까?  문 밖에 서서 비를 맞기 시작한때가.

르네상스를 꽃피웠다는 피렌체의 거리를 종횡무진 걷기 시작할 때였을까?

2시간을 줄서서 기다렸던 바티칸의 산피에트로 대성당에서였을까?

루브르에서 내 몸과 눈을 한 눈에 빼앗아 버린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을 본 순간이었을까? 

제우스가 황금소나기로 변신해 다나에와 사랑을 나누었던 것처럼 정말 순간이었다.

그랬음에도 난 늘 그 소나기에 젖어 안개처럼 축축하다.

그 사랑은 깊고도 치명적인 것이어서 독은 온몸에 퍼져 죽을 때까지 날 취하게 할 것임을 안다.  그것이 오랜 사랑에 대한 나의 습성이다. 




그래서 잘 만들어진 미술책을 만나면 가까이에 두고 오랫동안 매만지고 펼쳐보고 쓰다듬는다.  그럼에도 여전히 미술은 나에게 미궁이다.  그냥 그게 좋다.  미궁 속을 헤매고 나오는 느낌.  그래야 그 미궁 속을 처음인냥 다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이 책은 펼쳐보는 재미가 있을 듯하다. 

정돈된 듯한 내 머리를 다시 흩어놓는 재주도 지녔다. 그리고 다시 조립시킨다. 

신화와 종교의 세계, 미술사의 전환점을 이룬 화가들, 역사와 인간의 삶의 표현한 화가들, 독창적인 색체와 형식이 압도적인 그림들 등. 이렇게 분류된 그림들은 화가들이 다시 겹쳐지기도 한다.  미궁으로 다시 빠져들기엔 안성맞춤이다. 




난 잘생긴 남자에게 약하다.  모딜리아니가 그런 화가다.  그런데 모딜리아니는 매력적인 여자에게 약했던 모양이다.  그가 그린 여자들의 얼굴을 오래 보고 있자면 여성다움보다는 묘한 고집스러움과 강한 흡인력이 느껴진다.  그래서 그가 그린 여자들이 더 좋다.




루벤스의 ‘수잔나 푸르망의 초상’에서는 여자를 수줍게 하는 화가의 눈빛이 느껴진다. 루벤스가 점잖은 신사였다고 표현하고 있지만 그의 그림 속에선 상기된 유혹이 있다. (이건 순전히 아마추어에 불과한 나의 느낌에 불과하니 믿을 바가 못 됨을 첨언하다.)

  

프리다 칼로의 그림은 고통스럽다.  그림 속 고통 속에는 진실이 담겨져 있어 용기를 갖게 한다. 그녀는 마지막 작품 ‘수박을 그린 정물화’에 “인생 만세”라는 글귀를 남긴다.  모든 생에 최선을 다했던 그녀다운 열정이다.




클림트의 ‘다나에’ 같은 관능적인 그림 앞에선 묘한 격정을 느낀다.  다나에의 서양적 관능미  사이사이 그 물방울(?)의 문향은 동양적 느낌을 준다.  그 동양적 느낌이 그림을 더욱 에로틱하게 만든다.




“나에 대해 알고 싶다면 겉만 보면 된다.  그것이 나다.  내면에는 아무것도 감추고 있지 않다.” 라고 말한 앤디 워홀은 얼마나 단백한가.

모네를 눈멀게 한 그 빛에서는 꽃향기가 난다.  죽음을 부르는 수련의 달콤 쌉싸름한 향.

몬드리안의 그림은 여전히 해독하기 어려운 모스부호 같다.

뭉크의 그림은 너무 슬프다.




이 많은 남자와 여자를 사랑한다.  그들이 일생을 두고 그렸던 그림들을 사랑한다. 나는 나의 사랑이 아직 턱없이 모자람을 안다.  그래서 가까이 두고 오래 사랑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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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워드 진 살아있는 미국역사 - 신대륙 발견부터 부시 정권까지, 그 진실한 기록
하워드 진.레베카 스테포프 지음, 김영진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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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찬일색인 한 부자가 있다.  그가 잘해서가 아니라 그가 가진 권력이 무서워 섣불리 딴지  걸지 못하는 것이다.  밉보여서 좋을 것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그가 하는 일은 다 진리고 그럴 듯한 참말이 되고 마는 것이다.  명분은 옳으나 왠지 뒤가 구린 상황에서도 범부는 뭐가 구린지 판단이 흐려지고 만다.  한마디로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 못한단 말이다.  저 거대하고 아름다운 나라 미국에 대해 똥 싸고 밑 안 딱은 기분이 있었다면 이 책을 일어보라.  ‘하워드 진의 살아있는 미국역사’.  이 책의 원제목은 ‘미국 민중사’이다.  없고 배고픈 민중의 삶이 고달프지 않은 나라가 어디 있겠는가?  1970년 전태일이 온 몸에 불을 붙여가며 얻어낸 노동조합의 설립.  그러나 위정자들의 이중적 변주곡에 여전히 헛물만 들이켜는 여전히 고단한 민중의 삶.  우리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저 빛나는 세계 최강대국 미국에도 있다.  더 큰 문제는 그들이 세계를 무대로 착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누군가 봉기하지 않으면 여전히 계속될 무력의 힘.  견제할 자 누구인가?  애가 탄다.

근묵자흑, 가제는 게편이라.  빌붙어먹고 살자니 없는 자는 여전히 힘겹고 고달프기만 하다.




민중의 삶을 얘기하고자 한 하워든 진에게 영웅(사람들을 감탄하게 할)은 이런 사람들이다.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 - 콜럼버스가 바하마 제도에서 마주친 인디언들에게 행했던 폭력을 폭로했기 때문이다.  체로키 인디언들 - 원래 살던 땅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 저항했기 때문.  마크 트웨인 -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필리핀에서 수백 명을 학살한 장군을 칭찬하자 과감히 비판하고 나섰기 때문.  헬렌 켈러 -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미국의 젊은이들을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도살장으로 보내기로 결정한 것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그에게 영웅은 이런 사람들이다.  리더십을 강요하며 남의 약점이나 노리라고 말하는 자들보다 훨씬 용기 있는 멋진 사람들이다. 




진보사학자인 하워드 진이 말하는 역사란 ‘과거의 숨겨진 단면들, 권력에 대한 저항, 단합할 수 있다는 사실을 통해 미래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  역사란 단순히 발생했던 사실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었던 뒷말줄임표에 비하면 똑 부러진다.




이 책은 모두 4부로 나누어져 있다.

제 1부에는 『정복과 차별의 역사가 시작되다』로,

우리가 흔히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했다라고 무심코 배우는 말에 딴지를 건다.  여기서 ‘발견’이 아니라 ‘침략’이라고 단언한다.  콜럼버스에게 손을 내밀어 도와주고자한 아라와크족에게 총.칼을 겨누고 그들을 유럽의 노예시장에 팔아넘기는 만행을 저지른 것이다.  그뿐인가?  스페인의 정복자들은 멕시코지역의 아스텍 문명과 남아메리카의 잉카 문명이 유럽과 다름없는 역사와 문학이 번화한 곳이었음에도 미개하다며 ‘진보’라는 이름으로 파멸시킨다.  여기서 우리가 진보와 발전이라는 미명하에 쉽게 부숴버린 우리의 전통을 한번쯤 되돌아 볼 일이다.  이들의 ‘정복’과 ‘차별’속에는 흑인 노예와 하층계급들 인디언과 농부들 그리고 여성들이 있었다.  그리고 정복자들은 이들의 단합된 반란을 두려워해 정책적인 이간질로 분리시키려 했음을 얘기한다.




제 2부에는 『멈추지 않는 팽창 야욕의 시계』로

땅이 특정 개인의 소유라는 개념자체가 없는 인디언들에게 속임수로 사들인 후 땅 투기를 시작하는 앤드루 잭슨 등의 위정자들의 행태에서부터 서부개척이라는 이름으로 변방으로 몰리는 민중들과 남북전쟁을 통한 노예해방의 숨은 이야기, ‘제국의 취향’이라 명해진 쿠바, 필리핀, 베트남에 대한 전쟁 등을 폭로하고 있다.




에이브러햄 링컨이 노예해방보다는 남부를 연방에 복귀시키기에 위한 정치적 선택이었음을 어떤 기자의 답변을 통해 증언하고 있다.  그 내용은 이러하다.

“이 분쟁에서 저의 궁극적인 목표는 어디까지나 연방을 보존하는 것이지 노예제를 유지하거나 폐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노예를 해방시키지 않고도 연방을 보존할 수 있다면 저는 그렇게 할 것입니다.  반대로 노예를 해방시켜야 연방을 보존할 수 있다면 저는 그렇게 할 것입니다.”

미국정부가 노예주들과 싸운 것은 노예제를 종식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부의 막대한 영토와 자원, 시장을 얻기 위해서였다는 얘기다.




제3부『전쟁을 위한 전쟁, 살아남기 위한 시위』에서는,

  대공황으로 인한 생존에 대한 몸부림과 1,2차 세계대전에 대처하는 미국의 국가주의적 태도, 그리고 미국의 조작에 의해 시작되는 세계의 냉전시대, 명분을 찾기에 급급해야만 했던 베트남전쟁의 부끄러운 작태,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인한 정부에 대한 불신시대가 이어졌지만 여전히 계속되어지는 부정과 부패에 대해 논하고 있다.




제4부 『우리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가』에서는,

자본주의와 국가주의로 인해 심화되는 부의 양극화현상, 끝임 없이 계속되어지는 전쟁의 실태, 순하고 어중간한 진보주의적 성향을 빌 클린턴의 정치와 부시가 석유에 대한 야욕으로 선택한 이라크 전쟁의 실태까지 얘기하고 있다.




이런 위정자들에 대해 저자는 분명히 말한다.

“자신들이 가진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그들은 국민의 분노의 화살을 스스로 방어할 능력이 없는 집단들에 돌렸다.  범죄자들, 이민자들, 생활보호 대상자들이나 이라크.쿠바처럼 미국에 적대적인 특정 정부들이 그러한 집단이었다.  이처럼 위험하다고 여겨지는 자들을 향해 시선을 돌리도록 국민을 조장함으로써 정치가들은 미국 체제의 실패에 대해 관심을 갖지 못하게 했다.” p286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자들처럼 일어서라』고 한다.

과감히 직접 참여하라고 말한다.

20세기가 시작될 무렵, 뉴욕의 피복공장에서 일하던 여성 노동자들이 퍼시 B. 셸리의 시에서 영감을 얻어 저항운동을 결심한 그 시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잠에서 깨어난 사자들처럼 일어나라.

결코 정복할 수 없는 압도적인 숫자로!

너를 묶고 있는 족쇄를 이슬처럼 털어내라,

잠들어 있는 동안 몰래 채워졌던 그것을.

너희는 다수이고, 그들은 소수니까! 

p320







이런 양심의 목소리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있음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그러나 더불어 잊지 말아야할 것은 ‘진보’도 해가 뉘엿뉘엿 지는 어느 날 ‘퇴영의 그림자’를 맞게 된다는 것이다.  ‘견제’와 ‘균형’은 ‘진보’와 ‘보수’라는 빛과 그림자에게 없어서는 안 될 필수조건이다.  하워드 진이 말하는 ‘진실한 기록’ 속에도 그림자는 분명 존재한다. 그러니 ‘견제’와 ‘균형’은 독자의 몫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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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찰과 포용 - 불세출의 리더는 어떤 마인드를 품는가
하워드 가드너 지음, 송기동 옮김 / 북스넛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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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찰과 포용’이라는 책의 제목에서 나는 이 시대가 요구하는 리더의 덕목을 읽어냈다.  다양화됨과 동시에 단순화되어 가고, 파괴적이면서 생산적이고, 풍부하면서도 빈곤한, 국경을 초월한 글로벌을 외치면서도 불안한 상황에 거세게 반발하는 민족주의의 출현,  전문적이나 폐쇄적이며 사회적 의무감은 결여되는 시대적 난제를 이끌어갈 리더라면 이에 대한 ‘통찰과 포용’이 있어야 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정치와 행정에 무관심한(도무지 관심이 안가는) 내가 굳이 이 책에 손을 뻗은 이유는 다음 세대에 대한 우려였다.  우리가 접근할 수 있는 진정한 리더에 대한 갈급증이었다고 해도 틀리진 않다.  어쩌다가, 그냥 굴러갈 것 같은 세상이 이렇게 막막하게 느껴지는 것인가.  어제와 다름없는 해가 뜨고 있는데 암흑시대에 도착한 듯 공포심이 몰려오는 걸까.  분명한 분기점을 느끼는 시대적 우울이 어느 날 갑자기 나를 옥죄어오는 느낌이다.  오늘의 작태를 대할 때마다.




 ‘통찰과 포용’ 얼마나 근사한 이상향인가?  그럼에도 미래에 대한 예견은 참으로 어렵고 역사는 랑케가 말했던 것처럼 “단지 실제로 있었던 것을 보여주는 것” 에 불과한 것인지 책을 덮으며 참으로 어렵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 책에서는 저자가 현대를 이끌었다고 생각하는  11명의 리더의 예가 나온다. 




- 원시문화 속에서 미래를 발견한 인류학자인 마거릿 리드

- 사려 깊은 리더십을 발휘한 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

- 고등교육에 새바람을 몰고 온 선구자 로버트 메이너드 허친스

- 20년 앞을 내다본 기업가 알프레드 슬론 2세

- 훌륭한 군인의 전형 조지 마셜

- 교회 정신을 재발견한 지도자 교황 요한 23세

- 대통령보다 더 대통령다웠던 퍼스트레이디 엘리너 루스벨트

- 약자의 편에 서서 대중을 일깨운 리더 마틴 루터 킹 2세

- 명확한 정체성으로 영국을 이끈 카리스마 마거릿 대처

- 국가와 경계를 넘어선 리더십으로 장 모네와 마하트마 간디이다.




 보다시피 이 책에서 제시한 리더들은 주로 미국인이었고 대처나 장 모네는 서유럽인 이었으며 장 모네와의 비교치로 등장하는 마하트마 간디 정도로 극히 편협 되어 있다.  시기도 1,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거나 끝날 무렵의 인물들이다.  시대가 영웅을 만들어 낸다고 하는 것처럼 이들은 역사라는 이름 앞에서 판단의 저울대에 올려진 사람들이다.  수없이 다시 읽혀질 그들의 행보에 저자는 리더십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을 얘기한다.  비교연구 방식을 사용하다보니 각자에 대한 인간적 통찰보다는 리더로서의 유사점과 다른 점들을 열거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다보니 어느 인물에게서는 통했던 면면들이 다른 인물로 가서는 막힌 점이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인물에 대한 판단근거가 극도로 희박한 나로서는 분석의 고단함이 동반되어야만 했다.  더군다나 난 이 시대의 리더들(정치적)을 한 번도 부러워하거나 우러러보지 않았기 때문에 가슴에 답답증까지 동반해야 하는 이중고를 겪었다.  하지만 문자로 이루어진 모든 것을 사랑하는 나는 이 안에서도 사랑해야 한다는 당위성 정도의 긴장감을 간혹 느꼈다.




세계대전이라는 역사적 혼란기에 대부분의 리더들은 다분히 자국가 위주의 정책들로 냉전시대를 만들었고 약소국에 대한 정책 또한 철저히 자국의 이익을 생각했다.  우리나라의 분단 현실 또한 당시의 세계적 리더라는 자들에 의해 좌우지 됐다고 볼 때 곱지 않은 시선은 당연한 것일 수 있다.  위에 열거된 리더들은 다분히 포용적 자세로 타인과 타국을 이해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물론 마거릿 대처의 정치적 스타일이나 로버트 메이너드 허친스의 교육정책과 알프레드 슬론 2세의 기업정신은 내적으로는 포용적이었으나 대외적으로는 경쟁적이며 배타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민주주의가 태동한 근대국가(19C)에서는 ‘최소의 행정이 최선의 정부’라 하여 탈규제화와 작은 정부를 지향한다.  그러나 지나친 규제완화나 공공재의 존재는 시장실패를 초래하게 되고 현대에 이르러 다시 통치의 이념은 최대의 행정이 최선의 정부가 되는 거대정부를 이루게 된다.  규제는 다시 강화되고 복지국가를 내세우며 일자리 창출을 위한 루즈벨트 대통령의 뉴딜정책이 실시된다.  이는 다시 정부실패로 이어지고 1980년대부터는  ‘작지만 강한 정부’로 작은 정부가 출현하게 된다. 이를 마거릿 대처는 ‘영국병’이라 진단하고 새로운 정책들을 입안하는데 우리는 그것을 ‘대처리즘’이라 명하기도 한다.  새로운 정책이라곤 하지만 그것은 다시 규제를 완화하고 복지지출을 줄이고 국영기업을 민영화하는 작은 정부를 만드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는 인플레이션을 극복하고 경기는 회복되었으나 심각한 실업문제를 야기시켰다.  또한 ‘대처세대’의 아이들은 정치에 대한 무관심과 고실업으로 인한 불확실한 미래로 인해 비합리적 경향을 보이는 문제점을 낳기도 했다.  이렇듯 역사는 늘 돌고 도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라는 이름하에 자유방임경제를 지향함으로 국가 경쟁력을 강화한다고는 하지만 이는 빈부격차 확대와 선진국의 시장개방 압력으로 인한 내부적 갈등이 만들어지고 있으며 나아가 국가간 빈부격차 또한 심각해질 것으로 본다. 




강대국의 논리에 따라야 하는 약소국의 빈약한 논리는 새로운 대안을 만들어야 하는 문제점을 충분히 가지고 있음에도 자국의 이익만을 우선하는 리더는 쉽게 기득권을 놓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경제논리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현시점에서 다음세대에게 우리는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단 말인가? 




적어도 이 책이 책임감 있는 목소리를 가졌다면 새로운 시대의 리더에 대해 좀 더 관대하고 포용력 있는 대안을 내놓았어야 한다.  더더군다나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의 입장에서.  국민이 자신의 이상을 따라주지 못한다고 투덜거리며 죽은 히틀러 같은 우를 범하지 말아야하지 않는가 말이다.  세계는 하나의 축과 바퀴로 굴러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영 대안이 없는 것도 아니라고 본다.  한 나라의 결단력 있는 리더라면 휩쓸려가며 허우적거리기보다 과감하게 돌파구를 찾는 것도 고려해 볼 가치가 있다고 본다.  쿠바의 경우 수십 년 간 이어진 미국의 강력한 경제봉쇄로 의약품과 비료가 원조되지 않자 생약부분과 유기농에 있어서 세계 최고 수준의 실력을 보유하게 되었다고 한다.  타산지석이라 하였다.




이런 류의 책들이 그렇듯이 같은 말은 수없이 반복된다. 또한 리더가 갖추어야할 덕목은 수없이 많다.  내가 리더가 될 수 없다면 시대를 이끌어갈 진정한 리더에 대해 우리는 진정 생각해야 할 것이다.  ‘통찰’과 ‘포용’을 겸비한 시대의 리더는 과연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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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블루 - 기억으로 그린 미술관 스케치
김영숙 지음 / 애플북스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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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파리블루.....




예전에 프랑스와 폴란드 합작영화로 『세 가지 색 - 블루, 화이트, 레드』라는 작품이 있었다.  여기서 블루는 자유를 상징했다.  유명한 음악가인 남편과 딸을 사고로 잃은 줄리라는 여성은 홀로 살아남은 것에 대한 죄의식과 괴로움으로 세상으로부터 도피되어 고독한 삶을 살고자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죽은 남편에게 정부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정부와의 만남을 통해 고통에서 벗어나면서 그녀가 진정한 자유를 찾게 된다는 내용이다. 

블루 즉, ‘자유’는 죄책감과 집착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줄리의 삶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상처로부터 그리고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진정한 자유를 찾아가는 과정. 그것이 ‘블루’였다. 




항암치료를 받고 있는 남편과 숙제를 봐줘야 하는 딸들을 남기고 혼자서 떠난 여행.  죄책감내지는 곱지 않은 타인의 시선을 뒤로 하고 그녀는 파리 골목골목에서 상처투성이였던 과거를 유영하며 미래를 만들어 간다.  왠지 우울한 그녀의 얘기들 속엔 그래서 ‘블루’의 진정한 자유가 느껴진다.  자신을 찾아 떠나는 여행.  차분하면서도 우울하고 그러면서 자유로워지는 세계.  기행문이라기보다 한 편의 소설을 읽은 듯한 느낌을 주었던 것도 아마 성장해 나가는 작가의 과거가 사이사이에서 빛을 발하고 있었기 때문일지 모르겠다.  그리고 우울한 그녀의 얘기들에 점점 빠져드는 나는 거기서 햇살 많은 흙 담장 아래서 일 나간 엄마를 기다리며 까만 손톱 끝으로 땅에 그림을 그렸다 지우곤 하던 나의 유년을 만나기도 했다. 




왠지 피곤하고 신경질적인 그녀에겐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는 섬세함이 있다.  틈틈이 보여주는 기억의 갈피 속에서 내 오랜 단골 술집처럼 무작정 마시고 싶어지는 편안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음울하지만 그 내면에 내가 있어서 쉽게 취할 수 있었다.

 “백 년 동안 고독한 채로.”




그녀가 파리에서 내게 보내 준 것은 조금은 쓸쓸하고 뒷맛이 쓴 사랑이었다. 




“난 그녀의 몸만 사랑했던 게 아니었다.” 라며 떠나간 여인을 회상하는 후배의 독백 속에서 나 또한 떠나간 내 사랑에 얼마나 이기적이었나 라는 생각을 한다.  분명 그에게도 있었을 상처를 인정하기보다 ‘사랑했었다’는 진실은 어느새 ‘이용당했다’로 둔갑되어지는 손해의식. ‘몸만’, ‘마음만’이 어디 있었겠는가.  누군가에 의해 헤어졌다는 이유만으로 순간순간 진실했었고 함께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에 그리도 인색해야만 하는가? 사랑은 그렇게 엇나가기도 하고 일치되기도 하는 것임을, 그에게도 나와 같은 상처가 덧나고 있음을 알 것 같다.




자신의 반쪽을 찾아 떠도는 삶 속에 파리는 낭만적 도시임엔 분명했다. 

그 도시엔 양성인(남성과 여성을 동시에 갖은 사람)인 헤르마프로디테가 있고 로댕과 카미유 클로델이 있고 뤽상부르 공원의 연인들과 어디서든 키스해대는 청춘과 늙음이 공존하는 곳이기에.  그녀가 찍어댄 사진 속의 사람들은 이방인인 동시에 자신이기도 하다.  꼭 그들과 말을 석지 않아도 나 자신을 통해 투사되는 모습들. ‘아무도 말 걸지 않는 파리’ 거기엔  ‘나를 비추는 거울인 타인’이 존재하고 있는 곳이다.




저자의 걸음걸이.  루브르, 오르세, 노트르담, 피카소미술관, 로댕미술관, 퐁피두, 뤽상부르 공원을 거닐면서 짧은 기간이었지만 내가 갔던 파리를 다시 기억한다.  개성과 자유와 존중이 느껴졌던 도시.  ‘아무도 말 걸지 않는 그 파리’에 다시 한 번 가보고 싶다.




루브르에 첫발을 들여놓은 날은 무척 햇살이 길게 창으로 들어오던 오후였다.  처음 들어선 곳엔 몇 천 년의 시간을 지켜온 대리석 상들이 즐비해 있었다. 상아빛 대리석들은 빛들이 투영되면서 돌이 아닌 살의 느낌을 그대로 들어냈다.  몇 발짝 들어서니 왼쪽에 헤르마프로디테상이 요염하게 누워있었다.  미소년 같은 여인의 얼굴은 순수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벗겨진 그 몸은 같은 일행의 남자들을 의식할 만큼 요염했다.  그러다 꺾어진 가랑이 사이에 끼어있는 남자의 성기를 보는 순간 괴이한 혼란에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그 순간 미끈한 여자의 몸에 맞는 성기와 울퉁불퉁한 남자의 몸에 맞는 성기를 빚어낸 신의 미적 감각에 찬사를 보냈다.  그리고선 저렇게 갖게 되면 과연 행복할까? 뭐 그런 생각들을 했다.  분명 헤르마프로디테상은 아무 근심도 없는 평안함을 깃들인 채 한 낮의 섹스를 즐긴 후 오수를 즐기고 있는 나른함을 온 몸에 품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섹시했다. 

저자는 말한다.  “너를 비웃지 않고 외려 부러워하며 짧은 숨을 토해낸 한 사람”이 있었다고.  부러울 것까지야.  남자와 여자가 만나 합일을 이루고 서로의 몸을 탐한 후 서로 각자의 몸으로 되돌아갔을 때 그 때가 가장 충만한 그리움의 순간이라고 여긴다.  그리고 그 그리움은 다시 합일되는 순간을 위해 고이고 또 고였을 때 다시 하나가 된다고 생각했다.  




오르세 2층에 사실주의관에 있는 카미유 클로델의 ‘숙명’ 앞에서 들려주는 그녀의 얘기에 나는 다시 나 자신을 본다. 




“조각가 로댕을 ‘거지같이 나쁜 오뎅 녀석’이라고 불렀다.

무릎을 꿇고 애원하는 이는 카미유 자신이다.  어정쩡한 남자는 로댕, 그리고 단호하게 앞만 향하고 있는 여인은 로댕의 본처, 로즈 베레이다.  매달리는 카미유를 두고 조강지처에게로 끌려가는 이가 로댕, 그리고 사랑보다 지독한 것이 일상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고수하는 로즈의 삼각관계로 읽자면 분명히 ‘숙명’의 주인공은 카미유 클로델이다.  그러나 청춘의 아름다움을 아무리 간직하려 해도 속수무책 앞만 향하는 세월의 흉악함을 생각한다면 질질 끌려가는 저 사내가 바로 이 작품의 주인공이다.  그 주인공은 로댕일 수도 있고 나일 수도 있으며 당신일 수도 있다. ” p158




카미유의 젊은 예술혼을 이용하고 팔아먹은 로댕을 나쁜 놈이라고 욕했었는데 그런 로댕이 나일 수도 있다는 말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렇게 유약하게 질질 끌려가는 험악한 모습이 그대로 투사되어지는 나 자신.  사랑 앞에, 삶 앞에 로댕의 모습을 통해 나 또한 자위하고 있음을 인정한다.




파리의 자유는 나를 다시 구속시킨다.  하지만 내 내면은 좀 더 관대해 질 것이며 우울하다고 해서 전전긍긍하지 않을 것이다.  나 자신은 물론 타인과 소통하는 방식을 또 이렇게 배우는 것이기에.  마지막으로 그녀가 남긴 멋진 구절을 남겨본다. 




 besame, besame mucho (베사메, 베사메 무초)

como si fuera esta noche, la ultima vez(꼬모 시 푸에라 에스따 노체, 라 울띠마 베스)

키스해줘요. 많이

마치 이 밤이 마지막인 것처럼




Abrazame(아브라사메)

como si fuera ahora la primera vez (꼬모 시 푸에라 아오라 라 쁘리메라 베스)

날 안아줘요

마치 지금이 처음인 것처럼

P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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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밤의 뜨개질 클럽
케이트 제이콥스 지음, 노진선 옮김 / 대산출판사 / 2008년 2월
평점 :
절판


 

“요즘 새롭게 부활한 뜨개질의 인기가 놀랄 만한 시대 역행적 현상이라는 게 꺼림칙하지 않으세요?  뜨개질 같은 구식 취미 활동에 시간을 낭비하는 여성들이 과연 자신의 직업적 잠재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을까요?”  p 21




다윈의 말이다.  이 말은 내 생각이기도 했다.

언니와 동생은 손재주가 좋아 뜨개질이나 재봉질을 잘하는데 반해 나는 코 뜨기조차 할 줄 모른다.  나는 스스로 그런 나를 ‘길들여지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여성의 전유물 같은 뜨개질은 도전적이며 진취적인 인간에겐 퇴보적이고 고립적 방어체계라고 생각하는 내 사유의 단적인 표현이기도 했다.  여럿이 모여서 하게 되는 뜨개질에는 여자들의 ‘수다’가 있다.  내가 그리 좋아하지 않던 ‘뜨개질’과 ‘수다’가 치유와 성장의 과정을 거쳐 완벽하진 않지만 자신에게 꼭 필요한 옷을 만들어 낸다.  자기 자신을 찾아가고 알아가는 과정이 이 책엔 있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여성의 연대’가 있다. 




페미니즘의 기준이 어디서 어디까지인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페미니즘을 논하고자 했다면 뜨개질이라는 소재를 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에서 차별성이 있다고 본다.  남성의 아류나 짝퉁이 되기를 강조하기보다  여성이 갖는 섬세함과 부드러움으로 가부장적 사회에 오롯이 여성의 이름으로 서는 느낌.  너무 강한 페미니즘은 같은 여자인 나에게도 때론 반감이 생기기 마련이다.  혼돈 속에 있는 감정선을 촌철살인의 언어로 정리해줬다면 좀 지나친 과장인가?  그럼에도 나는 나를 알아가는 그 과정이 책속에 있어서 읽는 내내 즐거웠다.




금요일 밤의 뜨개질 클럽의 심취 멤버는 여덟 명 정도 되겠다.  워커 모녀수예점의 경영주이며 이 모임의 리더인 조지아, 그리고 조지아의 후견인이면서 대모격인 애니타, 뜨개질 보다는 수다를 더 좋아하는 K.C, 방송국 프로듀서이면서 이 모임을 다큐멘터리로 제작하는 루시, 여성사를 공부하는 다윈(다윈은 순전히 집단 속의 여성에 대한 인터뷰를 하고자 이 클럽을 방문했다), 조지아의 고교친구였으나 대학입학 약속을 배신하여 절별 했던 캣, 조지아의 딸 다코타, 수예점의 아르바이트생 폐리의 이야기이다. 




조지아에게는 훤칠하고 잘 생긴 흑인 남자 친구인 제임스가 있었다.  ‘뉴욕의 공기’속에 충만한 에너지와 열정으로 사랑을 나누었지만 다코타를 임신시키고 그 사실을 알지 못한 채 파리로 떠나버린다.  할머니에게서 배운 뜨개질을 하며 센트럴파크에서 절망적 눈물을 흘릴 때 미망인인 애니타를 만나게 되고 애니타는 그녀의 첫 고객이자 삶의 지원자가 된다.   다윈은 페미니스트이다.  여성학 논문을 위해 수예점을 취재한다.  그녀의 상처는 부모로부터 길들여졌다는데 있다.  똑똑하고 개성강한 그녀를 보편적 여성으로 키우고 싶어 하셨던 부모의 길들임은 반항만을 키웠을 뿐이다.  루시 또한 부모로부터 길들여졌다는 점은 비슷하나 그녀는 자아보다는 역할(언니, 동생, 딸, 여자친구)들 사이에서만 존재가치가 있었던 여자였다. K.C는 열정을 바쳤던 직장에서 구조조정에 이른 마흔을 넘긴 노처녀이다.  그녀의 오랜 꿈이었던 변호사가 되려고 로스쿨입학을 위해 늦은 공부에 도전한다.  캣은 돈 많은 남자의 허영 속 장식품으로 살다가 조지아와 뜨개질클럽을 통해 이혼을 감행하고 자신을 찾아가는 제2의 성장을 시도한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안에는 지금도 혼자서 고군분투하는 많은 여성들의 힘겨운 세상과의 싸움을 엿볼 수 있다.  혼자였다면 더 힘들었을 일들을 이들은 서로를 격려하고 이끌어주면서 자신을 찾아가고 삶을 창조해 나간다.

그 창조의 과정을 뜨개질이라는 여성적 전유물에서 발견해 내는 과정도 흥미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털실을 고르는 일이다.  주머니 사정이 허락하는 한 최고의 털실을 고르라고 말한다.  최고의 작품을 원한다면 그 기본에 가장 충실하게 투자하라는 말이다. 『무형의 에너지들을 끌어 모아 우리의 영혼에 깃들인 무언가를 만든다는 것』그것이 뜨개질 속의 인생이다.

두 번째는 첫 코 뜨기이다. 첫 코를 뜨는 데는 수십 가지의 방법이 존재하고 그 방법은 뜨는 사람의 기술 혹은 옷의 디자인에 따라 다르다.  어떤 시도를 하든지 간에 그 작품에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사용하라는 것이다. 

세 번째는 게이지내기이다.  작품을 자신의 몸에 맞게 설계하는 작업이다. 이 또한 각자의 개성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염두에 둔다. 뜨개질을 할수록 코의 형태는 변형되는데 두 사람이 똑같은 사이즈와 똑같은 타입의 바늘을 써도 코의 크기와 밀도가 다르고 놀라운 것은 두 사람의 작품이 각자에게 모두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네 번째는 겉뜨기와 안뜨기인데 겉뜨기는 매끈하고, 안뜨기는 울퉁불퉁한 것처럼 겉뜨기는 당신이 세상에 내보이는 쪽이고, 안뜨기는 우리의 내면일 수 있으나 모든 매듭은 안뜨기를 통해 마무리 된다.  아름다운 겉뜨기를 보이기 위해 내면의 고통을 감수했을 때 완벽한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다.

다음은 복잡한 스티지를 마스터해야 하는데 이 또한 순탄치만은 않은 우리인생의 안뜨기의 과정이 아닐까?  잘못된 부분을 풀어내기도 하는 것처럼 진정한 삶은 용서를 통해 다시 재회할 수 있음도 말해준다. 살다보면 그냥 놓아버리고 싶은 경우도 많은데 힘든 순간 놓아버린 일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면 ‘다시 시작’해보자.  “미완성 작품을 계속 붙들고 있게 만드는 건 은밀한 희망이 있기” 때문이라니 말이다.

마지막으로 작품을 잘 마무리 하려면 풀리지 않게 코막음을 해야 할 것이며 각자 뜬 판들을 잘 이어 붙여야 하고 스스로를 사랑으로 에워싸듯 자신이 만든 아름다운 옷을 입어보는 일이다. 




부모나 사회, 남자에 의해 종속되었던 삶을 사는 여자들은 서로 연대하며 함께 성장해 나가고 꿈을 이룬다.  나는 누군가의 며느리, 누군가의 엄마로 살고 있다.  매일 밥상을 차려야하고 빨래를 해야 하고 똑 같은 식구들을 보는 것이 지겨울 때가 있다.  의외로 그런 날은 참으로 많다.  밥이 지겹고 밥을 위한 벌이가 지겹다.  나는 없어지고 부엌데기만 남아 있는 듯한 절망감도 수시로 느낀다.  그러나 그 일들은 해가 뜨고 해가 지는 일처럼 당연한 일이 되어버렸다.  어떤 이는 배를 채우기 위한 식사가 세상에서 가장 한심하고 미련한 짓이라고 했지만 허기진 배도 그리 유쾌하진 않다.  늦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르다지만 새로운 최고의 털실을 고르는 것도 만만치 않다.  이렇게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는 현실 속에서 그들이 스스로의 길을 개척하기 위해 격려했던 도전과 맹세들을 생각해본다. 분명 쉽지 않은 일들이 있겠지만 이겨내는 힘도 나에게서 찾겠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이 되는 일’이리라. 




조지아는 암으로 죽어가면서 딸인 다코타가 “착한 사람이 될게요.” 라고 할 때 힘겹게 말한다. “아니야. 그냥 너 자신이 되면 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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