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블루 - 기억으로 그린 미술관 스케치
김영숙 지음 / 애플북스 / 2008년 2월
평점 :
절판


파리블루.....




예전에 프랑스와 폴란드 합작영화로 『세 가지 색 - 블루, 화이트, 레드』라는 작품이 있었다.  여기서 블루는 자유를 상징했다.  유명한 음악가인 남편과 딸을 사고로 잃은 줄리라는 여성은 홀로 살아남은 것에 대한 죄의식과 괴로움으로 세상으로부터 도피되어 고독한 삶을 살고자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죽은 남편에게 정부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정부와의 만남을 통해 고통에서 벗어나면서 그녀가 진정한 자유를 찾게 된다는 내용이다. 

블루 즉, ‘자유’는 죄책감과 집착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줄리의 삶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상처로부터 그리고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진정한 자유를 찾아가는 과정. 그것이 ‘블루’였다. 




항암치료를 받고 있는 남편과 숙제를 봐줘야 하는 딸들을 남기고 혼자서 떠난 여행.  죄책감내지는 곱지 않은 타인의 시선을 뒤로 하고 그녀는 파리 골목골목에서 상처투성이였던 과거를 유영하며 미래를 만들어 간다.  왠지 우울한 그녀의 얘기들 속엔 그래서 ‘블루’의 진정한 자유가 느껴진다.  자신을 찾아 떠나는 여행.  차분하면서도 우울하고 그러면서 자유로워지는 세계.  기행문이라기보다 한 편의 소설을 읽은 듯한 느낌을 주었던 것도 아마 성장해 나가는 작가의 과거가 사이사이에서 빛을 발하고 있었기 때문일지 모르겠다.  그리고 우울한 그녀의 얘기들에 점점 빠져드는 나는 거기서 햇살 많은 흙 담장 아래서 일 나간 엄마를 기다리며 까만 손톱 끝으로 땅에 그림을 그렸다 지우곤 하던 나의 유년을 만나기도 했다. 




왠지 피곤하고 신경질적인 그녀에겐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는 섬세함이 있다.  틈틈이 보여주는 기억의 갈피 속에서 내 오랜 단골 술집처럼 무작정 마시고 싶어지는 편안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음울하지만 그 내면에 내가 있어서 쉽게 취할 수 있었다.

 “백 년 동안 고독한 채로.”




그녀가 파리에서 내게 보내 준 것은 조금은 쓸쓸하고 뒷맛이 쓴 사랑이었다. 




“난 그녀의 몸만 사랑했던 게 아니었다.” 라며 떠나간 여인을 회상하는 후배의 독백 속에서 나 또한 떠나간 내 사랑에 얼마나 이기적이었나 라는 생각을 한다.  분명 그에게도 있었을 상처를 인정하기보다 ‘사랑했었다’는 진실은 어느새 ‘이용당했다’로 둔갑되어지는 손해의식. ‘몸만’, ‘마음만’이 어디 있었겠는가.  누군가에 의해 헤어졌다는 이유만으로 순간순간 진실했었고 함께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에 그리도 인색해야만 하는가? 사랑은 그렇게 엇나가기도 하고 일치되기도 하는 것임을, 그에게도 나와 같은 상처가 덧나고 있음을 알 것 같다.




자신의 반쪽을 찾아 떠도는 삶 속에 파리는 낭만적 도시임엔 분명했다. 

그 도시엔 양성인(남성과 여성을 동시에 갖은 사람)인 헤르마프로디테가 있고 로댕과 카미유 클로델이 있고 뤽상부르 공원의 연인들과 어디서든 키스해대는 청춘과 늙음이 공존하는 곳이기에.  그녀가 찍어댄 사진 속의 사람들은 이방인인 동시에 자신이기도 하다.  꼭 그들과 말을 석지 않아도 나 자신을 통해 투사되는 모습들. ‘아무도 말 걸지 않는 파리’ 거기엔  ‘나를 비추는 거울인 타인’이 존재하고 있는 곳이다.




저자의 걸음걸이.  루브르, 오르세, 노트르담, 피카소미술관, 로댕미술관, 퐁피두, 뤽상부르 공원을 거닐면서 짧은 기간이었지만 내가 갔던 파리를 다시 기억한다.  개성과 자유와 존중이 느껴졌던 도시.  ‘아무도 말 걸지 않는 그 파리’에 다시 한 번 가보고 싶다.




루브르에 첫발을 들여놓은 날은 무척 햇살이 길게 창으로 들어오던 오후였다.  처음 들어선 곳엔 몇 천 년의 시간을 지켜온 대리석 상들이 즐비해 있었다. 상아빛 대리석들은 빛들이 투영되면서 돌이 아닌 살의 느낌을 그대로 들어냈다.  몇 발짝 들어서니 왼쪽에 헤르마프로디테상이 요염하게 누워있었다.  미소년 같은 여인의 얼굴은 순수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벗겨진 그 몸은 같은 일행의 남자들을 의식할 만큼 요염했다.  그러다 꺾어진 가랑이 사이에 끼어있는 남자의 성기를 보는 순간 괴이한 혼란에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그 순간 미끈한 여자의 몸에 맞는 성기와 울퉁불퉁한 남자의 몸에 맞는 성기를 빚어낸 신의 미적 감각에 찬사를 보냈다.  그리고선 저렇게 갖게 되면 과연 행복할까? 뭐 그런 생각들을 했다.  분명 헤르마프로디테상은 아무 근심도 없는 평안함을 깃들인 채 한 낮의 섹스를 즐긴 후 오수를 즐기고 있는 나른함을 온 몸에 품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섹시했다. 

저자는 말한다.  “너를 비웃지 않고 외려 부러워하며 짧은 숨을 토해낸 한 사람”이 있었다고.  부러울 것까지야.  남자와 여자가 만나 합일을 이루고 서로의 몸을 탐한 후 서로 각자의 몸으로 되돌아갔을 때 그 때가 가장 충만한 그리움의 순간이라고 여긴다.  그리고 그 그리움은 다시 합일되는 순간을 위해 고이고 또 고였을 때 다시 하나가 된다고 생각했다.  




오르세 2층에 사실주의관에 있는 카미유 클로델의 ‘숙명’ 앞에서 들려주는 그녀의 얘기에 나는 다시 나 자신을 본다. 




“조각가 로댕을 ‘거지같이 나쁜 오뎅 녀석’이라고 불렀다.

무릎을 꿇고 애원하는 이는 카미유 자신이다.  어정쩡한 남자는 로댕, 그리고 단호하게 앞만 향하고 있는 여인은 로댕의 본처, 로즈 베레이다.  매달리는 카미유를 두고 조강지처에게로 끌려가는 이가 로댕, 그리고 사랑보다 지독한 것이 일상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고수하는 로즈의 삼각관계로 읽자면 분명히 ‘숙명’의 주인공은 카미유 클로델이다.  그러나 청춘의 아름다움을 아무리 간직하려 해도 속수무책 앞만 향하는 세월의 흉악함을 생각한다면 질질 끌려가는 저 사내가 바로 이 작품의 주인공이다.  그 주인공은 로댕일 수도 있고 나일 수도 있으며 당신일 수도 있다. ” p158




카미유의 젊은 예술혼을 이용하고 팔아먹은 로댕을 나쁜 놈이라고 욕했었는데 그런 로댕이 나일 수도 있다는 말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렇게 유약하게 질질 끌려가는 험악한 모습이 그대로 투사되어지는 나 자신.  사랑 앞에, 삶 앞에 로댕의 모습을 통해 나 또한 자위하고 있음을 인정한다.




파리의 자유는 나를 다시 구속시킨다.  하지만 내 내면은 좀 더 관대해 질 것이며 우울하다고 해서 전전긍긍하지 않을 것이다.  나 자신은 물론 타인과 소통하는 방식을 또 이렇게 배우는 것이기에.  마지막으로 그녀가 남긴 멋진 구절을 남겨본다. 




 besame, besame mucho (베사메, 베사메 무초)

como si fuera esta noche, la ultima vez(꼬모 시 푸에라 에스따 노체, 라 울띠마 베스)

키스해줘요. 많이

마치 이 밤이 마지막인 것처럼




Abrazame(아브라사메)

como si fuera ahora la primera vez (꼬모 시 푸에라 아오라 라 쁘리메라 베스)

날 안아줘요

마치 지금이 처음인 것처럼

P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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