똥친 막대기
김주영 지음, 강산 그림 / 비채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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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친 막대기’ 제목부터 재미난다.

어쩌다가 하고많은 운명 중에 똥친 막대기가 됐을까? 쯔쯔... 혀가 절로 차진다. 그 슬픈 운명을 김주영님이 풀어낸다면 분명한 꿈틀거림이 있을 거라 믿었다. 그의 소설엔 얽매임이 없다. 오래 전에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들에선 유목민의 피가 흐르는 뜨거운 느낌이 있음을 나의 뇌세포는 기억하고 있다. 머물러 있는 것도 떠나기 위한 기다림의 시간으로 만들어 내는 작가의 역마살을 나는 사랑했다. ‘어른을 위한 동화’가 아닌 ‘그림소설’이라 칭한 것도 작가의 섬세한 마음이 느껴져서 신뢰가 간다. 이런저런 생각 끝에 책을 펼쳐본다. 강산님이 그린 수채색 그림에 눈이 먼저 즐거워진다.



나, 막대기는 2년 전 백양나무 옹이의 곁가지로 태어났다. 사월의 아침 햇살이 촘촘하게 내리쬐던 어느 날 농사꾼 박기도씨에 의해 꺾이고 만다. 나의 눈물나는 호소에도 불구하고 써래질하는 암소를 몰기위해 억센 손아귀로 나를 꺾은 거다. 어미로부터 떨어져 나가기엔 아직 어린 나의 운명은 그렇게 시작된다. 비록, 운명의 수렁에 빠지는 기막힌 사건 속에서도 ‘기적을 꿈꾸는 나’는 박기도씨의 손에 이끌려 재희네 집에 까지 온다. 재희는 박기도씨의 딸이다. ‘뽀드득뽀드득 발을 씻는 소녀’의 모습이 무척 아름다웠다. 나의 슬픈 운명은 그렇게 예쁜 재희의 종아리를 치는 못된 막대기로 변한다. 재희의 어머니가 재희의 시험성적을 두고 회초리를 찾던 중 내가 발견된 거다. 그러다 나는 하루아침에 뒷간에 처박히는 신세가 된다. 아마도 딸을 아끼던 아비의 마음이 나를 뒷간지기로 만들어버리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냄새나는 뒷간에서 더 가혹한 운명은 다음 날 아침에 이루어진다. 바로 똥친 막대기가 된 거다. 뒷일을 본 박기도씨는 나를 사정없이 똥통에 넣고 휘젓는다. 인분을 고루 섞어 퇴비로 쓰기 위한 작업에 어린 내가 희생된 거다. 물관과 채관이 똥 속에서 비비말라가는 슬픈 운명을 한탄하며 어미 나무를 그리워할 때 재희의 손에 들려 나는 뒷간을 탈출한다. 기막히게도 나는 재희의 손에 이끌려 동네 악동들을 물리치는 앞잡이 노릇을 톡톡히 해낸다. 바로 내 몸 끝자락에 덕지덕지 붙은 똥의 위력이었던 것이다. 세상에서 젤로 무서운 것은 회초리가 아니라 똥친 막대기 바로 나였던 것이다. 푸하하!!

 

다시, 모내기하는 봇도랑에 처박힌 나는 흐르는 물에 의해 똥을 말끔히 씻기게 되고 여름 장마에 휩쓸려 물결치는 대로 흘러가다가 낯선 봇도랑에 떨어진다. 장마가 그치고 살랑살랑 바람이 불어오는 날 몸속 물관에 자양분이 충분히 축적된 나는 흙에 닿은 한쪽 끝으로부터 견디기 어려운 간지럼을 느꼈다. 어미나무를 떠나 어린 백양나무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그리곤 생각한다. 재희가 나를 모른 척 지나쳐 준 것이 내가 살아갈 땅을 찾아내는 데 결정적인 단초를 제공했다고..... 내가 사랑한 그녀였지만 말이다.



그렇게 ‘나’ 똥친 막대기는 한 그루 어엿한 백양나무로 크기위해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릴 준비를 시작한 거다. 여러 마리의 소를 붙잡아 맨다 하여도 쓰러지지 않는 힘과 담력을 가진 튼실한 밑동을 가진 백양나무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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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내게로 왔다 - 이주향의 열정과 배반, 매혹의 명작 산책
이주향 지음 / 시작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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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을 얕봤다.  헛구호 같았다.  “저 사람은 철학도 없어”라고 비난할 때도 철학의 깊은 의미도 모른 채 생각나는 대로 지껄인 거다.  ‘사유하는 철학’과 ‘실천하는 삶을 일치시키지 못하는 나의 어리석음을 탓하지 않고 철학은 그저 고리타분한 이론쯤으로 치부해 버린 것이다.  그러다 홍세화 선생님의 강연을 통해 철학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깨달음은 찰라였으나 그 공명은 내 생에 깊은 성찰을 가져다 줄듯하다.  오래된 철학이론이 현대를 살아가는 삶 속에 어떻게 녹아들어야 하는지, 어렴풋하지만 철학에 깊은 매력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헛구호 같았던 이론들이 현실의 삶에서 어떻게 작용되어야 하는지.  그리고 나는 철학적 소견이 참으로 부족한 사람이라는 것을..., 그러면서 이주향 선생님의 이 말에 위로를 받는다.  “힘 있는 말은 미사여구가 아니라 자기에서 나온 말이듯,  아름다운 몸짓은 자기에서 나온 자기 몸짓입니다.”  아무리 철학적으로 뛰어난 사람도 ‘자기에게서 나온 말’, ‘자기에게서 나온 자기 몸짓’ 보다 더 진실하진 않다는 것을. 개똥철학도 철학인 것이다.  내 개똥을 잘 껴안고 살면 그게 바로 나의 말, 나의 몸짓이 되어 내 철학이 되는 것이다.  거기에 이론이 첨가된다면 금상첨화가 되겠지만 나의 말, 나의 몸짓이 보기에 좋은 그런 철학이었으면 좋겠다. 생각한다.    




이 책은 세계 문학을 통해 사랑을 얘기하고 있다. 

모두 5개의 장으로 이루어졌다. 

1장. 거침없이 사랑하라, 그리고 망각하라

2장. 배반하라, 사랑을 배반하라

3장. 태초의 사랑을 잃다

4장. 악마의 입맞춤으로 구원되다.

5장. 멈추어라, 너는 참으로 아름답다

모두 사랑에 대한 정의다. 




‘태초의 사랑을 잃다’ 부분에서는 창세기 아브라함이 사래(사라는 이삭을 낳은 이후의 이름이다)를 데리고 이스라엘로 들어갈 때 아브라함은 사래에게 목숨이 위험하니 아내라고 하지 말고 누이라고 하라고 말한다.  그리고 아내를 파라오에게 판 결과로 부자가 된다.  이를 두고 작가는 말한다. “어쩌면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모든 안락은 내 마음의 내면 사래를 팔아먹은 결과인지도 모른다.  당연히 육체는 풍요로워도 영혼은 곤궁해 진다.  우리는 생존에 대한 두려움으로 생존 이유인 사래를 잃고 있는 아브람이다.”라고 말한다.  이렇게 우리가 간과했던 모습을 우리의 삶과 연관시켜 설명해 주고 있다.  




  반쪼가리 자작에서는 “우리는 선한 존재인가? 악한 존재인가?” 라는 화두를 던지며 악과 선에 대한 깊은 고찰이 있다.  우리는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다.  착한 일을 하면서도 착하지 않을 때가 있고, 악을 쓰면서도 악하지 못할 때가 있다.  그래서 갈등하기도 하고 상처 나기도 하고 고통을 겪기도 하고 깊어지기도 한다.  사실 ‘선’을 강조하는 ‘선한 사람’은 무례하기 쉽다. 그는 ‘떳떳해야 한다’는 콤플렉스 속에서 경직되어 뻣뻣해져 있으니까.  이익이 되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악한 사람’도 무례하다.  그는 이익 앞에서 정신없이 비겁해지니까. ...... 사실 악이 없으면 활력이 없고 선이 없으면 희망이 없다.” 라며 이분화 시켰으나 사실 선과 악은 한 몸임을 얘기하는 부분도 좋았다. 




사랑은 독이다.  병들게 하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 거침없이 사랑하고 잊어야 할 때는 과감히 배반하라고 하지만 사람 마음이 그렇게 쉽냐 말이다.  세상의 사랑노래가 다 이별노래였음을 알았을 때 사랑의 다른 얼굴이 이별임을 알았다.  배신자라며 뼈 속까지 속았다고 울부짖었으나 그 이면에 더 큰 사랑이 있었음을 알았다.  가슴 깊이 남아있는 상처를 어쩌지 못하고 헛된 꿈을 꾸게 만드는 것.  그것이 그놈에 사랑이다.  사랑은 내 몸이 하는 것이지 머리가 하는 것이 아니었다.




 사랑할 때 깊이 사랑하고 보내야 할 때 과감히 배반할 줄 아는 지혜를 이 책은 말해주고 있다.  사랑이 오는 것보다 철학이 내 삶에 가까이 온 것이 더 좋았던 책읽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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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오선 여행 - 과학의 역사를 따라 걷는 유쾌한 천문학 산책
쳇 레이모 지음, 변용란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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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시간과 공간의 의미.

어제와 똑같은 해가 뜨고 어제와 똑같은 시간에 밥을 먹고 어제와 똑같은 장소로 가서 일을 한다. 나는 어제와 똑같은 오늘을 하루하루 쌓고 있다. 그런 시간을 2000년이면 어떻고 2001년이면 어떻겠는가? 그건 인간이 지나친 상징성을 부여하고 싶은 새날, 새해, 새천년을 기대하기 때문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29살의 마지막 날이나 30살의 첫 날이나, 어제와 같은 오늘일 뿐이라고 지나친 호들갑이라고 말했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았다. 이 책은 내가 얼마나 감상적으로 시간과 공간을 정의내리고 있는지 알게 했다.

 

이 책의 저자인 쳇 레이모는 과학과 자연뿐만 아니라 좋은 교수일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의 글쓰기방식은 친절했다. 수학과 과학에 열등한 나에게 천문학에 대한 접근을 쉽게 접근시켜주었을 뿐만 아니라 시간과 공간에 대한 과학적 접근을 진솔한 글쓰기를 통해 딱딱한 껍질을 벗기고 말랑말랑한 속살을 간직했음을 알게 해줬다.

 

그리니치 천문대는 1675년 찰스 2세가 그리니치에 있는 왕실 공원 부지 제일 높은 곳에 국립 천문대를 지으라는 왕명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자연과 과학에 대한 호기심이 아니라 멀리 떨어져 있는 여러 식민지를 약탈하기 위한 해군의 안전과 무역의 번성을 위해 지어진 것이다. 위도의 경우 지구의 어떤 위치에서든 남쪽과 북쪽으로 나타내는 데는 모호함이 없어 단번에 결정되어지지만 경도의 경우 정확한 지점을 정하기는 어렵다. 영국 왕실은 그 경도를 그리니치에 천문대를 건설함으로 경도 0도를 지정한 것이다.

위도의 확인은 해나 별 같은 천체가 해당 지역 자오선을 지날 때 수평선과 이루는 각을 재기만 하면 되지만 경도는 출항했던 항구의 시간을 정확하게 가리켜 줄 시계가 있어야만 했다. 지구는 시간당 15도씩 자전하므로 배가 있는 곳의 하늘에서 태양이 가장 높은 곳에 당도했을 때 그리니치 시간을 유지하던 선상의 시계가 오후 1시를 가리키면 배는 동쪽으로 15도 항해했다는 의미가 된다. 시간과 거리는 맞교환되면서 안전하게 항해할 수 있는 것이다.

 

가장 정확한 시계를 만들기 위한 노력은 곧 우주의 시간을 재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째깍째깍 소리는 우주가 움직이는 가장 큰 소리였던 것이다. 그런 그리니치의 자오선을 국제적으로 인정하는 과정도 무척 흥미 있었다. 프랑스는 영국에 본초 자오선을 양보하는 대신 미터법을 국제 표준으로 만드는 조건을 걸었다. 이로써 1884년에 경도 0의 본초 자오선과 표준시에 대한 구제적인 합의가 이루어짐으로써 공간과 시간의 세계화가 단행되었다.



우주와 인간의 시간과 공간의 기준선인 그리니치 본초 자오선.

그 자오선을 따라가다 보면 에닝이 공룡 화석을 발견한 라임리지스 절벽이 있고 화석 사기극의 무대인 필트 다운과 다윈이 살던 다운 하우스, 헤리슨의 해상 시계가 놓은 그리니치 전문대, 과학자의 성역인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 뉴턴의 방이 있는 케임브리지 트리니티 칼리지가 있다. 우연의 일치 치고는 운명에 가까운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쳇 레이모는 여기서 최초의 지구 지도를 그렸으며 우주 공간을 이야기했고 지구의 과거와 인간의 과거, 우주시간과 공간을 끄집어낸다.

 

본초자오선을 따라간 쳇 레이모의 천문학 산책은 무척 흥미로웠고 재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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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근아 놀자!
봉현주 지음, 황명희 그림 / 삼성당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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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1박 2일을 본적이 없다.  상근이의 실체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개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남자랑 산다.  애완견은 사절이다.  공원이나 음식점으로 애완견을 들고 오거나 애완견을 키우는 음식점은 들어갔다가도 다시 나온다.  아파트에서 짖지 못하게 수술한 개는 한없이 측은해 한다.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한 사물에서도 극명하게 나누어지는 남자.  그 남자의 오래된 앨범에는 하얀 진돗개 한 마리가 있다.  어찌나 자랑스러워하는지 개에 대해서는 무심했던 나까지 개에게 관심을 갖게 했다. 




휴가차 두륜산을 산행할 때였다. 두륜산 암자인 북암에 있던 병든 진돗개에게 초코파이를 자기 손에 올려놓고 먹이는데 사실 나는 겁이 났다.  말이 진돗개지 몸은 여기저기 진물이 흐르고 털은 덕지덕지 뭉쳐있고 눈에는 눈곱이 눈을 덮을 지경에다 손 위에 날름거리는 혀와 이빨은 무척이나 날카로워보였다.  먹다 남은 부스러기까지 싹싹 먹어치우고는 손까지 물어버릴 듯한 상상에 뒷골이 서늘해질 정도였는데 그 남자 눈 하나 깜짝 안한다. 

그 후로 그 절을 지키던 꼬질꼬질한 하얀 진돗개가 가끔 생각난다.  배는 홀쭉했는데 스님들이 산짐승들에게 보시하려 내 놓은 음식들은 먹지 않았다.  쉬고 있는 우리들을 힐긋힐긋 바라보던 어린 동자승의 주위를 맴돌며 장난치던 그 천진한 모습.  오래 전의 일임에도 쉬 잊혀지지 않는 것은 아마도 나랑 사는 남자와의 교감이 느껴졌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 둘의 교감을 보며 전생에 저 개는 내 남자랑 어떤 관계였을까를 얘기하게 하기도 했다.  산마루를 올라 멀어질 때까지 사라졌다 다시 나타났던 개의 앞모습은 분명 그리움이나 아련함 같은 것이 느껴졌다. 




십여년 만에 다시 찾은 두륜산의 울창한 숲길을 걸으면서 우리는 북암에 살던 그 진돗개가 지금도 살아있을까 라며 안부를 궁금해 했다.  “아마도 죽었겠지.  그때도 아파보였는데 개는 수명도 짧으니.... ”라고 답하는 그 남자도 눈빛이 아련해졌던 걸보면 그도 분명 잊지 않고 있었을 것이다.  




이 책의 상근이(개)와 재동이.  재동이는 안경이 없이는 세상을 보지 못할 정도의 시력을 가진 허약한 아이였다.  벌을 치는 바위아저씨와 사는 상근이와 만나게 된 것은 그런 재동이가 안쓰러워 재동의 아빠가 상근이가 사는 별동마을에 재동이를 데려오고부터다.  재동이와 상근이의 우정이 이 책의 주요내용이다.




자식을 품어보니 욕심이 생긴다.  그러나 늘 떠나보내는 뒷모습을 생각하며 키우련다.  엄마의 욕심 속에서 멍든 재동이의 모습을 나도 답습할까 염려했다.  어린아이의 눈높이에서 읽어야할 책이었다.  어찌 읽으면 시시할 수도 있었겠지만 내 아이가 아빠의 심성을 닮아 하찮은 동물이라고 홀대하지 않고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품었으면 하고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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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초 2
김탁환 지음 / 민음사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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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이 조금씩 차오르고 있다.

달이 기울고 차오르는 순간순간 신라의 스무 살 어린 불제자는 바랑을 메고 반도의 꼬리인 서라벌을 떠나 바다를 만나고 이글거리는 사막의 한 낮과 얼음장 같은 밤을 보내고 설산을 넘어간다.

 

나는 늘 길이 궁금했다. 저 길을 넘어서 가면 과연 뭐가 나올까? 저 산마루를 지나면 어떤 세계가 있을까? 시골에 버스가 다니면서 부터는 버스 뒤꼬리를 따라 뛰어다녔다. 매연 냄새가 그렇게 고소하고 알싸할 수가 없었다. 단순한 냄새가 아니라 그것을 후각을 자극하는 그리움이었고 가고픈 곳의 소식을 전해주는 전령사였다. 버스가 언덕을 넘어 다른 마을로 영영 사라질 때까지 한 참을 서서 손을 흔들었다. 내 키보다 큰 아빠의 자전거로 폐달을 굴리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아빠가 자전거를 집에 두는 주말이면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자전거를 끌고 길을 헤매고 다녔다. 언덕을 넘었고 저수지에 갔고 먼 친구네 동네로 가서 냇가에 한참을 앉아 있곤 했다. 세계를 다 갈수 있을 것 같았다. 자전거만 있으면.

그러다 어디선가 ‘실크로드’라는 이름을 유럽보다 먼저 알게 되었다. 그리곤 상인이 되고 싶었다. 서역만리 바랑하나만 짊어지면 상인이랍시고 실크로드를 무조건 통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다 진짜 비행기를 타고 유럽을 갔다. 실크로드. 내 눈 아래로 깔아보며 갔다. 이글거리는 사막의 그 뜨거움은 내 가슴에서 일어오는 바람과 같았다. 눈 덮인 설산은 내가 넘어야할 구도의 길이었다. 구름 밑의 실크로드는 내 환상 그대로다. 여전히 꿈이 많고 환상을 즐기는 나는 고대의 상인이 아마도 나의 전생이 아니었나? 아니면 몽골고원을 날뛰는 유목민의 후예였지 라며 쉬이 그 환상을 접지 않는다. 어떤 이는 나에게 순진하다느니 철이 없다느니 현실을 직시하라고 말하지만 난 속으로 뇌까린다. 현실이 뭔데? 어느 삶에나 있을 고통을 몰라서 그러는 게 아니지. 이 삶은 나에게 여인숙과 같으며 부표를 꿈꾸는 여행길일 뿐이다. “여행자에겐 바로 지금 이 순간 발바닥에 닿는 길이 전부입니다.” 내 발바닥이 닿는 이곳이, 나에게 부끄럽지 않은 행복하고 기쁨의 길이었으면 할 따름이다.

 

혜초라는 인물. 그는 나에게 구도자이며 불제자이기 이전에 ‘길’을 나선 자이다. 그의 발바닥이 낳은 길은 천축국(지금의 인도)와 티벳,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이란, 우즈베키탄, 파리르 고원, 세계의 지붕인 타슈쿠르칸, 중국에 이르는 대장정이었다. 지금도 오지라 말하는 그 길을 발바닥에 의지해 걸은 것이다.

 

어떤 소재를 만났을 때 쓰는 자는 고민한다. 어떤 관점으로 풀어나갈 것인가? 그 사람의 다양한 속내들 중에 나는 무엇을 중심에 둘 것인가를 두고..., 저자 김탁환도 분명 고민했을 것이다. 혜초는 과연 불제자인가? 구도자인가? 여행자인가? 그저 방황하는 인간일 뿐인가? 그 어느 것도 아니라고 했지만 이는 동시에 그 모든 것을 안고 있다. 혜초와 고려인의 피가 흐르는 당나라 장수 고선지, 그리고 무희 오름과 내림, 신라 상인 김란수. 책을 읽다보면 이것이 과거였나? 꿈이었나? 미래인가?의 흐름을 놓고 다시 읽기를 반복한 부분들이 있었다. 역사적 사실을 놓고 소설을 만든다는 것이 이렇게 힘든 작업이겠구나를 느꼈다. 물론, 나는 역사적 사실인 왕오천축국전의 6,000자를 미리 보진 못했지만 말이다. 기회가 된다면 신라의 불제자 혜초가 쓴 그 책을 읽어보고 싶다. 불제자의 내면보다는 인간의 오욕이 더 많은 이 작품을 보면서 혜초의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듯 말이다. 내 발바닥의 내 딛음이 단순한 공간의 이동이 아니라 시공간의 이동을 꿈꾸는 것처럼 말이다.

 

꿈꾸는 자의 갈망, 길에 대한 호기심, 여전히 나에겐 유효한 것임을 알게 한 책읽기였다.

 

*

 

이제 소멸만이 남았고 다시는 여행을 떠나지 않을 것이며 기(記)와 록(錄)에 매달리지 않을 겁니다. 항하의 한 알 모래 알갱이로 돌아겠습니다. p339

 

"그리운가?“

“그러하옵니다.”

“하면 왜 돌아가지 않는가?”

“그립다 하여 모두 돌아간다면 그리움은 사라지고 말것이옵니다.

때로는 가지 않고 그리움만으로 간직하고픈 일들도 있사옵니다.”

p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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