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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도시를 디자인하다 2
정재영 지음 / 풀빛 / 2008년 11월
평점 :
오후 4시의 나른한 빛이 고왔던 도서관이었다. 복도가 아니라 난간이어서 문을 열고 나오면 바로 금강하구가 내려다 보였다. 나를 설레게 했던 국어선생님은 늘 그곳에서 책을 보거나 담배를 피우셨다. 긴 머리 고등학생인 나는 선생님이 계신 그 도서관 주위를 맴돌 때가 많았었다. 어느 날 선생님이 조용히 날 부르셨다. 빛바랜 책들 위로 먼지가 뿌옇게 내려앉은 알싸한 옛 냄새가 곰팡내와 어울려 눅눅했던 그 도서관으로. 그날은 키 큰 은행나무의 노란 잎이 나비춤을 추며 하무도 없는 교정에 사뿐히 내려앉고 있었다.
선생님은 내가 쓴 독후감을 읽고 계셨다.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 철학에 관한 책을 읽고 쓴 독후감이었는데 감수성 예민했던 내가 꽤나 그를 옹호했었나 보다. 내심 걱정이 되셨던 게다. 난 그저 선생님이 날 따로 부르셨다는 것에 설렜던 기억뿐이다. 그리고 엉뚱하게도 쇼펜하우어가 늘 궁금했다. 그 사람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철이 조금 들기 시작할 무렵 쇼펜하우어가 여성을 폄하했고, 종교를 거부했다는 이유만으로 싫어했다.
철학은 선생님이 내게 그랬던 것처럼 늘 그 만큼의 거리를 유지했다. 그러다가 얼마 전 홍세화선생님의 강연회에서 근대철학이 현대사회에 미친 영향과 지금도 유효한 이론들의 정연함에 감탄했다. 철학적 삶이 한 사람을 참으로 매력적으로 만들기도 하는구나. 내 행동과 내 생각이 어디에서 기원되었는지 그리고 앞으로의 방향은? 그것이 궁금해졌다.
나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할까? 이 책은 20세기 비엔나와 파리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14세기에서 16세기의 피렌체, 17세기의 암스테르담과 에든버러, 19세기 후반의 런던과 바젤, 19세기 전반의 베를린, 18세기 계몽 시대의 쾨니히스베르크, 그리고 나서 기원전의 아테네, 중세의 유럽으로 끝을 맺는다. 그 방식이 독특하다. 생각이 지형을 넘나든다.
이 책 들춰볼수록 참 맛이 난다. 씹을수록 고소하다.
먼저 도시를 소개한다. 도시의 지리적, 문화적, 역사적 특징. 그리고 그 도시에서 성장한 철학과 철학가를 소개한다. 마지막으로 그 도시에서 왜 그런 철학이 발생하고 현대가 주목해야할 점은 무엇인지 말해준다. 어렵고 난해하기만한 철학의 접근을 쉽게 했다.
저자는 철학의 입문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
“철학은 최초의 출발지점을 잡는 일이 가장 어렵다. 이상적으로 말하자면, 철학의 출발점은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대목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다. 우리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지점에서 시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철학의 역사란 보편타당한 잣대를 세우기 위한 역사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말이 딱이다. 깊이 있는 부분에서는 상당히 어려워지기도 하는데 통사적 서술의 딱딱함을 여행이라는 형식을 취해 흥미롭다. 더군다나 유럽의 2/3가 중세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현재를 생각할 때 매력적인 과거로의 시간여행이 함께 하고 있으니 더욱 흥미롭다. 철학의 흐름이 전시대와 단절이 아니라 상호소통이라는 부분에서도 이와 같은 구성은 상당히 적절하다고 본다.
2권으로 구성된 2,000년의 철학역사를 다 서술할 수 없는 것이 아쉽다. 그리고 아무리 옮겨도 저자만큼 옮길 자신도 없다.
그렇지만 이말 만은 꼭 옮겨보고 싶다.
근대가 중세의 단절인가 연속인가 하는 논의는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근세의 단절인가 연속인가 하는 정체성에 대한 고민. 이는 내가 홍세화선생님의 강연에서 느꼈던 것이기도 했다. 철학이 과연 복잡한 현대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 말이다.
저자는 “중세가 우리에게 준 선물 세 가지, 곧 대학과 의회, 그리고 정치에서 분리된 교회는 바로 아리스토텔레스 제자들의 작품이며, 플라톤의 제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들이 구축한 중세의 질서를 무시하고 새로운 역사의 도래를 선언하면서 아예 판을 뒤집어 버리고 이는 르네상스가 시작된 피렌체에서 근대를 열게 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책의 끝을 중세로 잡은 것은 ‘중세의 모습은 바로 오늘의 거울’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아테네 학당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깊고 깊은 사유의 뿌리가 그리고 방향성을 알 수 없을 때 우리는 다시 아테네로 간다는 것이다.
‘과학적 세계관’이 가져다 준 ‘세계 표준’과 ‘포스트모더니즘 세계관’이 가져다 준 ‘다문화주의’. 이는 그가 현대 철학을 ‘비엔나’와 ‘파리 ’에서 시작한 이유이기도 하다.
내 서평이 좀 어려운가? 그렇다면 정재영선생님이 쓰신 “철학, 도시를 디자인하다”을 참고(?)하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