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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의 높은 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17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을 읽기 위해 그이 전작인 『파이 이야기』를 읽었다. 동족은 없는 망망대해에서 파이가 삶을 이어가는 시간을 통해 작가를 먼저 만나고 싶었다. 삶과 죽음 사이에서 살아남은 사람이 느끼는 절대 상실과 고독, 그리고 그들이 살아내는 삶은 전작과 이어지면서도 더 진지했고, 더 섬세했다.
‘1부. 집을 잃다’에서 토마스는 아내와 아들을 잃고 포루투갈의 높은 산에 남겨진 율리시스 신부가 만든 십자가를 찾으러 여행을 떠난다. 그 시대에는 정말 희귀했던 자동차라는 물건과 함께. 그와 함께 여행을 떠나며 인도에서 마주친 수많은 눈동자들이 떠올랐다. 소와 돼지와 개, 닭, 원숭이와 사람들이 함께 하는 시골길 비포장도로를 내달리는 깨끗한 자동차 안에 타고 있는 동양인을 바라보던-그들의 시야에서 자동차가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던 그들의 시선은 부담스럽기도 했다-그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중간에 화장실이 없어 결국 노상에서 일을 해결했던 민망한 웃음이 떠올랐다. 겐지스 강에서 보고 느낀 죽음과 그 죽음을 함께하는 살아남은 사람들의 기도가 기억났다.
노예선에서 노예들에게 신의 가호를 빌어주던 율리시스 신부가 시간이 지나면서 느끼던 신부로서의 무력감. ‘한 영혼이 어디 출신인가가 중요할까? 에덴의 추방자들은 다양하다. 한 영혼은 하나의 영혼으로서 축복받으며, 신의 사랑으로 인도되어야 한다.’고 믿은 그를 ‘위계’를 무시했다는 이유로 파문한 주교. 그들의 이야기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1631년 율리시스 신부의 일기 속에 등장하는 ‘노예’는 400여년이 흐른 2017년에도 존재한다. 리비아 난민들을 경매에 부쳐 누군가의 노예로 만드는 것이 수용되는 현대사회에도 주교가 말하는 ‘지상의 위계’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 위계는 신이 만든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는 투이젤루라는 마을에 있는 교회에서 율리시스 신부가 만든 십자가를 대면한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는 신이 아니라 진화된 유인원이라고 확신하는 그에게 예수는 신이 아니었다. 그가 신이었다면 그의 간절함을 무시하고 그가 사랑하는 아버지, 아내, 아들을 순식간에 데려가지는 않았을테니까... 그는 투이젤루 마을에 도착하기 전 한 아이를 죽게 한다. 자동차 사고였다. 그가 아들을 잃었듯이 누군가에게서 아들을 잃게 했다. 그는 아이의 주검을 길에 버려두고 떠났다. 누군가 그 아이의 주검을 들고 뛰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교회에서 토마스는 마리아 도르스 파수스 카스트루를 만난다. 그녀의 남편은 라파엘 미구엘 산투스 카스트루이다.
1부를 접고 ‘2부 집으로’에서 에우제비오 로조라의 이야기를를 접하면서 토마스의 이야기는 이렇게 끝나는 것인가란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2부를 읽어가면서 보다 더 이야기에 대한 흥미가 생겼고 눈을 뗄 수 없게 되었다. 2부에는 1부에서 토마스가 만난 마리아와 라파엘, 그리고 토마스가 그들에게서 앗아간 아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1938년 12월 그믐, 에우제비오의 아내 마리아–다리 난간에서 떨어져 죽었으나 자살이지 타살인지 모른다-가 그의 부검실로 찾아와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과 예수의 이야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예수의 비유가 중심이다.
“왜 진실은 허구라는 도구를 쓰려 할까요?”(p.184)
왜 이 문장에서 내가 멈추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작가의 전작인 『파이 이야기』에서, 그리고 이 책에 등장하는 이야기들에서 사실이라고는 받아들일 수 없는 장면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증명되지 않는 허구이나 그 무엇보다 진실한 삶을 드러내는 장면들이었다.
이 이야기에서 사실은 남편 라파엘의 시신을 가방에 넣어 포루투갈의 높은 산에서 온 마리아는 에우제비오에게 부검을 부탁하며, 그가 죽은 이유가 아닌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알게 해달라고 한다. 부검 중에 마리아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남편과의 사랑, 아들의 죽음, 아들의 죽음 이후의 삶이었다. 포루투갈인 사이에서 태어난 금발의 파란색 눈을 가진 아들, 아들의 죽음은 그들을 죽음보다 더한 고통에서 살게 했다. 그 아들은 1부에서 토마스와 연결되어 있다.
라파엘의 시신에서는 토사물, 은화, 나무피리, 망치, 달걀, 칼, 포크, 카드, 주사위, 말린 꽃잎 등의 물건들이 나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의 복부에 평온하게 휴식을 취하며 누워있는 침팬지 한 마리와 침팬지를 보호하듯 안은 갈색 새끼 곰이 나온다. 그녀는 침팬지와 새끼 곰을 껴안은 채 남편의 몸에 들어가고 에우제비오는 봉합한다.
그녀는 그들을 품에 안고 남편의 주검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죽음을 통한 행복한 삶을 선택했다.
사실인가? 허구다. 그렇다면 허구라는 도구를 통해 작가가 드러내고자 하는 진실은 무엇일까? 라파엘의 몸속에서 나온 물건들을 통해 마리아의 말처럼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침팬지와 새끼 곰은? 새끼 곰은 그들의 아들이고, 침팬지는 라파엘이다. 아들을 지키지 못한 그의 죄책감, 그리움, 사랑, 슬픔이 담겨있다. 더 이상 볼 수도 들을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어린 아들을 그리는 그의 아픔이 느껴졌다. 누군가 갑자기 사라졌을 때의 상실감을 가장 많이 느낄 때는 시각도 청각도 아닌, 촉감이었다. 더 이상 만질 수 없다는 것, 사진을 쓰다듬는 것으로는 결코 충족될 수 없는 서글픔... 어쩌면 토마스와 라파엘이 아들의 죽음 이후 뒤로 걷기를 선택한 것은 시간을 되돌리고 싶은 간절함을 보여주는 것인지 모른다.
이제 남은 에우제비오는 아내의 죽음으로 인한 상실감으로 흐느낀다. 그믐날 그를 찾아와 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예수의 삶과 죽음을 이야기한 마리아는 이미 세상을 떠나 실존하지 않는 존재였다. 그러나 그 대화의 시간엔 진실이 담겨있었다.
그렇게 2부가 끝나고 이야기는 1981년 피터의 이야기로 넘어간다. ‘3부 집’. 물론 1부와 2부와 연결되어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든다.
피터는 아내를 잃었다. 그리고 우연한 기회에 만난 유인원 오도를 입양하여 캐나다를 떠나 자신의 고향인 포루투갈의 높은 산 –투이젤루- 으로 떠난다. 아니 집으로 돌아간다. 그가 우연히 살게 된 집. 그곳은 라파엘과 마리아의 집이었다. 그곳에서 피터와 오도는 서로 교감하면서 여유롭게 살게 되고, 우연히 에우제비오에게 남겨졌던 – 라파엘의 몸에서 나온 물건들이 담긴- 마리아의 가방과 에우제비오의 검시 의견서를 발견하게 된다. 그 후에 밝혀지는 일면의 사실들. 오도와 함께 한 마지막 산책에서 피터는 전설적인 동물 이베리아 코뿔소를 발견하게 된다. 코뿔소를 발견한 날 피터는 조용히 죽음을 맞이하고, 오도는 피터의 주검을 진심을 다해 안아준다. 라파엘의 침팬지처럼. 그리고 오도는 이베리아 코뿔소가 있는 방향으로 내달린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들과 그들에게 중요한 무언가를 알고 있는 포르투갈의 높은 산과 1부에서 3부를 관통하는 이베리아 코뿔소와 침팬지란 존재 안에 감추어진 비유 속에서
“여기가 집이야. 여기가 집이야. 여기가 집이야.(Esta é a minha casa)”(p.26, 253)
‘너도 알잖아? 그 여자는 죽어야 해.’(p. 205, 205, 385)
란 말이 반복되며 누군가의 죽음을 통해 집-깨달음을 통한 궁극의 안식처-으로 돌아오는 사람들의 진실된 삶이 펼쳐진다. 전작보다 더 섬세하게 그려지는 인물들의 삶이 끝나는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엄지 척!
나는 자유로운 자들이 아니라 자유롭지 못한 자들의 목자가 된다.
자유로운 자들에겐 자신들의 교회가 있다.
내 무리의 교회는 벽이 없고 주님께 이르는 천장도 없다.(p. 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