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파이 이야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동물원에서 뛰어놀던 피신 몰리토 파텔.
피싱이라는 놀림이 싫었던 아이는 자신을 파이라고 설명하는 재치가 있었고, 기독교도였고, 힌두교도였고, 이슬람교도였다. 왜 종교는 하나여야 하냐는 엉뚱한 질문에, 종교의 자유라는 말 속에 숨어 있던 구속-하나의 유일한 종교를 가져야 한다-을 발견하게 된다.
해변 산책길에서 신부와 힌두 사제와 이슬람 지도자를 한꺼번에 만난 장면에서 웃음이 터졌다. '사랑'이라고 말했던 사람들이 저마다 자신의 종교 안에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자신의 신의 우월성을 주장하며 얼굴을 붉히는 장면에서 인간에 대한 신의 '무한한 사랑'은 자신을 믿지 않는 인간에게는 주어지지 않는 '조건적 사랑'이 된다. 피싱의 아버지가 주장한 '종교의 자유'에 대해 세 사람은 "옳습니다! '종교들'이 아니라 한 '종교'지요!"(p.93)라고 합의된 의견을 보인다. '종교들'이 아닌 '종교'의 자유. 그것은 곧 종교의 '자유'는 종교의 '구속'과 같은 말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랬다. 지금까지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었는데... 그렇게 행복했던 어린 피싱은 캐나다로 가는 도중 배의 침몰과 함께 태평양 한 가운데에 오랑우탄과 하이에나, 얼룩말과 뱅골호랑이와 남게 된다.
바나나를 타고 온 오랑우탄, 다리가 부러진 얼룩말, 사나운 하이에나, 그리고 뱅골 호랑이 리처드 파커....
그 끝이 보이지 않는,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곳이 계속되는 바다 위에서 호랑이와 단 둘이 남게 된 어느 날, 피싱은 새로운 희망을, 용기를 갖는다. 피싱이 리처드 파커를 길들이려 노력하며 함께 살 수 있었던 것은 삶에 대한 희망보다는 외로움때문이었다. 죽음을 옆에 두고 있지만 죽음보다 더 두려운 외로움을 떨칠 수 있었으므로.
그렇기에 멕시코 해안에서 자신이 살았음에 기뻐하기 보다 아무런 인사도 없이 떠난 리처드 파커와의 이별을 더 슬퍼했는지 모른다. 그 장면에서 문득 리처트 파커는 '나'이면서 '나'가 아닌, '나'의 무의식 속에 있던 또 다른 '나'가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태평양 한가운데서의 삶을 견디기 위해 나의 무의식에서 터져 나온 또다른 존재. 그러므로 멕시코 해안에서의 이별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피싱 몰리토 파텔이 유일한 생존자가 되는 순간이었고, 더이상 바다 한가운데에서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순간이었고, 무엇보다 더이상 외로워하지 않아도 되었므로...
그가 인터뷰에서 밝힌 동물이 아닌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내용이 사실인지, 동물들과 함께 한 이야기가 사실인지, 그 둘다 거짓인지, 무엇이 진실인지 그것은 알 수 없다.
그러나 나는 동물이 등장하는 이야기를 듣고 싶다. 사람들이 현실적인 이야기라고 받아드리기 어렵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나는 피싱이 리차드 파커와 함께 한 구명보트 위에서의 수많은 밤을 기억하고 싶다. 빛나는 별빛과 돌고래의 투명한 눈. 하늘에서 내리치는, 폭발적인 힘으로 잠깐 나타났다 사라진 거대한 흰 나무를 기억하고 싶다. 흔들림조차 없는 바다와 거세게 몰아치는 파도, 그리고 그 속에서 삶을 향해 견디고 나아가는 소년과 호랑이를 아주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다. 하늘과 바다 사이 온갖 바람을 견디며 온갖 밤을 보내고 아침 태양을 맞이한 시간들을. 그리고 이제는 그들을 붙들고 있던 원을 벗어나 '종교들'의 자유를 누리며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바란다.
그 둘 사이에, 하늘과 바다 사이에 온갖 바람이 있었다.
또 온갖 밤과 온갖 달이 있었다.
조난객이 되는 것은 계속 원의 중심점이 되는 것과 같다. 아무리 많은 것이 변하는 것 같아도-바다가 속삭임에서 분노로 변하고, 상큼한 하늘이 앞에 보이지 않는 흰색이 되었다. 칠흑같이 까맣게 변해도-원점은 변하지 않는다. 당신의 시선은 언제나 반지름이다. 원주는 대단히 크다. 사실 원들이 겹쳐 있다. 조난객이 되는 것은 춤추듯 겹쳐지는 원들 사이에 붙들리는 것이다. (p.2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