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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 개정판
김훈 지음, 문봉선 그림 / 학고재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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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가까이 있으나 말이 실현되는 현실은 멀다는 생각이 내내 들었다. 전장에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 임금이 직접 군대를 지휘하며 선봉에 섰던 때가 조선 역사에 있었던가? 임금과 대신들이 궁궐 안에서 무수한 말을 쏟아낼 때 민초들은 전장에서 맨몸으로 말에 밟히며 피를 쏟았다. 민초들이 전장에서 죽어가며 지켜야 할 것은 무엇이었을까? 청나라 군사가 오면 얼음길을 건네주고 곡식을 얻고자 하던 송파나루의 뱃사공의 고백에서, 조선의 세습노비였으나 청의 역관이 되어 조선을 욕보인 정명수의 말에서 그들이 지키고 싶었던 것은 조선이라는 나라가 아닌 이었음을 깨닫는다.

임금은 살고자 몸부림치는 백성들을 뒤로하고 이미 죽어간 자들의 위패를 가지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작은 행궁 안에서 다시 말들이 쏟아졌다. 그러나 그 말들은 삶이 없는 말이다. 맨 앞에서 성을 지키는 군사들을 직접 보지 못하고, 성 안에서의 말라가는 삶을 보지 못한 채 그저 글과 말로써 보고 받은 것들을 그것조차도 자신들의 생각을 담아 왜곡한 채로 사실이라고 믿었다. 380여년이 흐른 지금이라고 다른가? 지금도 위정자들이 국회의사당 안에서, 자신들의 당사 안에서 쏟아내는 말들 속엔 정치만 있을 뿐 은 없다.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나날을 촛불로 밝혀 다시 세운 나라, 정권. 그러나 그 속엔 각자의 욕구가 숨어 있었다. 과거에서 미래까지를 아우르는 욕구. 새로운 정권이 세워지면 그 욕구들을 이룰 수 있으리라는 삶의 기대. 그러나 역시 그 삶을 이루는데 있어 위정자들이 하는 것은 여전히 뿐이다. 시민들과 함께 걷고, 함께 사진을 찍고, 함께 밥을 먹는다고 해결될 일이었던가?

지금도 그들은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을 만큼 편의시설이 잘 갖추어진 그 곳에서 글자가 적힌 문서를 보내 자신들이 필요한 자료를 조사해서 기한 내에 보고하라고 한다. 그럼 그것을 받은 사람들은 다시 그 문서를 아래 부서로 보낸다. 그렇게 아래로 아래로 내려간 글들이 적힌 문서가 닿은 최종 목적지에서는 열악한 환경에서 도저히 담당할 수 없는 양의 업무를 할당받았다는 말단 책임자가 기한 내에는 불가능한 일임에도 믿기지 않지만 보고서의 형식을 갖춘 글을 적어 위로 위로 보낸다. 그 문서가 시작되어 끝난 종착지에서는 그것을 삶이라 믿고 다시 말을 한다. 그래서 그 말들은 삶과 닿아있지 않다. 욕구를 채울 수 없다. 그래서 삶은 늘 정치를 의심한다. 그러니 지금도 여전히 삶은 수많은 뱃사공을 낳고 더 많은 정명수를 낳는다.

김상헌과 최명길. 어느 누구를 비난할 수도 지지할 수도 없다. 자신의 가치관을 믿고 지키는 것. 그것이 명분을 지키는 것이든 실리를 챙기는 것이든 잘잘못을 가릴 수 없는 것이다. 김상헌의 길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는 죽음마저도 감당할 수 있는 것이었으며, 최명길의 길은 삶을 도모하기 위해 죽음보다 더한 치욕을 견디는 것이었다. 그러니 둘 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길이었다.

그러나 그 길 위에 백성의 삶은 어디에도 없는 느낌이 든다. 백성의 삶은 어디에 있는가란 질문에 대한 답은 어느 쪽이냐는 최명길의 물음에 대한 이시백의 답에 있었다.

나는 아무 쪽도 아니오. 나는 다만 다가오는 적을 잡는 초병이오.”(p.218)

아무 쪽도 아닌, 그것이 자존심을 세우는 것이든 치욕을 견디는 것이든 상관없이 백성은 그저 살아남는 것이 길이라고, 내가 맡은 일을 하는 것이라고... 그것이 삶이라고 말해주는 것 같다. 그러나 살아내야 하고 살아가야 할 삶에서 지켜야 할 자존심과 견뎌야 할 치욕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닌 같은 것이라는 것에 생각이 멈춘다. 삶은 소설이 아니니까...

아내와의 첫날 밤 아내의 못생김에 놀라 소박을 놓고 쳐다보지도 않다가 아내가 어여쁜 사람으로 변하자 정을 나누고, 아내의 도력으로 과거에 급제하고 공을 세워 대장군이 되어 청을 무찌른 공을 세우게 되는 외모지상주의 모질이 남편이 등장하는 소설《박씨전》의 인물 이시백은 남한산성에서 누구보다 민초들의 삶에 가까이 다가가 그들의 삶을 온몸으로 느끼고 끝까지 그들과 함께 한 사람으로 등장한다. 그의 등장으로 《박씨전》을 만들고 읽은 백성들의 마음이 조금 더 헤아려졌다. 끝내 이루지 못한 욕구에 대한 원망과 위로... 자생능력.

산천에 봄은 오고 왕은 칸 앞에 나아가 머리를 조아리고 자신의 삶을 구했다. 왕의 식솔들과 척화파 신하가 볼모로 잡혀갔고, 수많은 백성들이 노예로 끌려갔다. 그리고 한 번도 제대로 싸워보지 못한 전쟁은 끝났고 왕은 서울로 돌아왔다.

서울로 돌아온 것, 그래서 다시 삶을 찾은 사람들은 누구인가?

왕과 품계 높은 신하들이 남한산성에서 말만을 쏟아내고 있을 때에도 그들과는 별개로 조선 천지 고을 고을마다 백성들의 삶은 지속되었다. 그러니 서울로 돌아와 다시 삶을 찾았다고 안도하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왕과 신하들이 성 밖으로 나가기를 기대한 백성들에게 왕의 청의 칸 앞에서 느낀 치욕이 전달되었을까?

글과 말만으로 삶을 갈구하던 지체 높으신 분들도 하지 못한 일을 하고 돌아온 서날쇠에게는 왕과 신하들이 떠난 곳에서 맞은 새 날이 다시 삶을 찾은 날일 것이다. 그러니 서울로 돌아온 것은 왕이고 다시 삶을 찾은 것도 왕일 뿐이다. 그 왕은 이제 청을 섬기면서도 청과 가까운 아들이 두려워 아들을 독살하는 아비로 남게 될 것이다. 삶과 닿아있지 않은 말로 이룬 역사는 그렇게 흘러가는 것이다. 두려움을 들키지 않으려는 속임수...

현대의 사람들은 정치에 관심을 가지라고 말한다. 국민의 수준이 국가의 수준이라면서... 그러나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 또한 위정자다.

글을 읽는 내내 마음이 답답했고 짠했다. 행궁에서 이루어지는 왕과 신하들의 대화는 답답했고 우스웠으며 안타까웠다. 성첩을 지키는 백성들의 뒷담화에 들어있는 현실에 다가가지 못하는 그들의 말들이 가정조차 하기 싫은 역사의 한 장면을 만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책을 덮으며 랄프 왈도 에머슨의 『세상 모든 것으로부터의 정중한 초대』에 등장하는 문구가 생각났다.

통치행위에 대한 풍자 가운데 정치라는 말이 담고 있는 의미에 필적할 만한 풍자가 또 어디 있겠는가? 이 말은 지난 몇 세기 동안 교활함을 뜻했으며, ‘국가는 하나의 속임수라는 것을 암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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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류시화 지음 / 더숲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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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지칠 때, 길을 잃었을 때, 나 스스로 내가 한심해질 때 작가 류시화가 들려주는 언어들은 내게 잠시 쉼표를 주었다. ‘상처에 너무 상처 받지 말 것, 실망에 너무 실망하지 말것, 아픔에 너무 아파하지 말 것-이것이 두번째 화살을 피하는 방법이다.‘(p.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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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이와 이어지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이들과 이어지기 위해 사람은 말을 만들었다."(p. 328)

 

한 회사의 사전편집부에서 《대도해》라는 사전을 편찬하기까지 15년이란 시간을 담고 있는 소설이다. 배를 엮는다는 제목이어서 그냥 지나치다가 '배'가 아닌 '말'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표지에서 발견하고 - 전공은 또 이런 것에도 작용하는구나 하며 - 대출. 일하는 틈틈이, 퇴근 후에 놓지 않고 읽었다. 여전히 종이 사전을 찾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지금껏 사전이란 것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잘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저 사전을 만든 사람들에 대한 감탄만 했을 뿐.

'아니 어떻게 이렇게 많은 단어의 의미를 정의할 수 있지?'

이 소설을 읽으며 사전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그 과정에 쏟는 사람들의 열정과 사전에 사용되는 종이에 쏟는 노력까지도 조금은 알게 되었다.

 

"사전은 말의 바다를 건너는 배야."(p.36)

 

내용은 간단하다. 23만여개의 단어를 담은 《대도해》라는 사전을 편찬하기를 계획하고 완성하기까지의 15년 세월 동안 사전 편찬을 위해 고군분투한 사람들의 이야기. 긴 세월동안 다양한 인물들이 서로에 대한 질투와 이해, 배려와 사랑, 존중과 존경을 통해 공동체가 되어가는 이야기.

늘 부스스한 외모에 말을 잘 하지 않고 남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나름 언어학 전공에 대학원까지 졸업한 인재라고 했지만-영업부 신입사원 27살의 마시메 미쓰야. 이름만큼 성실한(마시메-성실하다) 마시메가 외부 편집자인 아라키의 눈에 띄어 사전편집부로 들어가게 된 후 용례채집가인 감수자 마쓰모토, 편집자 사사키, 마시메와 전혀 다른 성격을 지녔지만 진심을 알아가는 니시오카가 만나 말의 항해가 시작된다.

마시메가 주인공일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뭘까? 그는 언어학을 전공했고, 수많은 책을 읽었다. 아라키가 질문하는 단어에 대해 누구도 생각하지 못할 정도의 많은 용례를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정작 주변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했다. 말이 없었고, 사람들과 가까워질 수 있는 말들을 표현하지 못했다. 그런 그가 말의 바다를 건너는 배를 만든다는 설정은 꽤나 흥미로웠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마시메도 매력적인 인물이지만 가장 인간적으로 공감된 것은 니시오카다. 왠지 가벼워 보이는 사람, 뺀질이 이미지를 지닌 그는 마시메의 재능을 가장 먼저 알아보았고, 그때문에 내적인 갈등을 겪었으며 처음부터 자신이 참여했던 편집부를 떠나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인정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편집부와 마시메를 진심으로 걱정했고 도왔다. 사랑에 있어서도 그는 고민했고 성장해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가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좋은 아빠가 된 모습이 소설 마지막에 등장하는 것에 괜히 반가움이 느껴질 정도로.

어찌보면 이 소설은『미생』과 별반 다르지 않은 직장인들의 삶을 다룬 이야기라고 봐도 될 것이다. 다만 『미생』엔 없었던 러브라인이 있다는 것이 차이. 마시메는 자신이 하숙하던 집 다케 할머니의 손녀인 가구야와 사랑하고 결혼하여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며 살아간다. 마시메가 보잘 것없다고 생각하던 마시메가 지닌 재능을 발견하고 질투하면서도 인정하고 마시메를 걱정하며 돕는 니시오카도 오래 알고 지낸-그래서 소중함을 잘 몰랐던, 그러나 늘 돌아가고 싶은-래미와 그만의 방법으로 사랑하고 결혼하여 행복하게 산다. 다소 늦게 합류한 기시베는 제시 영업사원인 미야모토를 만나 연애를 시작한다

어찌되었든 이들은 사전 편찬을 위해 그동안 모르고 있었던 자신의 재능과 성격까지 깨달아가며 작업에 몰두한다. 그러나 《대도해》의 출판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니시오카는 자신만의 방법으로 마시메를 도울 방법을 만든 후 사전 편집실을 떠나 선전광고부로 가게되고, 사전 출간을 위한 자금 부족 등의 이유로 다른 사전 편찬 작업을 병행하며 결국 15년이나 흘러 패션편집실에서 온 기시베까지 합세한 가운데 사전이 완성된다. 그 사이 마쓰모토는 사전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병으로 별세한다.

모든 이야기는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열정을 품고 일한 만큼 사전은 완성도를 높였고, 사전은 무사히 출판된다.

사전이 완성된 것을 기념하는 파티장, 아라키는 마지메에게 "내일부터 바로 《대도해》개정 작업을 시작하자고."라고 말한다.

 

"아무리 말을 모으고 뜻풀이를 하고 정의를 내려도 사전에 진정한 의미의 완성은 없다. 한 권의 사전으로 정리했다고 생각한 순간, 말은 다시 꿈틀거리며 빠져나가서 형태를 바꿔 버린다. 사전 만들기에 참여한 이들의 노력과 열정을 가볍게 비웃으며, 한 번 더 잡아 보시지 하고 도발하듯이."(p.92)

매일매일 새로운 말들이 만들어진다. 청소년들이 만들어내는 줄임말, 사회풍토를 반영하는 신조어들이 넘쳐나는 말의 바다에서 허우적댈 때가 많다. 대화에서 소외되고 때론 왜곡된 의미로 잘못 이해해서 오해가 생기기도 한다. 때론 너무 말이 없어 힘들기도 하다. 누군가와 말 한 마디 나눌 수 없는 혹은 정말 내가 필요한 말을 나눌 수 없는 상황도 있다. 늘 말을 사용하지만 말의 소중함은 몰랐다. 그러나 이 소설을 읽고 나서 '말'에 대해 잠시라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부디 좋은 배를 만들어 주게. 아라키는 간절히 바라며 눈을 감았다. 많은 사람이 오래 안심하고 탈 수 있는 배를. 외로움에 사무칠 것 같은 여행의 날들에도 든든한 동반자가 될 수 있는 배를. 자네라면 분명히 할 수 있어."(p.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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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확하게 언제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뭐 그당시까지는... 지금은... 글쎄?라는 물음표를 붙여본다.)라고 생각한 미국에 집이 없어 차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텔레비전으로 방영된 때가 있었다. 빈곤과 관련한 다큐멘터리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일자리에서 쫓겨나 집세를 못 내는 사람들이 자동차 안에서 먹고 자고, 동네 공중화장실에서 씻고, 봉사단체에서 나눠주는 음식들로 끼니를 해결하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집도 없이 지낸다는 것, 대한민국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다하지만, 설마 미국에? 라는 생각이 들었다.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바바라 오코너)』에는 딱 그런 처지의 사람들이 등장한다.

25센트 동전 꾸러미 세 개와 꾸깃꾸깃한 1달러짜리 지폐만 가득 들어있는 마요네즈통만 남겨두고 갑자기 가족을 떠나버린 아버지. 아버지의 빈 자리를 채우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두 개나 하며 고군분투하며 지쳐가는 엄마, 그리고 더이상 학교가는 버스를 타지 못하는 조지아와 토비. 이들의 삶은 마요네즈통 속의 지폐처럼 꾸깃꾸깃해졌다. 가장 친한 친구인 루엔과도 멀어지고 차 안에서 식은 음식(음식이라고도 할 수 없는)을 먹고 동네 주유소 화장실에서 대충 씻어 점점 지저분해지는 자신의 외모와 학교생활에도 지쳐가는 조지아의 소원은 단 하나, 집에서 사는 것이다. 그러나 엄마의 수입으로는 도저히 그 꿈을 이룰 수 없었던 그때 우연히 발견한 개를 찾는다는 전단지, 그리고 사례금 500달러. 500달러라니...

조지아는 그때부터 개를 훔칠 생각을 하고 철저하게 계획을 세운다. 노트에 한 자 한 자 개를 훔칠 방법을 적어가는 조지아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친구들이 영화 본 이야기를 할 때, 친구들이 그럴듯하게 과제를 만들어 오고 발표할 때, 발레학원 가방을 메고 가는 친구들의 뒷모습을 바라볼 때, 뒤돌아서 자신에 대해 수근거리는 친구들을 대했을 때... 조지아는 반드시 개를 훔칠 것이고, 사례를 받아 집을 구할 것이라는 다짐을 또 하고 또 했을 것이다.

누군가의 개를 훔치고, 개를 숨기고, 그 개를 찾아주는 척하며 사례금을 받겠다는 조지아의 계획이 너무나 치졸한 방법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지아는 절박했다. 자신이 지금까지 한 잘못 중에 가장 잘못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조지아는 포기할 수 없었다. 집에 대한 간절함. 그것은 깨져가고 있는 관계를 어떻게든 회복시키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모든 것이 계획대로 되지는 않는다. 살다보면 예기치 못한 변수들이 삶의 방향을 전혀 다른 곳으로 바꿔놓듯이 조지아의 계획도 무키 아저씨의 등장으로 얽혀버린다.

무키아저씨... 키다리 아저씨처럼 부자도 아니고 미남도 아닌 손가락이 세 개뿐인 손으로 악수를 청하는 무키아저씨는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 유일하게 세상으로부터 자유롭고, 여유로운 마음을 지녔고,  어려움을 겪는 사람에게 기꺼이 손을 내밀어 주는 사람이다. 무뚝뚝해 보이지만 눈에 보이지 않게 배려하고 도와주는 사람. 조지아가 윌리를 훔쳤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하지 않으며 조지아가 스스로 잘못을 깨달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고장난 엄마의 자동차 앞을 그냥 지나쳤던 그는 그들이 모르는 사이 자동차를 고쳐준다.

 

"때로는 말이야, 휘저으면 휘저을수록 더 고약한 냄새가 나는 법이라고-."(p.210)

 

잘못을 알았을때 멈추지 않으면 더 많은 잘못을 하게 되고,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올 수 있음을 조지아에게 경고하는 말일지 모른다. 조지아에게 더 늦기 전에 윌리를 주인에게 돌려주라고...

개를 훔쳤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조지아... 무키아저씨가 모든 것을 알면서도 자신에게 친절하게 대해 주었고, 자동차까지 고쳐주었다는 것을 짐작한 조지아는 윌리를 카멜라 아주머니 집에 돌려 놓는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하기 힘든 말, 조지아는 자신의 잘못을 사실대로 고백한다. 마요네즈 통을 채운 지폐들 이야기부터 무키아저씨의 이야기까지... 아주머니는 조지아에게 윌리의 산책을 부탁한다. 그녀 나름의 용서방법이었을 것이다. 조지아는 무키아저씨가 한 말을 되새긴다.

"살면서 뒤에 남겨놓은 자취가 앞에 놓인 길보다 더 중요할 수 있다."

 

 

조지아는 절박하다는 이유로 윌리를 훔치고 카멜라 아주머니에게 도움을 준다면서 사례금을 받으려했다. 그러나 그런 완벅한 계획을 뒤로 하고 자신의 잘못을 되돌렸다. 조지아가 개를 훔쳤다는 사실은 남았지만, 또한 잘못을 뉘우쳤다는 것도 남았다. 그리고 개를 훔치기 전의 조지아보다  잘못을 인식하고 '절대로 개를 훔치면 안된다.'는 깨달음을 얻은 조지아는 더 한층 성숙해졌을 것이다.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마무리에서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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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분마다 기억이 끊겨 모든 삶을 새롭게 시작하는 박사, 미혼모가 되어 아들을 키우며 씩씩하게 사는 가정부인 나, 그리고 나이보다 마음이 깊고 타이거스팀의 열렬한 팬인 아들-박사는 나의 아들에게 루트라는 별칭을 지어준다. 이 책은 이 세 사람의 우정과 사랑이 수학이란 아름다운 학문에서 시작되고 완성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자신이 입고 있는 옷에 기억해야 할 내용들을 적어 클립으로 덕지덕지 붙여 놓은 박사는 사고로 인해 머리를 다친 후 80분 간격으로 기억이 리셋 되게 되었고, 작은 별채에서 숫자와만 대화하며 함께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 박사의 가정부로 들어간 나는 박사를 이해하고 박사가 말하는 수식과 소수 등에 관심을 갖고 따뜻하게 대하고, 박사는 나의 어린 아들이 집에서 혼자 엄마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안 이후로 어린 아들을 걱정하며 하교 후 자신의 집에서 엄마의 퇴근까지 함께 할 수 있도록 해 준다. 그리고 박사는 아이에게 '루트'라를 별칭을 붙이고 나의 아들에 대해 지금까지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지 않았던 따뜻함과 배려를 보여준다.

박사는 루트에게 수학을 가르쳐주고 흥미로운 수학의 세계에 대해 설명하며, 자신의 연구에만 집중하던 시간을 내서 루트의 질문에 끊임없이 대답해 주고 격려하며 새로운 것을 가르쳐준다. 루트도 박사의 설명을 들으며 호기심을 갖고 열심이다. 내가 잠시 자리를 비운 날 루트가 손가락을 다치는 사고가 발생하자 박사는 평소의 힘없는 노인의 모습은 온 데 간 데 없이 루트를 업고 병원까지 달려가고 루트를 걱정한다. 외출을 전혀 하지 않는 박사와 함께 야구 경기를 보고 온 날 박사가 아파서 나는 아들과 함께 함께 박사의 집에 머물며 박사를 간호하고, 이 때문에 박사를 돌봐주는 박사의 형수- 박사가 사랑한 여인-로부터 해고를 당한다. 나는 박사의 메모를 늘 가지고 다니며 힘들 때마다 보면서 힘을 얻는다. 어느 날 형수는 나를 다시 불렀고, 박사는 형수에게 eπi+1=0라는 수식을 보여준다. 형수는 그 수식을 본 후 다시 나를 채용한다.

박사가 쓴 수식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식이라고 불리는 '오일러의 공식'이다. 책에서는 ''가 이 공식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도서관에서 수학 관련 책을 찾아보며 이 공식이 오일러의 공식임을 알게 되고 수학의 아름다움에 대해 느끼는 장면이 나올 뿐, 이 공식에 대한 다른 부연 설명은 없다. 이 수식을 본 형수는 왜 아무 말 없이 나와 루트를 허가했을까? 책을 읽는 내내 궁금했고, 이 공식이 가지는 무게감을 느끼는 만큼 답답했다. 아쉬운 마음으로 책을 반납하던 날 도서관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잡지코너에서 그 해답을 찾았다. 과학 잡지 N지의 표지에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식 eiπ+1=0’이라고 적혀있었다. 와우!

오일러의 공식 전체를 이해하기는 불가하였지만,

오일러의 등식에 등장하는 원주율 π, 허수단위 i, 네이피어 수 e는 수학계의 3대 선수라고도 할 수 있는 존재이며, 수학의 여러 장면에 등장한다. 오일러의 등식이 가진 아름다움을 실감하려면 이 πie의 태생이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라는 설명에서 나는 이 공식과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태생이 전혀 다른 박사, , 루트가 이루어내는 조합. 그들 사이에 만들어진 을 더하면 가장 완전한 수 ‘0’이 만들어진다. 그래서 그들은 함께해야 하는 것이다... ‘0’은 시작이고 끝이며, 끝이고 시작이니까...

 

그 이후로 이어진 박사와 나, 루트의 따뜻한 동행은 박사가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계속되고, 추억은 나와 루트의 마음에 남아 삶의 고마움을 느끼게 한다. 살면서 누군가와 이토록 따뜻했던 기억을 가질 수 있는 것도 축복이리라. 이 이야기를 읽는 내내 가 서술자이긴 하지만, 박사와 루트가 서로의 감정과 상황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서 함부로 대하지 않고 그 기억을 이어주기 위해 애쓰던 어린 루트가 참 대견했다.

사랑은 사랑으로 통한다. 그 기억이 80분으로 끝난다 할지라도, 80분이 이어지고 이어져 기억 저편에 머물렀을 기억조차 따뜻함으로 남을 수 있었다.

책을 덮으면서 미소가 지어졌다. 그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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