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스트러몰로지스트 1 - 괴물학자와 제자
릭 얀시 지음, 박슬라 옮김 / 황금가지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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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린 시절, 만화나 동화 혹은 자신 만의 상상 속에서 접했을 무서운 존재들이 있을 것이다. 아마 귀신이라는 걸 접하기 이전에는 대부분 괴물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사실, 귀신보다 괴물이 더 무서울 수도 있는 게 귀신은 실체가 없지만 괴물은 실체가 존재하는 생명체, 즉 직접적인 위해를 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먼 옛날에는 정체가 불분명한 생명체를 괴물로 치부했던 걸 생각하면 괴물이라는 명칭은 앞으로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보면 진짜 괴물들만 놓고 연구하는 학문이 생길지도 모르는 일이다. 몬스트러몰로지스트 같은 것 말이다.

 19세기 미국, 워스롭 박사라는 괴물학자의 집에 한 묘지 도굴꾼이 찾아온다. 도굴꾼은 자신이 묘지에서 괴상한 것을 발견했다며 박사에게 건내고 조수인 윌 헨리도 옆에서 거든다. 그 괴상한 것은 바로 시체를 휘감은 채로 죽어있는 안트로포바키라는 괴물이었다. 워스롭 박사는 이 괴물은 미국에서 서식하지 않는 다는 점을 들어 의문스럽게 여기는데...

 전체적인 느낌은 띠지에 나온 것처럼 러브크래프트+스티븐 킹이 딱이다. 다만, 개인적으로 또 분류를 하자면 괴물이 나오는 19세기 세계관, 제자인 윌 헨리가 느끼는 심상, 괴물 본인, 괴물학자는 러브크래프트 성향. 괴물학자가 사는 마을, 괴물학자와 제자를 제외한 인물들, 괴물이 나오는 부분을 제외한 공포스러운 부분, 괴물학자와 제자의 과거 및 사연, 괴물학자와 가까운 주변 인물은 스티븐 킹 성향으로 보였다. 여기에 다소 현실성을 부여하기 위해 넣은 실존 기록 같은 느낌까지 있어 괴물학에 대해 더 빠져들게 된다.

 괴물학자인 펠리노어 워스롭은 지금까지 봤던 괴팍한 괴짜 박사들을 통틀어 가장 최고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별종 그 자체다. 대화다운 대화라 볼 수 없어 헛소리로 보일 정도인 자기중심적인 언행과 생각. 이성적인 면은 전혀 찾아볼 수 없어 광적이라 해야될 정도인 학구열. 여기에 도저히 갈피를 잡을 수 없을 정도로 괴팍한 그의 성격까지. 이렇게만 보면 정말 고약하고 성격 더러운 괴물학자라 생각될 수도 있지만, 간간히 나타나는 그의 과거 행적을 보면 상당한 심리적 상처를 가진 인물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이런 특성 탓인지 모르지만, 맞는 말을 하긴 하지만 주연인물 치고는 상당히 민폐적이고 각종 문제점들이 상당해서 사건을 해결한다기 보다는 오히려 사건을 벌이거나 악화시킨다. 다만, 이제 막 시리즈를 시작하는 단계인 만큼 앞으로 워스롭 박사가 성장할지는 지켜봐야할지도 모르겠다. 그나저나 상당히 위험한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답게 아는 사람들도 상당히 위험한 인물이 많은 듯하다.(특정인물의 정체가 상당한 반전을 선사합니다.)

 이런 박사 옆에 붙어다니는 제자 윌 헨리는 그야말로 안타까움 그 자체다. 나이를 생각하면 주변 환경이 상당히 나쁘고 못 볼 것만 보게 되는 일이 많아 공포가 일상에 늘러 붙어 있다고 해야 될지도 모르겠다. 그가 주변상황을 판단하고 느끼는 모습은 딱 러브크래프트의 소설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묘사와 거의 흡사하다. 러브크래프트였으면 기절하거나 이성을 상실했을 부분은 다소 순화되어 윌 헨리의 감정 폭발과 트라우마로 대체된 것 같았다. 그래도 윌 헨리는 워스롭 박사의 어린 시절보다는 그나마 낮다고 생각되는 건 왜 일까? 아마도 워스롭 박사는 심리적 상처로 폭발해 나오는 괴팍함 속에서 자신이 아버지와 다를 바 없는 모습과 이런 자신의 모습에 위축되는 윌 헨리의 모습에서 어린 시절 자신을 봤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메인 괴물인 안트로포바키는 충격 그 자체라 해야겠다. 생김새는 그렇다 쳐도 이들의 잔혹한 살육행위는 그 어떤 고어물보다도 더하다. 크리처물의 정수, 진정한 괴물이 바로 이런 것이라 해야겠다. 문득 드는 생각이 있다면 뭐든지 원래 서식지에서 다른 곳으로 방출시키지 말자는 점이다. 국내 생태계의 외래종 문제를 사람에게 접목시켜보면 더 확실히 실감이 날 것이다.

 안트로포바키라는 괴물을 조사하고 연구하는 과정에서 사람의 가치에 대한 문제가 종종 나왔다. 이 문제는 괴물학자의 과거와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에 깊이 생각해 볼 여지가 있었다. 보통 이런 생각을 하는 이들이 없고 고민해보지 않을 지도 모르지만, 가까운 사람(특히 가족)에게 기대하는 만큼의 관심을 받지 못하면 그때부터 생기는 것이 사람의 가치 문제다. 워스롭 박사의 경우, 자신의 아버지로 인해 가치의 상실을 넘어 그걸 보완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과도하게 포장한 나머지 지금의 모습이 된 걸로 보였다. 지금 현재 괴물학자의 과도한 자신감이라든지 상당히 좁은 식견과 생각, 가치관은 자기 내면에서 체워졌기에 이것이 무너지지 않기 위해 강박에 강박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자기 자신 외에 다른 것과는 완전 단절되버려 다른 것에 대한 이해심이 없어지고, 그렇기에 자신이 아낀다고 자부하는 윌 헨리도 아무렇지 않게 막 대하게 된 것 같다.

 이 괴기한 세계에서 괴물학자와 제자의 다음 활약은 어떻게 될지 기대된다. 비록 워스롭의 괴팍함은 여전할지어도 윌 헨리와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이 있던 만큼 점점 개선되어 갈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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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 1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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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가 지면 찾아오는 건 밤이오, 이때 규칙적으로 찾아오지만 바쁜 현대에서는 들쑥날쑥한지 오래된 것이 잠이다. 그냥 졸려서 자는 것이고, 내일을 위해 자는 것이고, 그냥 오래 눈 감고 있는 정도가 잠의 전부인 게 지금의 현실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덩달아 꿈 역시 부족해지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 비롯됐을 수도 있다. 잠 못드는 밤이 오래된 지금 우리에게 잠이란 무엇이며, 꿈이란 어떤 것일까?

 의대생인 자크는 신경생리학자인 어머니, 카롤린으로 부터 꿈의 세계를 접하며 앞으로의 가능성을 생각하며 성장해왔다. 그런데, 새로운 수면 단계에 대한 실험을 하다 사고가 난 이후로 어머니 카롤린이 말도 없이 사라지고 마는데...

 잠이 주제인 만큼 주인공인 자크가 자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었다. 그냥 자는 모습 정도가 아니라 수면에 빠져드는 단계라든지, 꿈 속에 빠져드는 모습이 나타나서 정말 편안하게 잠든다는 느낌을 받는다. 아무런 걱정도 없이 편안함 그 자체라 이런 잠을 언제 자보았을지 생각이 많이 들 정도였다. 그 만큼 잠자는 동안에도 불안이 존재한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주로 잠을 잠수단계에 비유하는데, 물 속 잠수를 못하는 입장에서도 대략 어떤 느낌인지는 알 것 같기도 하다. 보통 편안해지는 느낌을 표현할 때 공중으로 떠오르는 분위기로 표현하는 걸 생각하면 소설 상에 나타난 잠의 단계는 정반대의 이미지에 해당되기도 한다. 아마도 잠자면서 편안해지는 느낌은 공중에 해당될지 몰라도, 잠이 드는 과정은 잠수처럼 들어가는 과정이 힘들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한계를 참으며 도전하는 잠수와 편안함을 위해 깊이의 한계를 넘어야 하는 잠.

 어딘지 모르게 참 비슷하게 보인다.

 잠이 드는 장면이 많은 만큼 현대인이 많이 겪는 불면에 대한 부분도 빠지지 않았다. 잠이 드는 부분이 편안함이 깔려 있었다면 불면에서는 흔히 많은 이들이 겪었을 법한 텁텁함이라던지, 불쾌한 분위기로 깔린다. 늘 잠을 편안히 자던 자크에게 일어난 불면이라 그런지 보통 사람보다 더 극단적으로 피폐하게 보이기도 하다. 또, 수면제가 잠이 들기는 해도 편안히 자는 것과는 완전 다른 느낌이라는 것까지도. 편안히 잘 때의 편안함보다는 강제성이 있기 때문인지 그냥 아무런 준비 없이 물 속으로 던져지는 느낌이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편안함이 나올 수가 없고, 꿈 역시 존재할 수 없는 없는 것이다.

 처음에는 편안히 자는 것에 많은 생각을 하게 하다가 내용이 진행될 수록 꿈에 대한 점이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꿈이 그렇개 많은 효능을 가지고 있고,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좋은 점이 많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꿈이 적어진 지금에서는 아직 낯설다는 생각이 앞섰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그렇게 자유로운 꿈이라면 자는 게 얼마나 편안한 것인지 궁금하기도 했다.

 현실에서 벗어나 믿음이나 사실 같은 건 상관없이 있을 수 있는 곳.

 그게 꿈이라면 지친 일상에서 편히 쉬고, 놀 수도 있는 환상적인 곳이다.

 이런 곳을 누리지 못한다는 건 얼마나 큰 사회적 문제일까.

 이제 꿈의 먼 미래까지 들여다보게 된다. 과연 자크는 잠과 꿈을 어떻게 발전시키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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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의식 토라 시리즈
이르사 시구르다르도티르 지음, 박진희 옮김 / 황소자리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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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의 역사를 뒤돌아보면 곳곳에서 검은 역사를 찾을 수 있다. 그릇된 이유나 주장으로 대규모 인명이 희생당하는 경우가 대표적인데, 서양에서 가장 유명한 예로 중세시대 마녀사냥이 있다. 그저 무고한 인명이 대량 희생당하고, 종교개혁 시기에 일어난 대참사로 생각할 수 있지만 모든 일은 발생하게 되는 과정이 있기 마련이다. 마녀사냥 역시 시작된 기원과 과정이 있을 것이다. 종교나 오컬트적인 해석이 아닌 현실적인 해석으로. 
 아이슬란드 대학교에서 눈알이 도려내진 독일인 유학생 하랄트의 시체가 발견된다. 변호사 토라는 진범을 잡아달라는 유가족들의 의뢰로 대리인인 독일인 매튜와 함께 사건 조사에 나선다. 살해당한 유학생의 집에서는 <말레우스 말레피카룸>을 비롯한 중세 마녀사냥 관련 자료들이 쏟아져 나오고, 그가 아이슬란드의 마녀사냥에 대한 역사를 뒤쫓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유럽 본토에 비해 다소 관심 밖에 있는 탓인지 바이킹 말고는 딱히 떠오르지 않던 아이슬란드 역사에 대한 부분을 볼 수 있었다. 유럽 본토 쪽의 중세시대 상과 다소 다른점이 있다던가, 당시의 아이슬란드에 대한 서술을 보면 유럽 본토 쪽에서는 다소 신비로운 지역으로 여겨지지 않았나 싶다.
 잔혹한 사건에 주요 소재도 범상치 않아, 댄 브라운의 로버트 랭던 시리즈처럼 커다란 스케일이 전개될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런 것 없이 현실적 그 자체다. 보통 추리 소설이 잔혹하게 시작하면 그 분위기가 끝까지 가기 마련인데, 마지막 의식은 겉포장과 장식만 그렇고 전반적인 내용은 그렇지 않았다. 당장, 변호사 토라의 일상적인 모습과 매튜와 수사하는 분위기만 봐도 일상에서 크게 벗어난 분위기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중간중간에 가끔 튀어나오는 잔혹한 장면 때문에 완전 일상적이라고 장담하기는 어렵다.
 추리적인 면으로는 큰 트릭 없이 주술 상징과 마녀사냥과의 연계점, 살해당한 인물의 행적을 따라가는 구성이다. 이렇게만 보면 너무 잔잔하지 않나 싶지만, 중간중간에 연관된 인물들이 토라와 매튜가 안 보는 곳에서 보이는 행동과 생각들이 있어 꽤 스릴있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주제가 중세시대 마녀사냥이긴 했지만, 전반적으로 봤을 때 일탈적인 행동의 원인과 해석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충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흑마술과 주술에 대한 현대적인 해석을 보면 오컬트니, 악마숭배니 하는 미스터리 같은 부분은 장난 같아 보일 정도다. 지금과는 생활방식과 사고방식은 달라도 그 시대 사람들 역시 같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사는게 힘들고 짜증나고 스트레스 받을 때 어떻게 든 해소하는 부분에서 그렇다. 누구는 조용히, 또 다른 누구는 약간 격하게 해소를 하는데 이런 부분만 가지고 일탈로 오해하는 순간 마녀사냥과 같은 일이 발생하고 만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도는 그렇지 않지만 그저 보이는 행동이 불순하게 보인다고 일탈이라고 규정하고 차별하는 것이다. 이게 진짜 주제로 생각되는 게 작중에서도 의도는 그렇지 않은데 외적인 면만 가지고 사람을 쓰레기 취급하거나 취급당할까봐 걱정하는 면이 많아서 그렇다.
 특히 이런 일방적인 일탈 규정이 가족에게서 많이 일어난다는 걸 느끼게 하는 부분도 볼 수 있었다. 자녀의 생각을 들어보지 않고 무턱대고 화를 내거나, 들어도 믿지 않는 모습이 그렇다. 자녀의 일탈을 막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가르친다고 다들 주장하지만, 오히려 이런 편견이 이탈을 조장하거나 더 거친 행동을 유발하게 만들지 않나 싶기도 하다. 이런 자녀에 대한 편견적인 부분을 부모로서 토라가 조심스럽게 다가가고 이해하려는 모습이 우리가 가져야 하는 자세라 생각한다.
 외적인 면만 가지고 편견을 가지고 차별하는 건 지금도 그렇다. 그저 비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중세시대 마녀사냥처럼 실질적인 공격을 가하는 경우도 심심치 않고. 설명하기 귀찮다, 간섭하지 말라고 한다고 다 나쁜 것이라 여기기 보다는 마음을 터 놓기위한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누구나 가까운 사람이든 낯선 사람이든 자신의 힘든 일이나 고민을 쉽게 털어 놓기는 힘든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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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소설가의 글쓰기 - 위대한 대문호의 마음속으로 떠나는 여행
리차드 코헨 지음, 최주언 옮김 / 처음북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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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은 어떻게 쓰나요? 어떻게 하면 잘 쓰나요? 글을 쓰려는 사람들이 자주하는 질문이다. 글을 쓰는 입장에서 보면 좀 대답하기 힘들다. 무작정 쓰면 된다, 규칙을 지켜야 한다, 기승전결이 기본이다, 많이 읽어라 등등. 글쓰는 방법이라고 불리는 것들은 여러가지다. 그러나 외우면 무조건 답이 나오는 수학공식과 달리 글은 정해진 답이라고는 없다. 누구에게는 이렇게 쓰라고 배웠는데, 누구는 저렇게 쓰고. 그걸 가지고 틀렸다고 하면, 자신 역시 틀렸다 지적받고. 이렇게 되면 누구한데 글 쓰는 걸 배워도 결국에는 어디서 시작해야 할지, 또 어떻게 써야할지 고뇌에 빠지고 만다.

 글쓰기 책 역시 그렇다. 다양한 방법이 제시되지만 결론은 글을 쓰는 자신에게 달려있다. 다만, 약간 다른 점이 있다면 무조건 이렇게 해야 한다고 강요하지 않고, 면전에 대놓고 내 기준에서 봤을 때 너의 글은 정말 형편없다고 비하하지 않는다. 이 책 역시 강요와 비하보다는 일종의 가이드가 제시된다.

 자신이 글을 쓰는 환경이라든지, 이야기를 구성하는 방법, 또는 글을 쓰던 중 있었던 일화를 설명하던 경우와 비교하면, 이 책은 글쓰기의 다양한 사례와 이것에 대한 각종 의견들을 모아 놓았다고 보면 되겠다. 지겹도록 많이 들은 기승전결이라든지, 문법, 맞춤법, 간혹 쓸 때 없어 보이는 규칙 같은 건 이 책에 없다. 글을 쓰다가 매번 고민하고, 때로는 이걸 이렇게 해도 되는지, 이런 건 어떻게 써야하는지 같이 글쓴이를 불안하게 만드는 요소들을 다른 작가들은 어떻게 쓰고 대처했는지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각 파트를 살펴보면 막상 글을 쓸 때 한 번 쯤은 고민해봤을 요소 대부분이 있다. 특히 표절과 성적인 묘사에 대한 부분은 어디에서도 잘 설명해주지 않고 듣더라도 자신만의 생각을 정하지 못해 애매모하게 되고마는 부분이라 여러모로 유용하다는 생각이다. 또한 퇴고에 대한 부분이 두 파트로 나눠져 있던 탓인지 퇴고가 얼마나 중요한지 계속 보며 느낄 수 있다.

 글쓰기 관련 일화나 좋은 예로 많은 작가들이 언급된다. 다양한 분야의 작가들이 언급되기에 소설이든 산문이든, 또 순문학이든 장르소설이든 그 어디에도 적용된다는 걸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유독 자주 언급되는 작가들이 있다. 톨스토이, 헨리 제임스, 제인 오스틴, 찰스 디킨스, 어니스트 헤밍웨이, 마크 트웨인, 에밀리 브론테 등이다(혹시나 놓친 작가가 있을지도...). 특히 톨스토이의 경우는 저자가 미리 예고하고 들어갈 정도로 많은 언급이 있다. 톨스토이의 글쓰기 스타일이나 저자의 개인적 분석도 흥미롭지만, 무엇보다 글쓰기와 관련된 한 일화가 예상치 못한 재미를 준다. 이보다는 적지만 나름 인상 깊게 언급되는 작가로는 추리 분야에서 유명한 렉스 스타우트와 레이먼드 챈들러를 들 수 있겠다. 현대 작가로는 스티븐 킹이 많은 부분에서 언급된다. 위에서 톨스토이 일화가 재미를 주었던 것처럼 다른 작가들의 사례를 보다보면 뜻밖의 부분에서 웃게 되기도 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엄청 어려운 것인데 어느 작가는 너무 단순하게 해결을 보거나. 또는 내가 생각하기에 단순하게 쓸 법한 걸, 한 작가는 며칠을 고민하며 썼다거나.

 다양한 작가들의 사례를 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 글은 어려운 것과 단순한 것 사이에서 타협을 보는 것이라고. 누구는 첫 문장을 쓰는데 며칠을 고민하는데, 누구는 아무렇게나 시작하고. 결말을 내는 것도 누구는 여러번 고쳐쓰고도 고민하는데, 누구는 아무데서 적당히 끊고 결말을 내기도 하고. 이렇게 대비되는 사례를 보면 첫 문장을 쓰는 것이든, 소설 설정이든, 결말을 내는 것이든 딱히 정답이라 말할 것이 없다.

 한편으로는 온갖 평가와 제약을 신경써 고민하며 어렵게 쓰고, 한편으로는 제약 같은 건 신경쓰지 않고 내키는대로 쉽게 쓰는 것.

 글이 나오는 건 그 중간 쯤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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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불의 연회 : 연회의 시말 - 상 백귀야행(교고쿠도) 시리즈
교고쿠 나츠히코 지음, 김소연 옮김 / 손안의책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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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상을 살아가는 모두에게 변화는 다소 두려운 존재다. 그저 시대의 흐름이라는 당연한 순리로 볼 수도 있지만, 어떨 때는 도저히 생각지도 못한 있을 수 없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 가령, 분명 예전에는 이렇지 않았는데 지금은 왜 이럴까, 분명 이런 사람으로 보였는데 실제로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같은 일 말이다.
 이런 변화를 이겨내지 못하면 대부분 일상이 무너지고 만다. 그 동안 겪지못한 일이라 대처를 할 수가 없고, 다른 세계의 일로 생각하며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았으니까. 그럼에도 변화를 거스르며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려는 시도는 수 없이 많이 행해지고 있다. 그때가 가장 안정되고, 그 무엇하나 부족한 것없이 다 잘 되어 있던 시절이라 그렇겠다. 하지만 과연 그런다고 그게 내가 예전에 알고 있던 일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 속에서 역행해 다시 돌아간 일상은 진짜가 아닐지도 모른다. 겉으로는 예전과 같을지라도 결국에는 예전과 같은 일상을 보장받는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즉, 이미 거스를 수 없는 변화는 시작되었고 일상은 그저 변화를 외면하는 허상으로서 껍데기만 남아 그저 타인의 지시만 따르는 내가 없는 현재가 된다. 현재는 있지만 그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아무 것도 증명할 수 없는, 그저 나라는 존재가 커다란 세계에 혼자 방치되어 있는 것. 이것이 바로 그 동안 세계관을 의심하게 했던 공허의 실체일지도.
 연회의 준비편에서 언급한 사람의 근간을 흔들어 세계관을 의심스럽게 하는 것. 그것은 일상에 침투해 변화를 구제한다며 도리어 현실과 허상을 구분하지 못하게 만들어 세계를 지배하는 존재. 그것의 정체가 바로 누리보토케 일지도 모른다.
 살인범으로 체포된 세키구치를 조사하는 시모다 경찰서에 드리운 검은 그림자... 조잔보 무리를 쫓다 실종된 기바와 그 뒤를 쫓던 아오키를 위협하는 무리...가센코와 아츠코의 실종을 쫓다가 실종된 에노키즈 그리고 남겨진 마쓰다...주변인물들이 점차 거대한 존재에 집어 삼켜지는 듯 하지만 꿈쩍하지 않는 교고쿠도...한편, 곳곳을 들쑤시고 다니던 온갖 수상한 무리들은 연회의 준비가 끝났음을 고하고 이즈의 니라야마로 몰려드는데...
 제목 그대로 연회의 시작과 끝을 보여주는 것처럼 순식간에 분위기가 순식간에 고조됐다가 한 순간에 가라앉는다. 준비편에서 나타난 다양한 불길함과 집단, 그리고 사건 관계자들이 한 곳에 모여 모든 것의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은 이전 시리즈에서 보았던 다른 사건들의 정리보다 더 장엄하게 보일 정도였다.
 사건의 중심인 도불(누리보토케)에 대해 다루는데 이게 어떤 것일까 하며 연구하는 것에 가까웠다. 그 동안 이 요괴는 어떤 것인지 설명하던 것과 비교하면 도불은 정확한 실체가 없어서 이것과 연관성 있어 보이는 것들을 비교하며 정체를 탐구한다. 교고쿠도도 모른다는 뜻일 것이다. 그래서였는지, 여기서는 요괴 연구가인 다타라 선생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다타라는 대체로 요괴 기원에 관한 부분을 다루다보니, 대체로 중국 전설과 현지 조사가 자주 언급된다. 거기서 깊게 들어가 요괴의 기원과 발생, 비슷비슷한 단어들이 실제로는 어떻게 다른지를 보며 기이한 것들이 어떻게 생기는 가를 알 수 있었다. 이 분도 나름 인상이 괜찮아 보여서 다타라를 주인공으로 한 외전 <금석속백귀 구름>에서 다른지방에서 조사를 하다가 사건에 휘말린 일이 궁금해졌다.
 본격적인 사건의 정체를 밝혀가는 과정이 혼선에 혼선을 거듭해서 주연 인물들 말 그대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파악이 안 될 것이다. 그저 알 수 없는 불길함 속에서 내가 알던 것들이 거짓처럼 보이고 일상이 일상 같지 않은 상실감만 남는다. 이전 시리즈에서도 사건이 발생하면 대체로 불길하거나 현실 같지 않은 인상을 주긴 했지만, 사건을 보는 시점이 세키구치처럼 현실을 현실로 보지 못하는 불안한 시선이거나 사건의 기괴함으로 인해 상식적인 사람까지 휘말려 뭐가 뭔지 갈피를 못 잡는 정도였다. 그렇다면 도불은 어떤가. 애초에 불안한 시점을 가진 인물은 격리당한 거나 마찬가지라 등장하지 않고 누군가 죽거나 하는 사건다운 일이 없는데도, 주변 사람들은 무언가에 휩쓸려 사라지거나 알고 있던 진실이 왜곡된다. 그냥 낯설다, 일상에 갑자기 끼어든 비일상이 아닌, 내가 아는 세계가 붕괴되어 일상 자체가 비일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 사건이 자신에게 영향을 주는 것과 내가 사건이 되는 것의 차이일지도 모른다. 또 다른 비유를 들자면 관찰자와 당사자의 차이일지도. 실제로도 주연 인물이 사건의 당사자이기도 했으니까.
 관찰자라는 입장의 섬뜩함 또한 있었다. 그저 지켜만 보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데도 현장에 있는 당사자들이 모르는 사람이라는 점이 무서운 것이다. 옛날에 이런 무서운 이야기가 있었지 않은가. 찍어줄 사람이 없었는데도 찍혀 있는 단체사진 같은 것. 당사자들끼리의 대화나 일상, 또는 어떤 인물의 독백. 이런 부분 속에서 갑자기 너는 누구냐. 하는 인물은 마치 세계를 좌지우지하는 절대자 같은 느낌이었다. 어떻게 보면 소설상에서 모든 인물들의 행동을 지켜보고 듣는 작가 자신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저 지켜본다는 부분만 보면 독자, 또는 사건 당사자들을 그저 바라만 보며 내 일은 아니니 상관하지 않는 구경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작중 곳곳을 들쑤시는 과거를 잊고 새로운 현재를 살아간다는 부분을 보면서 일본의 역사 왜곡이나 전쟁범죄 부정이 이런 식으로 이루어지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과거를 잊고 살자는 이들의 주장이 쏟아지는 와중에, 그걸 부정하는 이들은 외면 받다가 결국에는 자신을 의심하게 되고 만다. 왜냐, 자신을 둘러싼 세계가 아무리 비상식적인 것에 예스를 하고 있는데 자신만 노를 외치는 상태니까. 이건 다수결이 아니라 집단으로 개인의 생각을 무너뜨리는 거나 마찬가지다. 다수의 행복을 구실로 들고 있지만, 그게 말 그대로 되는 건 아니다. 행복이 보장되어도 그게 근간이 없고, 누군가에게는 모든 걸 빼앗겨 부정당하는 고통만 주는 것에 불과하다. 원래 뿌리를 제거하고 나무가 자라날 수 있다는 건 궤변이나 다름없다. 근간이 없는 사람은 결국에는 출처를 알 수 없는 사람, 그저 지금의 현재에 존재와 이름만 있는 정체불명의 요물이 되는 것이다.
 이런 묵직한 분위기가 계속되느냐면 그렇지는 않다. 연회가 시작되면 끝도 있고, 그 끝은 깔끔하고 허탈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유쾌하기도 하다. 먼저 유쾌한 부분을 보자면, 역시나 에노키즈의 대활약이 눈에 띄지 않을 수가 없다. 아무리 불길함이 감도는 곳이라도 에노키즈에게는 통하지 않는 모양이다. 여기에 기바도 같은 친구 아니랄까 제대로 한 건을 해낸다. 에노키즈와 기바의 대면이 가장 웃긴 장면이 아닐까 생각이든다.
 허탈한 부분은 가족에 관한 내용이다. 현대에 들어서 가족문제가 생기는데 왜 과거에는 그러지 않았나, 하는 문제다. 그냥 참는 건지, 아니면 유대감이라는 게 있었던 것인지 알 수 없게 된 것 같았다. 가족 의례나 전통 같은 것도 그냥 의미없는 목적과 수단이 되고, 서로가 서로만 생각하는 순간 가족은 없어지게 되는 것일까. 애증이라는 것이 없어지는 순간 가족은 그냥 남이 되고 마는 건가. 솔직히 이런 복잡한 걸 따지지 않는 다면 가족은 그냥 가족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같이 공유하고 의미를 가지는 무언가가 있다면 더 좋겠지만 말이다. 현대의 가족에는 그런 것이 없는 것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이런 구절이 책 속에 있었다. 일본어로 죽는다를 경사스럽다고 바꿔 쓸 수도 있다고. 그렇다는 건 이번 도불의 연회의 연회, 즉 경사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죽는다는 걸 나타낸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그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가지거나. 실제로 어떤 인물에게는 엄청난 연회의 장이었지만, 어떤 인물에게는 모든 게 죽어버리고 만 황천의 끝을 본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여명이 밝아오는 끝이 언제나 좋은 결과라는 생각을 의심해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 끝이 다가오는 과정이 그 동안 진짜냐 거짓이냐에 따라 고생 끝에 결실을 맺은 경사냐 허상을 뒤쫓다 모든 걸 잃어버리고 마는 죽음이냐, 가 결정되고 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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