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한 라트비아인 매그레 시리즈 1
조르주 심농 지음, 성귀수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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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그레 반장 시리즈는 예전에 한 번 읽은 적이 있다. 심플하면서도 해당 작품의 테마를 적절하게 나타내며 다음 권과 연계되는 이미지를 포함하는 표지부터 눈길을 끌었다. 매그레 반장이라는 캐릭터의 유명세와 다른 작품에 영향을 끼쳐 나온 파생 작품이나 캐릭터에 대한 부분 역시 관심이 갔다. 많이 들어봤을 미국 드라마 주인공인 형사 콜롬보와 일본 만화 명탐정 코난에 나오는 메구레 반장(국내명 골롬보 반장)이 바로 매그레 반장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나온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점에서 처음 들어본 시리즈인데도 망설임 없이 읽게 됐다. 그런데 꽤 시간이 흐른 탓에 제대로 이해하며 본 건지 기억이 나지 않아서 사실상 처음 읽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국제형사경찰기구에서 수배 중인 범죄자, 라트비아인 피에르트가 파리로 향하는 기차에 탑승했다는 전보를 받은 매그레 반장. 곧장 역 앞에 나가 피에르트를 찾아보다가 인상착의가 비슷해 보이는 사람을 목격한다. 그런데 역 안에서 소란이 발생한 것을 알아채고 서둘러 가보니 정차한 열차 안에서 총에 맞은 시체를 발견한다. 문제는 그 시체를 찬찬히 살펴보니 매그레 반장이 찾던 피에르트와 인상착의가 똑같았다는 점인데...

처음부터 범죄자로 보이는 인물이 제시되지만, 이 인물이 대체 어떤 사람이 파악이 되지 않는 것이 사건의 핵심이라 매그레 반장의 수사는 이 부분에 초점을 맞춰 진행된다. 보기에 따라 범죄수사 같으면서 라트비아인 피에르트라고 추정되는 인물이 대체 어떤 사람인지 탐구하는 드라마 같기도 하다. 그렇지만 잔잔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단순 범죄자가 아니라 국제적 규모의 수배자라는 점에서 예상치 못한 돌발 상황과 힘겨운 수사과정이 뒤따르며 무겁고 진지한 분위기가 나타나고는 한다. 이 진지하다는 부분에서 겁을 먹을 필요는 없다. 국제 범죄라는 배경 때문에 따라오는 부가요소에 지나지 않으니까. 어디까지나 메인은 범인에 해당되는 인물의 드라마다.

간결하면서도 세세한 듯한 배경 묘사도 꽤 인상적이다. 항구도시인 페캉의 비바람치는 길거리와 거친 파도가 몰아치는 선착장 모습은 우중충하면서 쓸쓸한 분위기가 강하다. 누추하게 보이면서 힘겹게 사는 사람들의 하루하루가 깊게 배어 있는 듯한 인상을 가진 파리 어느 한 구석은 또 어떻고. 다소 화려해 보이는 마제스틱 호텔이나 부유층 주거지에 대한 묘사에 비하면 사람 사는 냄새라는 것이 확 느껴진다. 가식이나 거만함 없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환경으로 나타낸다면 딱 이럴 것이다.

사건 배경 때문에 꽤 규모가 큰 사건으로 보이나 실상을 보면 굉장히 소박하기 그지없다. 현실과 동떨어진 냉혹한 뒷세계의 이야기가 아니라, 가까운 곳에 있을지도 모를 사람 사는 이야기인 것이다. 하지만 이런 소박한 이야기가 벌어진 환경이 뒷세계였기에 엄청난 부조화가 발생하고 만다. 원하던 소망은 작지만 그걸 위해 감당해야 하는 부담은 너무나도 컸다. 잠깐의 눈속임은 쉬울지도 모르나 세상 전부를 속이는 건 불가능하다. 아무리 완벽하게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빈틈이 있기 마련이고, 거기로 새어 나오는 모습은 그저 약점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어떤 선택을 해도 막다른 곳에 몰리게 되어 파멸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드라마다.

주인공이자 경찰, 그리고 탐정역할이나 다름없는 매그레 반장의 스타일을 설명하자면 이렇다. 우직하게 관련 인물과 단서를 쫓아가며 사건의 배경을 알아내는 것. 대체로 추리소설하면 범인(Who)과 범행과정(How)에만 집중하고 다소 대충 다루기도 하는 왜(Why), 라는 부분에 집중한다고 보면 된다. 뭐, 이렇게 말한다고 앞의 범인과 범행과정을 소홀히 하는 건 아니다. 범인은 범인대로 흥미가 생기게 만들고, 범행과정은 겉으로는 별거 없이 단순해 보이지만 의외의 추리로 풀어나가는 과정이 있기에 문제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이걸 실행하기까지의 드라마가 극적이라 크게 복잡한 트릭 같은 건 필요가 없다. 이게 매그레 반장이라는 추리소설 시리즈에서만 느낄 수 있는 독특한 감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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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중괴담 스토리콜렉터 104
미쓰다 신조 지음, 현정수 옮김 / 북로드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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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거의 집

집에 관한 괴담을 유독 좋아하던 나는 어느 남자의 유소년기 체험담을 듣게 된다. 어린 시절 간사이 지방에 살았던 그는 아버지를 따라 전철을 여러 번 갈아타며 내린 한적한 시골의 작은 산 정상에 있는 집에 도착한다. 어떤 할머니가 살던 집으로 그곳에 남자 혼자 남겨지고 아버지는 떠나버린다. 이후로 그는 할머니로부터 들은 기묘한 주의 사항을 지키며 일곱 살 당일까지 생활하게 되는데...

작중에서 말하듯이 집은 공포하면 떠오르는 고전이자, 정석 중의 정석 그 자체나 다름 없는 소재다. 대체로 현재 사는 익숙한 집이거나 아니면 처음 보는 낯선 집이라는 두 가지 경우가 존재한다. 이 작품의 경우는 후자인데, 단순히 불길한 소문이 도는 폐가나 주인 없는 집 같은 경우가 아니다 보니 미스터리한 면이 강하다. 이렇다 보니 집 그 자체에 대한 부분도 문제지만, 여기에 왜 오게 됐냐는 의문까지 더해진다.

금기 사항이 언급되는 무서운 이야기는 언제나 금기를 어기면서 무서운 진실에 다가가게 되는 것이 클리셰나 다름 없다. 처음에는 자신도 모르게, 그러다 점차 이런저런 이유와 핑계를 대며 긴장이 풀리다 못해 그대로 선을 넘어버린다. 작중에서는 어린 시절이 배경인 만큼 어린아이 다운 심리로 어떻게 금기를 넘는지 흥미진진하면서 긴장감 있게 묘사된다. 이것 역시 집이라는 소재와 마찬가지로 흔한 스토리 전개 방식이다 보니 쉽게 읽기 좋게 한다. 너무 뻔한 전개라고 생각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대부분의 무서운 이야기는 구조가 비슷비슷한 법이니까.

앞에서부터 쭉 흔한 소재, 흔한 클리셰 얘기만 늘어 놓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이 작품은 집 관련 무서운 이야기 치고는 특이한 경우라고 할 수 있겠다. 뻔한 전개 속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만들고 점차 압박해 오는 공포를 보여줬으니까. 가만 생각해 보면 애초에 집 자체는 처음부터 공포와 가까운 곳은 아니다. 그저 바깥에서 무언가가 들어옴과 동시에 곧 그 집 자체가 무서운 장소가 되버리는 것이다.

여담으로 작중에 나오는 집 구조가 다소 특이하다 보니 살짝 이해하기 힘들기도 하는데, 역자 후기에 보충 설명이 추가 되어 있어서 아주 좋았다. 혹시나 집 구조 때문에 읽기 어렵다면 역자 후기를 참고하기를 바란다.

예고화

나는 이전에 서점에서 어떤 책의 표지를 보다가 거기에 실린 죽음을 암시하는 그림, 일명 예고화를 처음 접하게 된다. 이후 금방 잊어버리고 10년 넘게 흐른 시점에서 갑자기 예고화와 관련된 내용을 연달아 접하다가 지인으로부터 예고화와 관련된 체험담까지 듣게 된다. 20년 전, 간사이 지방의 어느 초등학교에 부임하게 된 모 신참 교사는 1학년을 맡게 된다. 거기서 만난 한 아이는 딱히 부족한 점은 없었지만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고 늘 그림만 그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아이가 그리던 그림이 점차 실제로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예고된 죽음이라는 소재는 옛날에 문방구에 팔던 괴담집에서 많이 봤었다. 대체로 예고하는 매개체를 통해 점차 공포를 조성하는 구성이다. 최근에는 이런저런 다양한 방식으로 묘사되지만, 예전에는 전화 아니면 그림이 많이 쓰인 편이다. 특히 그림 같은 경우는 시각적인 이미지를 통해 불길하다 못해 때때로 기괴한 인상을 주는 탓에 꽤 오래 전부터 나타난 방식이다. 이런 소재의 클리셰라고 하면 예고로 지정된 대상이 죽음을 피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하는 과정이다. 이미 어떤 식으로 죽을지는 파악은 됐다. 문제는 어디서 어떻게, 라는 점이다. 여기서 공포와 스릴러가 발생하며 스토리를 끌고 가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 작품도 고전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작품 역시 흔한 소재다 보니 무난한 작품으로 보였다가 결말에 가서 생각지도 못한 반전과 미스터리를 보여줘서 놀라웠다. 그냥 보면 남의 일이나 다름 없던 무서운 일이 점차 스스로에게 닥치는 정석적인 괴담이다. 그런데 몇몇 표현의 차이와 서술되는 정보의 대한 부분을 통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버린다. 죽음을 예고 받는 다는 것까지는 동일하다.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왜 예고를 받게 되었는가.

예고와 저주의 차이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일어날 일을 미리 알려주는 거랑, 대놓고 불행을 조장하는 행위랑 비슷한 점이 어디있겠느냐고 하겠지만, 이렇게 보면 어떨까. 예고는 좋은 의도로 알려주는 불행. 저주는 대놓고 나쁜 의도로 염원하는 불행. 다소 차이는 있어도 불행이 발생할 것이라 말한다는 건 똑같다. 또한 대상이 되는 사람에게 심리적 동요를 발생하게 만든 다는 것까지도. 그렇다는 건, 예고도 저주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의도가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염원이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이래서 옛날에 무언가를 예언하는 사람이 있다면 경계하고 나쁘게 봤던 걸지도 모르겠다.

모 시설의 야간 경비

나는 출판사를 통해 알게 된 모 작가로부터 한 때 경비원 일을 하며 겪은 무서운 일을 듣게 된다. 20대 초반에 신인상을 수상했지만, 차기작 집필과 회사 일을 병행하는 것이 부담이 커지던 끝에 퇴사하고, 아르바이트 자리를 알아보다가 경비원 모집에 지원하게 된다. 그렇게 반 년 가까이 경비 일을 하던 중, 어느 신흥 종교 단체의 야간 경비를 하게 된다. 담당 구역은 십계원이라는 장소로 기묘한 구조와 기괴한 조형물로 이루어진 공간이었는데...

야간 경비원이 겪은 체험담이라는 형식의 무서운 이야기. 이것 역시 익숙할 것이다. 인적이 드문 시간에 아무도 오지 않을 것 같은 장소를 둘러봐야 하는 일. 이보다 공포와 가까운 직업은 없을 것이다.

경비원이라는 직업 특성상 같은 장소를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구성이 될 수밖에 없어서 잘못 했으면 지루해지고도 남았다. 그런데 이 반복되는 장소라는 특징을 오히려 역으로 이용해서 감탄했다. 십계원이라는 시설의 괴이한 구조도 그렇고, 그 안에서 발생하는 무서운 일도 그렇고. 그곳에 계속 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과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며 공포를 조성한다. 분위기도 분위기지만 십계원이라는 시설을 정말 잘 구상했다고 본다. 그런 기괴한 조형물로 가득한 공간이라면 낮에 봐도 섬뜩한데, 밤이라면 얼마나 다른 세상으로 보일까.

십계원이 불교의 십계(十界)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보니 여러 생각을 해보게 한다. 원래의 의미는 깨달음의 정도에 따라 나눈 10가지의 경지다. 그런데 작중에서 신흥종교는 이전에 있던 종교에서 모티브만 가져와서 또 다른 해석이나 교리를 만들어 낸다고 한다. 이런 부분에서 과연 십계원의 십계는 어떤 의미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라고 봐야 할까. 그저 단순히 괴이한 현상이 발생하는 심령스폿이라고 봐야 할까. 아니면 말 그대로 십계에 나타나 있는 의미를 그대로 재현한 현상이라도 일어난 걸까. 참고로 불교의 육도윤회는 죽은 이후에 생전의 업보에 따라 여섯 가지의 세상에 번갈아 태어나며 죽어간다는 의미다. 만약 여기서 해석이 변질되어 죽은 이후가 아니라 살아 있는 상태가 된다면? 죽지 않고 살아서 육도윤회를 경험하게 된다는 건 도대체 어떤 상태일지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부르러 오는 것

나는 지극히 현실주의자였던 아버지가 유일하게 들려주었던 유령의 집에 대한 얘기를 떠올리게 만든 어느 여성의 체험담을 듣게 된다. 그녀는 어느 해 여름에 할머니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소식을 듣고 본가를 방문하게 된다. 할머니는 오봉 때마다 법사를 하는 어느 지인의 집을 방문했었는데, 건강 문제로 이번에는 그녀가 대신 다녀와 달라고 부탁한다. 여기에 한 가지 주의 사항이 있었다. 그 집에 오래 머무르지 말라고...

앞에서 먼저 언급된 아버지의 이야기에서 나온 밖에서 부르는 괴이와 어느 집을 방문한 여성의 이야기가 대체 어떤 관련이 있는지 의아했다. 밖에서 부른다. 어느 집을 방문한다. 어딘가를 방문한다는 것만 빼면 실내와 외부라는 차이 밖에 나지 않는다. 그런데 점차 두 이야기가 전혀 관련 없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생각해보면 방문은 또 다른 방문을 부르게 되는 법이다. 방문한 곳에서 어떤 인연이 생긴다면 말이다.

누군가 초인종을 눌러서 나가보니 아무도 없었다. 그냥 보면 현대에 흔해진 괴담 같지만, 사실 옛날부터 내려온 거라 나름 역사가 길다. 그저 밖에서 누가 부른다는 것이 초인종으로 바뀐 정도라고 봐야겠다. 어떻게 보면 직접적인 부름과 간접적인 부름의 차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다만 문을 열어 본다는 부분은 다소 신중할 필요가 있다. 아무런 일도 없으면 다행이지만 대체로 무슨 일이 생길 확률 더 높기 때문이다.

이게 지금도 여전히 무섭게 느껴지는 이유라면 누구에게나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겠다. 목표가 된 대상이 딱 정해져 있다면 남의 일이라고 여기면 그만이다. 그러나 나에게도 충분히 일어날 일이라고 여겨지면 말이 다르다. 언제, 어떻게 발생할지 모를 재앙이니 자연스레 초인종과 현관 밖의 낯선 방문자에 대한 공포가 커질 수밖에 없다.

이런 낯선 방문자에 대한 괴담을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시작해서 점차 영향력을 크게 만들어 버리는 전개가 대단했다. 문제의 방문자에 대한 정보가 조금 더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공포란 원래 그런 거라 어쩔 수 없다. 정체가 무엇인지 전혀 모르기에 무서운 것이니까. 이건 현실에서도 꽤 자주 겪어 볼 수 있는 상황이라 금방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중괴담

나는 편집자 시절에 작업을 의뢰한 적이 있었던 북디자이너로부터 연락을 받게 된다. 잡지에 연재 중인 연작 괴기 단편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 있다고. 그렇게 오랜만에 만난 그로부터 30년 전에 겪은 체험담을 듣게 된다. 디자인을 의뢰 받은 책의 교정지를 들고 산책을 하던 그는 늘 들리던 정자로 향했다. 거기에서 어떤 노인을 만나고 마침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레 함께 있게 됐다. 가족에 대해 말하던 노인은 갑자기 옛날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는데...

비 오는 날의 무서운 이야기. 이건 공포하면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 세계 어디에서나 마찬가지일지도 모르겠다. 어디까지나 심심풀이 정도로 여기는 정도라 이것 자체 만으로 어디가 무섭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을 만하다. 하지만 이걸 알아둬야 한다. 이야기 자체에는 힘이 있다. 그냥 이야기 자체로서는 아무런 가치가 없지만, 단 한 명이라도 듣게 된다면 어떤 식으로든 펴져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게 현실적든, 비현실적이든 말이다. 괜히 100가지 무서운 이야기(햐쿠모노가타리)나 학교 괴담 같은 것이 영향력이 있는 게 아니다.

어릴 적에 들었던 국내 전래 동화인 이야기 주머니가 이 단편과 비슷한 구석이 있다는 생각도 든다. 차이점이라면 이야기 주머니 속의 이야기들은 일종의 괴이한 존재로서 묘사됐다면, 이 작품 속의 이야기는 말 그대로 이야기 그 자체다. 단순히 나쁜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예고라면 대비할 수 있겠지만, 이야기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야기에 나오는 장소를 피하면 그만일지. 상황이 발생하는 걸 막아야 할지. 아니면 그 어떤 가능성도 일어나지 않게 아무 것도 하지 않아야 할지. 처음부터 이야기를 듣지 않으면 그만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생각이상으로 이야기의 유동성은 상상 그 이상이라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다.

이전에 작가가 괴담을 직접 체험하는 것보다 듣는 것이 더 좋다고 말한 걸 생각하면 조금 묘해지는 부분이긴 하다. 체험하지 않고 듣기만 해도 결국은 무서운 일을 당하는 게 아니냐고. 그런데 단순히 듣는다고 발생하는 문제가 아니라 이것도 일종의 주술, 또는 저주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한다. 그냥 재미로 하는 이야기라면 몰라도 어떠한 의도를 가지고 하는 이야기는 다소 위험할 수 있다는 뜻이다. 앞에서 언급된 100가지 무서운 이야기(햐쿠모노가타리)가 딱 이런 경우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앞에서 말했듯이 이야기는 유동성이 강하다. 그렇기에 금방 다른 곳으로 넘기기 쉽다. 작가가 직업이라면 그것도 참 쉬운 일일 테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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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얼굴의 여우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85
미쓰다 신조 지음, 현정수 옮김 / 비채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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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받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저 무섭다고 느낄 수도 있고, 나름대로 행동력이 있다면 잘못된 걸 바로 잡고자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세상은 생각한 대로 돌아가지 않는 법이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달라지는 건 없고, 노력은 결실을 맺지 못한 채로 의미 없이 사라져간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더 이상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런 허무함 속에서 여전히 남아 있는 잘못된 것이란 언제 어떤 모습으로 다시 나타날지 모를 일이다. 아무리 시간이 흐르고 시대가 달라졌더라도 그 본질은 변함 없이 말이다. 이처럼 시대를 초월해 계속 돌아다니는 망령을 두고 이런 질문이 계속 나올 것이다. 이걸 보고도 계속 모른 채하고 방치할 생각이냐. 여기에 과연 어떤 답을 내고, 무엇을 해야 할까.

만주국에서 일본으로 돌아온 엘리트 청년인 모토로이 하야타는 무작정 기차에 올랐다가 어느 마을에 내린다. 그곳에서 그나마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에 탄광 일을 시작하게 된다. 다양한 인간군상이 모인 탄광에서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경험하던 중, 탄광이 무너지는 사고가 발생하고 하야타의 지인이 빠져 나오지 못하고 갇히게 된다. 게다가 탄부 숙소에서는 밀실 살인사건까지 발생하고 이건 곧 연쇄 살인으로 이어지는데...

패전 이후의 일본 사회, 그것도 탄광 관련된 내용을 아주 깊숙이 다루는 내용이다. 일본의 탄광 개발 방식에서 시작해 노동자를 부당하게 대우하는 회사 측, 안전사고 관리가 부실한 현장, 이익을 우선시하며 발생하는 인명 경시 같은 노사 문제가 주로 부각된다. 여기에 2차 세계 대전 당시의 조선인 강제 징용 문제가 아주 깊은 관련성을 가지다 보니 여러모로 복잡한 감정이 든다. 편파성 없이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다루어서 과감하다고 해야 될 정도라 그렇다. 이렇다 보니 평소 작가의 공포 미스터리면서, 어떻게 보면 사회파 미스터리 같다는 느낌이다. 그러니까 다소 현실적인 면이 강하다고 해야겠다. 이런 점 때문에 주인공의 배경을 설명하는 부분이 다소 길다 보니 메인 사건만 기다리는 경우라면 살짝 지루할지도 모른다.

미신을 잘 믿는 탄광 사회에서만 존재한 민속학적 요소를 보며 여러모로 현실과 비현실이 공존하는 인상을 받았다. 단순히 안전을 염원하는 바람에서 나온 미신이 아니다. 지하의 짙은 어둠에서 느끼는 원초적인 공포와 사방이 꽉 막힌 땅 속이라는 환경이 조성하는 심리적인 압박이 쌓여 있다는 인상이다. 한 번 내려가면 영원히 나올 수 없을 것 같다. 아무리 탄광에서 일을 오래한 베테랑이라도 이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어 보였다. 작중에서 언급되는 갱내에서 겪은 괴담 같은 사건 역시 그렇다. 그냥 사고가 나서 갇히는 것만으로도 무서울텐데, 정체 모를 존재에게 이끌려 지하 깊은 곳으로 끌려갈 수도 있다니. 그야말로 죽음이 언제나 도사리고 있는 환경이나 다름없다. 현실적으로도, 비현실적으로도 말이다. 한편으로는 도조 겐야 시리즈에 나온 괴이에 비해 사건과의 연결성이 부족하다 보니 공포 면에서 약하게 보일 만하다.

여러모로 탄광 사회에 존재하는 건축물의 특징과 자연적, 문화적 환경을 이용한 밀실트릭이라 나름대로 흥미롭게 봤다. 트릭 자체의 기발함 보다는 이런 식의 속임수가 가능하게 만든 환경이라는 부분에 주목했다. 물리적 트릭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대체로 심리적 트릭이 많이 작용한 것이다. 별거 아닌 간단한 조작이나 의도치 않게 만들어진 상황이 점점 사건을 복잡하게 만드는 점에서 상당히 놀랍다고 할 수 있다. 다만 흔히 아는 탐정소설 같이 자유롭고 협력이 많은 조사 환경과 거리가 멀기 때문에 상당히 제한적인 환경에서 추리가 진행되고. 주인공 역시 탐정 역할이라는 자각이 확고하지 않은 상태로 스토리가 진행되다 보니 보기에따라 답답할 수도 있다고 본다.

도조 겐야와 또 다른 분위기의 호러미스터리를 보여준 모토리야 하야타 시리즈 역시 다음 작품이 기대된다. 결말 부에 후속작에서 겪을 사건을 미리 예고하고 있기에 더욱 그렇다. 다만 도조 겐야 시리즈의 번역이 끊긴 거나 다름 없는 상황에서 이 시리즈의 후속이 나올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렵다. 어쨌든 기회가 된다면 모토로이 하야타의 다음 사건을 만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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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매켄 단편선 1 아서 매켄 단편선 1
아서 매켄 지음, 이미경 옮김, 정보라 해설 / 와이드마우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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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신, 판

레이먼드 박사의 집에 초대를 받은 클라크. 용건은 회백질을 건드는 시술을 통해 세상의 이면을 볼 수 있다고 주장한 실험을 같이 지켜 봐달라는 것. 실험 대상자인 메리는 시술 직후 백치가 되어버리지만, 레이먼드 박사는 그녀가 세상의 이면에서 나타난 자연의 신, 판을 봤기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클라크는 레이먼드 박사의 실험이 터무니 없다 생각하면서도, 판의 흔적을 찾다가 헬렌이라는 여자와 뭔가 관련이 있다는 걸 알게 되는데...

세상의 다른 이면이라는 점만 보면 러브크래프트의 소설인 <저 너머에서>와 유사하게 보인다. 초자연적인 영역을 과학을 통해 증명하려는 면에서는 공통점이라 할 수 있다. 차이점이라면 러브크래프트의 소설은 눈으로 보이는 현상 그 자체를 다루고, 이 소설은 그 세계가 있다는 증거인 어떠한 존재에 대한 증명이 강조된다. 이 중 러브크래프트의 소설이 나중에 나왔기 때문에 아서 매켄의 소설이 어느 정도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 소설에서 나타나는 자연에 대한 묘사는 뭔가 기묘한 느낌이다. 분명 묘사 자체는 아름다운데 어딘가 불길하고 음침한 인상을 준다. 자연의 경이로움을 넘어서서, 아주 오래전부터 지구 상에 존재해온 자연 그 자체에서 느껴지는 공포. 그나마 현실에서 비교해 볼 수 있는 거라면 숲 속에서 조난 당한 상황에서 느껴지는 주변 모습 정도라고 본다. 이게 인적이 드문 외진 곳에서만 느껴지는 것이라면 모를까, 아무도 모르게 도심을 활보하면서 야생의 공포를 뿌리고 다니니 파급력이 엄청나게 나타난다.

왜 하필이면 작중에서 다루는 공포의 존재가 판인지 처음 봤을 때 살짝 이해하기 어렵기도 했다. 단순히 그리스 신화에서 나온 자연의 신이라 자연의 공포를 반영하기 그럴싸 했을 것이라는 정도 밖에 떠오르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판에 대해 여기저기 찾아보니 공포로 나타내기 꽤 적절할 만했다. 일단 판의 외형부터가 인간의 상반신과 얼굴을 가진 산양 혹은 염소인데, 흔히 악마의 이미지 하면 떠올리는 것에는 염소와 산양이 있다. 악마의 이미지에 염소와 산양이 있는 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사티로스라는 정령에서 유래된 것이다. 여기서 재미있는 점은 사티로스의 외형이 염소가 된 건 판과 엮이면서 생긴 것이라 한다. 또한 판은 사람을 갑작스러운 공포에 질리게 만드는 행동을 즐기는 특성이 있고, 이런 점 때문에 영어 단어인 패닉(Panic)의 어원이 판에서 나왔다는 설도 있다.

이렇게 정리해 보니 작중의 판이 어떤 이미지였는지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사람이 인식해서는 안 될 자연의 공포 그 자체. 신인지 악마인지 확실하게 알 수 없는 인간이 이해하기 힘든 존재. 돌아다닌 곳마다 죽음과 혼란을 일으키는 공포의 화신. 여기에 판의 기원과 실체에 대한 반전까지. 제목에 붙은 그대로 위대한 신, 판이 맞다. 다만 이런 부분을 작중에서 친절하게 나타내지 않고 오로지 독자의 해석에 맡기듯이 애매모호한 서술이라 쉽게 읽을 만한 내용은 아니긴 하다. 책 마지막에 작품 해설이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이라고 본다.

내면의 빛

런던의 유명 레스토랑에 방문했다가 오랜 친구인 다이슨을 만나게 된 찰스 솔즈베리. 다이슨은 궁핍하게 살다가 돌아가신 삼촌의 유산을 물려 받으며 생활이 편해졌다고 한다. 그렇게 그는 자신이 원하던 연구를 할 수 있게 됐다면서 최근 런던의 교외 지역인 할레즈던에 살았던 어떤 의사에게 발생한 사건을 들려주는데...

스토리 구조만 보면 <위대한 신, 판>과 유사한 점이 있는 편이다. 세상의 이면에 대한 미지의 실험을 했다가 재앙과 마주해버린 연구자라던가. 합리성을 추구하면서도 비합리적인 것에 대한 궁금증으로 인해 본의 아니게 깊숙이 빠져드는 주연 인물이라던가. 다만 세상에 유해한 영향력을 끼치고 주연 인물들이 어떤 식으로든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던 <위대한 신, 판>에 비해, 이 소설은 제목처럼 개인의 내면에만 영향을 끼치는 정도로 작게 나타나고 사건과 주연 인물이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부분에서 차이가 있기는 하다. 사소하게 보이지만 제법 큰 차이점이다.

이 작품에서도 작중에서 벌어진 사건의 진실과 원인에 대해 애매모로 하게 나타내다 보니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위대한 신, 판>과 비교해 보면 작가가 어떤 의도로 나타낸 것인지는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위대한 신, 판>의 판이 실존의 문제라면, 여기서 나오는 미지의 무언가는 관념적인 문제로 보인다. 더 쉽게 설명하자면 눈앞에서 실제로 존재하는 공포와 심리적인 공포의 차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여기서 말하는 심리적인 공포란 단순한 미지의 공포가 아니다. 종교와 오컬트 같은 신비의 영역이 아니라 의학과 과학에 해당되는 현실적인 부분이다. 작중 묘사만 보면 오컬트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그게 주술이나 종교적인 것이라고 확실한 언급은 없다. 그저 하나의 발견, 즉 과학적인 범주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이 발견으로 인해 앞으로 벌어질 수 있는 두려움이다. 어렵게 생각할 것도 없이 새로운 물질이나 균의 발견으로 인해 신체에 발생할 영향, 대표적인 것으로 각종 질병을 예시로 들 수 있다. 이런 걸 보면 미지의 공포란 무조건 비현실적인 것이라 할 수는 없어 보인다. 또한 이게 작가가 살았던 19세기는 물론이고 지금 현재에서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공포라는 점에서 과학적 발견의 공포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라 할 수 있다.

붉은 손

선사시대 낚시 바늘로 추정되는 유물에 대해 논쟁을 벌이던 다이슨과 필립스. 필립스는 분명히 진품이라 하고, 다이슨은 위조품이라 주장하는 상황에서 둘은 가벼운 산책을 하기 위해 밖으로 나간다. 점차 빈민가로 들어간 그들은 우연히 살인사건 현장을 목격하게 된다. 거기서 붉은 손 형태의 상징물이 그려진 걸 발견한 다이슨은 범인이 현대에 남아 있는 원시인일지도 모른다고 주장하는데...

얼핏 보면 추리소설처럼 보이는 구성이지만(사실 앞의 <위대한 신, 판>과 <내면의 빛> 역시 추리 소설 같은 분위기가 있긴 있다.), 신비로운 분위기와 오컬트가 강조된다는 점에서 고딕소설에 가깝다.

암호문에 대한 해석 같이 그럴싸한 부분이 있어서 하나의 미스터리라 할 수는 있겠지만, 아무래도 결론만 보면 근간은 다르기에 추리소설이라 하기 어렵다. 특히 작중에서 나온 불가능성의 원칙이라는 조사 방식은 이름만 거창할 뿐, 그저 우연에 모든 것을 맡기는 식이라는 것만 봐도 추리와 고딕이 얼마나 다른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단순한 고딕소설이 아니라 추리소설처럼 보이게 진행되다 보니 뭔가 현실성을 부여해서 결말에서 나타날 공포가 더욱 부각된다고 본다.

원시적인 것에 대해 다루는 부분이 많은데, 이게 사람의 퇴행적인 면을 비유한 것처럼 보인다고 생각한다. 제 아무리 많이 배운 사람이나 현대적인 생활에 익숙한 보통 사람이라 할지라도 원시인처럼 야만적인 행동을 보일지 모른다고 말이다. 이 야만적인 부분이란 특별한 것이 아니다. 그저 여러 사유로 눈이 멀어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하지 않는 무뢰배를 말한다. 재미있는 건 이런 퇴행적인 면이 나타나게 된 원인이 원시적인 오컬트와 관련된 것이라는 점이다. 그렇기에 이 원시적인 것은 단순 비유와 현실 사건으로서의 완결성에서 끝나지 않고 실존하는 공포까지 연결성을 가지게 된다. 이게 바로 앞에서 언급한 현실성을 부여해서 공포를 부각 시키는 것이다.

끝으로 이 책의 마지막에 있는 작품 해설은 반드시 읽어보기를 바란다. 아서 매켄의 작품에서 대체로 어떤 면이 강조됐고 어떠한 특징이 보이는지 상세히 알려줘서 어렵게 느껴졌던 부분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할 여지를 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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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로메 - 1893년 초판본 오리지널 디자인 소와다리 초판본 오리지널 디자인
오스카 와일드 지음, 오브리 비어즐리 그림, 이한이 옮김 / 소와다리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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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폐라고 한다면 언제나 거부감이 먼저다. 도저히 사람 같지 않은 모습과 그걸 즐기는 행위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드니 당연할 것이다. 문학적으로 이런 주제를 다루면 이래저래 박한 평가가 따라오게 되는 건 이러한 이유 때문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퇴폐적인 요소가 있다는 점 만으로 무작정 저평가 받는 건 아무래도 좀 그렇긴 하다. 하나의 표현 방식으로서 무엇을 어떻게 나타내고자 시도한 걸 퇴폐라는 것에만 집중한 나머지 놓치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소설은 꽤 많이 읽어 봤고, 시는 조금씩 가까워지려고 하고 있는 편이지만, 희곡은 여전히 거리가 먼 편이다. 소설은 문장을 너무 어렵게 쓰는 경우가 아니라면 대체로 내용만 따라가며 읽기 쉬운 편이고. 시는 느낌 가는 대로 읽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희곡은 뭔가 그냥 읽으면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느낌이다. 오직 대사로만 진행되는 형식이라 어떤 의도로 나오는 말인지, 이게 과연 그 인물의 진의가 담긴 말인지 판단하며 읽어야 해서 그렇다. 그럼에도 희곡을 읽게 되는 건 아무래도 대사에서 느껴지는 힘 때문이라고 본다. 모든 걸 말과 행동으로 보여줘야 되는 만큼, 작은 행동이나 대사에 나타나는 표현의 깊이가 남다르다. 대체로 소설책 한 권에 비하면 희곡 하나의 분량은 꽤 작은 편임에도 이 깊이에서 여러모로 차이가 있다는 점에서 희곡이 가진 힘을 알 수 있다. 이런 부분을 실감하게 되면 아무리 희곡이 어렵다는 인상이라도 보게 될 수밖에 없게 된다.

어딘가 음울한 분위기에서 시작해 점차 파국으로 치닫는 비극이다. 단막이라는 짧은 분량 안에서 다소 반복되는 구도가 많음에도 상당히 강렬한 인상을 준다. 대부분 팜 파탈로 묘사 되어 주목을 많이 받는 살로메로 인한 것이지만, 간접적으로 나타나는 주변 묘사나 웅장한 대사들이 분위기를 살려준다고 본다.

모티브가 된 원전과 희곡의 내용을 비교해 보면 얼마나 파격적으로 각색 됐는지 쉽게 구분할 수 있다. 단순히 수동적인 모습에서 스스로의 의지로 행동하게 바뀐 살로메의 변화 뿐만 아니라, 여러 인물들의 추한 모습이 부각된다고 생각한다. 허세가 더해진 겁쟁이 같은 모습. 눈치 없는 모습. 웃기는 건 이게 스스로 파멸로 빠져드는 살로메의 행동과 함께 따라오는 모양새다. 반복되는 대사들도 가만 보면 단조롭게 보이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살로메의 파멸 행보와 매우 유사한 방향이라는 점에서 웃기게 보이기도 한다. 이렇다 보니 사실상 극의 흐름을 살로메 혼자서 끌고 가는 것처럼 보인다. 살로메로 시작해서 살로메로 끝나는 스토리니 딱히 틀린 말이 아니긴 하겠다.

한편으로는 굉장히 아름답고 유려한 문장으로 된 대사가 많은 편이다 보니 이 비극적인 내용을 묘하게 만든다. 어떤 것은 아름답다 보니 더욱 불길하게 보이고, 어떤 것은 급하게 꾸며낸 듯이 허울처럼 보이고. 어떤 것은 아무리 아름다움을 길고 자세히 강조해도 덧없다는 듯이 보이고. 아름다운 표현으로 가장 큰 충격을 주는 부분이라면 거의 마지막에 나온 살로메의 대사다. 극 중에서 가장 끔찍한 장면 임에도 진심을 다 끌어낸 듯한 아름다운 묘사를 해서 그야말로 퇴폐의 끝을 보여준다. 그저 징그러운 장면이라 할 수도 있지만 이떻게 이런 표현으로 나타낼 수 있는지 대단하기도 하다.

이렇듯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 극과 극으로 갈릴 만한 작품이다. 다만 개인적인 감상에서 그렇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작품성 면에서는 확실하게 해둘 필요는 있다고 본다. 퇴폐적인 면이 별로라고 할 수는 있다. 그래도 그것만 강조된 극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발표 당시에도 의견이 여럿으로 갈렸지만, 지금까지 작가의 대표작 중 하나로 남은 걸 보면 감상과 작품성은 별개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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