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얼굴의 여우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85
미쓰다 신조 지음, 현정수 옮김 / 비채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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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받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저 무섭다고 느낄 수도 있고, 나름대로 행동력이 있다면 잘못된 걸 바로 잡고자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세상은 생각한 대로 돌아가지 않는 법이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달라지는 건 없고, 노력은 결실을 맺지 못한 채로 의미 없이 사라져간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더 이상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런 허무함 속에서 여전히 남아 있는 잘못된 것이란 언제 어떤 모습으로 다시 나타날지 모를 일이다. 아무리 시간이 흐르고 시대가 달라졌더라도 그 본질은 변함 없이 말이다. 이처럼 시대를 초월해 계속 돌아다니는 망령을 두고 이런 질문이 계속 나올 것이다. 이걸 보고도 계속 모른 채하고 방치할 생각이냐. 여기에 과연 어떤 답을 내고, 무엇을 해야 할까.

만주국에서 일본으로 돌아온 엘리트 청년인 모토로이 하야타는 무작정 기차에 올랐다가 어느 마을에 내린다. 그곳에서 그나마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에 탄광 일을 시작하게 된다. 다양한 인간군상이 모인 탄광에서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경험하던 중, 탄광이 무너지는 사고가 발생하고 하야타의 지인이 빠져 나오지 못하고 갇히게 된다. 게다가 탄부 숙소에서는 밀실 살인사건까지 발생하고 이건 곧 연쇄 살인으로 이어지는데...

패전 이후의 일본 사회, 그것도 탄광 관련된 내용을 아주 깊숙이 다루는 내용이다. 일본의 탄광 개발 방식에서 시작해 노동자를 부당하게 대우하는 회사 측, 안전사고 관리가 부실한 현장, 이익을 우선시하며 발생하는 인명 경시 같은 노사 문제가 주로 부각된다. 여기에 2차 세계 대전 당시의 조선인 강제 징용 문제가 아주 깊은 관련성을 가지다 보니 여러모로 복잡한 감정이 든다. 편파성 없이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다루어서 과감하다고 해야 될 정도라 그렇다. 이렇다 보니 평소 작가의 공포 미스터리면서, 어떻게 보면 사회파 미스터리 같다는 느낌이다. 그러니까 다소 현실적인 면이 강하다고 해야겠다. 이런 점 때문에 주인공의 배경을 설명하는 부분이 다소 길다 보니 메인 사건만 기다리는 경우라면 살짝 지루할지도 모른다.

미신을 잘 믿는 탄광 사회에서만 존재한 민속학적 요소를 보며 여러모로 현실과 비현실이 공존하는 인상을 받았다. 단순히 안전을 염원하는 바람에서 나온 미신이 아니다. 지하의 짙은 어둠에서 느끼는 원초적인 공포와 사방이 꽉 막힌 땅 속이라는 환경이 조성하는 심리적인 압박이 쌓여 있다는 인상이다. 한 번 내려가면 영원히 나올 수 없을 것 같다. 아무리 탄광에서 일을 오래한 베테랑이라도 이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어 보였다. 작중에서 언급되는 갱내에서 겪은 괴담 같은 사건 역시 그렇다. 그냥 사고가 나서 갇히는 것만으로도 무서울텐데, 정체 모를 존재에게 이끌려 지하 깊은 곳으로 끌려갈 수도 있다니. 그야말로 죽음이 언제나 도사리고 있는 환경이나 다름없다. 현실적으로도, 비현실적으로도 말이다. 한편으로는 도조 겐야 시리즈에 나온 괴이에 비해 사건과의 연결성이 부족하다 보니 공포 면에서 약하게 보일 만하다.

여러모로 탄광 사회에 존재하는 건축물의 특징과 자연적, 문화적 환경을 이용한 밀실트릭이라 나름대로 흥미롭게 봤다. 트릭 자체의 기발함 보다는 이런 식의 속임수가 가능하게 만든 환경이라는 부분에 주목했다. 물리적 트릭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대체로 심리적 트릭이 많이 작용한 것이다. 별거 아닌 간단한 조작이나 의도치 않게 만들어진 상황이 점점 사건을 복잡하게 만드는 점에서 상당히 놀랍다고 할 수 있다. 다만 흔히 아는 탐정소설 같이 자유롭고 협력이 많은 조사 환경과 거리가 멀기 때문에 상당히 제한적인 환경에서 추리가 진행되고. 주인공 역시 탐정 역할이라는 자각이 확고하지 않은 상태로 스토리가 진행되다 보니 보기에따라 답답할 수도 있다고 본다.

도조 겐야와 또 다른 분위기의 호러미스터리를 보여준 모토리야 하야타 시리즈 역시 다음 작품이 기대된다. 결말 부에 후속작에서 겪을 사건을 미리 예고하고 있기에 더욱 그렇다. 다만 도조 겐야 시리즈의 번역이 끊긴 거나 다름 없는 상황에서 이 시리즈의 후속이 나올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렵다. 어쨌든 기회가 된다면 모토로이 하야타의 다음 사건을 만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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