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어의 비탄 * 마술사
다니자키 준이치로 지음, 박성민 옮김 / 시와서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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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어의 비탄

청나라 시절, 부모를 일찍 잃었지만 아버지가 쌓아둔 재산으로 행복하게 지낸 청년 세도가 있었다. 모든 면에서 완벽함 그 자체였던 그가 도락에 맛이 들려 방탕한 생활을 하게 됐지만, 이내 모든 것이 시시해져서 평범하지 않고 새로운 걸 추구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귀공자를 만족하게 하는 것은 없었고, 하루하루 피폐해지기만 한다. 그렇게 한 해가 지나고 남경에서 새해 등롱 놀이를 하던 무렵이다. 어느 누추한 서양인이 귀공자의 집 앞에 와서 열대 바다의 인어를 잡아왔다고 말하는데...

도저히 채울 수 없는 아름다움에 대한 욕구로 인해 현실이 망가지다 못해 환상의 영역에 도달하게 되는 묘사가 인상적이다. 시대적 배경을 보면 서양인을 처음 보는 동양인이 가진 동경심 같은 느낌도 있어 보였다. 채울 수 없는 아름다움이란 자신이 사는 세계 안에 갇힌 한계라 볼 수 있겠고, 이러한 한계를 넘어서서 나타난 존재가 서양인이다 보니 환상의 영역으로 여겨질 만하다.

온갖 화려한 묘사란 묘사는 다 나오며 아름다움에 대해 많은 걸 늘어 놓지만 결국 완전하게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란 전개는 비극적으로 보일 만도 하다. 완전히 주저 앉지 않고 여전히 갈망하며 찾아내고자 노력하는 면이 남아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이렇게 볼 수 있겠다. 이미 한 번 아름다움을 동경하다가 파멸 직전까지 가봤으니, 두 번이라고 못 할 것도, 두려울 것도 없다. 단순히 무모한 결정이 아니라 이미 많은 고뇌를 통해 내린 결정으로 보이는 구석도 있기에 그 열망 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책에 실린 삽화가 오스카 와일드의 《살로메》에 실린 그림과 비슷하다는 언급이 있는데, 초판본 형태의 제본으로 나온 《살로메》를 읽어 봤기에 진짜 그렇게 보였다. 그 당시 일본에서 나올 법한 그림 스타일 치고는 중세 서양화 느낌이 강하고, 내용 역시 어딘지 모르게 《살로메》를 떠오르게 하는 부분도 있다. 왕실을 배경으로 하고, 아름다움에 집착하여 퇴폐적으로 변해가는 고위층의 모습에서 그렇다. 차이점이라면 살로메는 잔혹함과 퇴폐의 끝을 보여주지만, 이 소설의 귀공자는 역시 퇴폐적인 면모가 있지만 그래도 낭만은 존재한다는 인상이다. 그 낭만의 끝에 파멸이 기다리고 있을지 몰라도 그 동경 만큼은 이해 받지 못할 건 아니라는 것이다.

마술사

어느 나라에서 연인을 만나 시간을 보내던 중, 엄청 아름답기로 소문난 어느 공원에 가보기로 한 나. 연인은 최근 공원 연못가에 가설 극장을 세운 마술사가 있다면서 보자고 한다. 그곳에 가는 도중에도 공원의 온갖 화려한 면에 빠져들 뻔했는데, 마술사의 극장에 다가갈 수록 어둡고 기묘한 환상의 세계 같은 인상을 받게 되는데...

가끔 이런 느낌을 받을 때가 있을 것이다. 미적 감각이란 것은 보기보다 유별난 걸 넘어 기괴한 경우도 있다고. 이 작품에서 나타나는 아름다움이란 이런 감상에 가깝다고 본다. 화려함의 극한을 넘어 퇴폐적인 판타지에 가까워져 이걸 아름다움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를 정도로 파괴적인 아름다움. 앞의 《인어의 비탄》은 채울 수 없는 아름다움에 대해 다루었다면, 이 작품은 반대로 한계를 알 수 없는 아름다움에 빠져버리는 과정이다.

분별력 없이 빠져드는 아름다움이라고 하면 대체 어떤 것일까. 공원에 있는 온갖 화려한 것들에 대한 묘사는 시선을 빼앗기에 충분하다고 여겨지긴 하다. 하지만 마술사의 공연장으로 가는 길에서 보인 풍경과 마술사의 외형, 마법에 가까운 마술에 대한 부분은? 이 부분에서는 경이로움을 넘어 다소 두려움마저 느껴질 정도다. 환상적인 아름다움이라 하면 어느 정도 상상이 되는 이미지라도 있는데, 이건 무엇이라 떠올리기 힘들 정도로 난해하다. 아니, 이걸 아름다움이라고 해도 될지 모를 정도로 괴이하다. 삽화에도 이런 느낌이 살아 있기에 간접적으로 나마 작중의 기묘함이 어떤 이미지인지 알 수 있다.

아름다움으로 인해 망가져 가는 비극적인 내용은 다른 작품에서도 볼 수 있던 부분이지만, 그건 대체로 이별이나 슬픔으로 인한 것이다. 이루어질 수 없거나 도달할 수 없다는 현실의 한계 속에서도 여전히 아름다움을 동경한다는 식으로. 하지만 이 작품에서 말하는 비극은 오히려 반대다. 아름다움의 심연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넘쳐 나니 무엇이 더 소중한 것이었는지 잊어버리게 되고, 지금까지 상상하기도 어렵고 느껴보지도 못한 자극 속에서 자아마저 잃어버리게 만들며 모든 걸 파괴한다. 이건 과도한 동경을 나타낸 걸로 보이면서도 다소 경계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인어의 비탄》 속의 귀공자는 적어도 이해가 되는 파멸적 동경이라면 여긴 너무 해롭고 위험하다는 인상이 들어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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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목 매그레 시리즈 9
조르주 심농 지음, 최애리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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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인생을 나타내는 무언가를 정하라고 하면 보통 무엇을 떠올릴까. 보통은 돈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돈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다른 것을 떠올리는 경우도 있긴 있다. 늘 있는 일상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함께하는 무언가. 그게 없어지면 살아가는 의미를 잃어버린다고 해도 될 정도로 친숙한 것. 사실 뭐가 됐든 상관 없는 일이긴 하다. 중요한 건 이거다. 일상이나 다름 없는 무언가가 영원히 사라질 상황에 처하면 참을 수 있느냐. 대부분은 초조하다 못해 불안해 하고 급기야 절망에 빠지고도 남는다. 보통은 이걸 극복하려는 힘겨운 시도를 하겠지만, 오히려 나쁜 길로 빠지는 경우도 생긴다. 세상 모든 것을 화풀이 대상으로 여기는 뒤틀린 마음을 가졌다면 말이다.

생클루에서 벌어진 미국인 노부인과 하녀 살인범으로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은 외르탱. 이 사건을 해결했던 매그레 반장은 외르탱이 범인이라는 물증은 있지만 동기를 전혀 알 수 없었다. 이런 탓에 점차 그가 무죄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자, 자신의 직위를 걸고 사형 전날 밤에 외르탱을 일부러 탈옥 시켜 지켜보기로 한다. 그런데 누군가가 신문사로 보낸 편지로 인해 계획된 탈옥이라는 의혹이 보도 되기 시작한다. 게다가 외르탱이 숨어 있던 여인숙에서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도주하는 바람에 놓치고 마는데...

잘못된 사건을 재수사한다는 점. 매그레 반장의 경찰 경력이 걸린 위기. 일상이라는 풍경이 제대로 보이지 않고, 매그레 반장 역시 여유를 갖지 못하는 모습을 많이 보이니 이래저래 긴장감이 감돌아서 그 어느 때보다도 분위기가 다른 내용이다. 충분한 시간이 주어져 있지 않는 상태인데 무엇보다 무고할지도 모르는 사람의 목숨이 걸린 문제다. 그 어느 때보다도 신중할 수밖에 없는데, 오히려 매그레 반장을 도발하는 듯한 일만 벌어지니 혼란만 가중되는 모양새다.

간혹 탐정에 해당되는 캐릭터와 라이벌처럼 맞먹는 인물 간의 대결 구도로 진행되는 작품이 종종 있는데 이 작품이 딱 그렇게 보였다. 사건 관계자들의 배경을 파악하는 매그레 반장의 스타일과 대립 구도를 이루듯 상대도 비슷하다. 겉모습만 보고 사람의 인생을 분석하며 날카롭게 파고들 기회를 노리는 스타일이라 만만치 않은 싸움이 된다. 서로의 심리를 파악하고 무슨 짓을 벌일지 대응하는 대결이나 마찬가지라 증거나 단서를 확보하기 어려운 점이 많아서 그렇다. 무언가를 발견하더라도 이게 대체 무슨 연관성을 가지고, 무엇을 증명할 수 있는지 알 길이 없다. 뻔히 눈 앞에 범인이 있고 일부러 증거나 단서를 흘리고 다니는데도 아무런 조치를 취할 수 없는 참으로 답답한 상황이나 마찬가지다.

매그레 반장의 사건 속에는 다양한 인생에 대한 드라마가 있었지만, 이토록 인생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보게 만드는 경우는 없었다. 평소의 수사 방식도 통하지 않고, 오히려 농락 당하기만 해서 사건의 진실 만큼이나 파악이 안 될 정도였으니까. 이 범죄에 다다르기까지 있었던 과정이자, 이럴 수밖에 없었던 그 사람이 살아온 인생. 이건 그 어떤 범죄라도 있을 법하다. 그런데 간혹 아무 것도 발견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아무런 연관도 없는 타인을 해치는 범죄 같은 경우 말이다. 현대에도 자주 일어나는 범죄니 낯설지 않을 것이다. 설명이 안 되는 이걸 규명하기 위해 성급한 억측이 난무하고는 한다. 무엇 탓이다, 무엇이 사회를 어지럽힌다, 무엇이 사회악이라고 하면서. 이런 것들은 대부분 가까이에서 뻔히 보이는 본질을 보지 못하고 멀리 돌아가는 거나 마찬가지다.

오만과 거짓말이 난무하는 이 사건을 설명하려면 하나의 비유를 들어야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표지에 있는 커피 잔이 적절하다고 본다. 커피 한 잔. 근현대에 들어 사람의 인생에서 여유로운 순간 하면 자주 떠오르게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커피 한 잔의 여유라는 말을 많이 쓰지 않은가. 하루의 시작이라는 의미라 할 수도 있고. 요즘 시대에 카페 하면 가볍고 흔한 이미지지만 매그레 반장이 있던 시대에는 다소 특별하게 묘사된다. 다양한 사람들이 만나는 교류의 장 같은 분위기라 그 안에 앉아 있는 것 만으로도 엄청난 사람이 된 것 같은 특별한 곳이었다. 거기서 즐기는 커피 한 잔이란 상당한 가치가 있다 할 수 있다. 이 특별해 질 수 있는 순간을 갑자기 박탈 당하게 된다면 어떤 기분일까. 절망을 넘어 악의적인 분노가 생길 만도 하다.

이 분노란 어려운 것이 아니다. 살고 싶다. 열심히 살고 싶다. 그런데도 할 수가 없다. 수 많은 인생들이 교류하고 살아가는 자리에 내 것은 없다. 내 커피 한 잔 만은 없는데 다들 즐기고 있다. 내가 즐기지 못할 바에는 다 뒤엎어버리고 싶다. 참으로 악독하다고 할 수 있으면서, 한편으로 인생이란 잔인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보면 겨우 커피 하나, 아니면 커피 하나의 가치나 다름 없는 무언가 때문에 벌어진 일이니까. 진범도 그렇고 범인에게 엮인 사건 관계자들도 말이다. 차이점이라면 사건 관계자들은 그저 가지고 싶었고, 진범은 가질 수 없기에 이용하고 부숴버릴 의도였다는 점이다.

제목 그대로 서로가 서로에게 남인 사람들끼리 목을 걸고, 더 정확히는 인생을 걸고 벌어진 사건이라 해결이 돼도 뭔가 시원치 않은 인상이 남는 느낌이다. 누군가의 인생이 계속되기 위해 타인의 목을 대가로 지불해야 한다는 현실은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범인에게 놀아난 이들과 마찬가지로 범인 역시 잘 살아 보겠다는 인생이 있었다. 매우 지독한 죄질 때문에 동정 받을 가치가 없다고 해도 그 역시 커피 한 잔을 원했을 뿐이다. 다른 욕심도 아니고 남들 만큼 살아보고 싶었다는 것이 전부다. 그럼에도 다른 방법을 아예 찾지 않고 스스로에게 고립되어 파멸을 자초했다. 원하던 이상이 턱 없이 높았던 걸까. 아니면 세상의 벽이 너무 높아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 걸까. 무고한 이는 구했지만, 어쨌든 하나의 인생이 사라지고 난 뒤에 남은 무거운 공기는 마음을 복잡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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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괴 대도감
미즈키 시게루 지음, 김건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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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감류의 책은 언제나 흥미가 생긴다. 같은 주제를 다룬 책이 여러 권이더라도 여기는 뭐가 다르고, 이건 어떤 식으로 특색이 있을지 비교하는 재미가 있다. 물론 그 중에는 생각보다 실망인 것도 있는 편이긴 하다. 내용이 빈약하다던지, 그림이 별로라던지. 둘 다 만족스러우면 좋겠지만 그래도 가장 이목을 잘 끌 수 있는 건 아무래도 그림이다. 아무리 글이 잘 써져 있다 해도 그림이 받쳐 주지 않으면 뭔가 부족하다는 인상이 확 들기 때문이다.

저자인 미즈키 시게루의 이름은 많이 들어본 편이다. 요괴 관련된 정보나 작품에서 언제나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작가 분이라 그렇다. 독특한 그림체를 가진 만화로도 유명해서 한 번 보면 금방 알아볼 정도다. 그렇다 보니 이 작가 분의 이름으로 나온 요괴 도감이라고 하니 큰 기대를 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그림 부분에서 그랬다.

대체로 알아보기 쉬운 분류로 정리 되어 있다. 유명한 요괴, 인간형, 동물형, 반인반수, 물건형(츠쿠모가미류), 불꽃의 형태, 자연물. 그냥 보기에도 단순하고 직관적이라 나쁘지 않다. 이 중에 동물형에는 비슷한 계통에 속한다고 여겨진 경우를 묶어 놓은 부분은 처음 봐서 주목하게 됐다. 맨 처음 1장인 유명한 요괴 부분은 어떻게 보면 분류하기 어려운 것들을 뭉뚱그려 놓은 걸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도 나름대로 괜찮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누구나 한 번 쯤 어딘 가에서 들어 봤을 요괴를 굳이 나눠 놓는 것보다는 한 번에 찾아보기 쉽게 모아 놓는 편이 더 효율이 좋게 보여서 그렇다.

현대에 유행한 괴담인 인면견과 입 찢어진 여자 같은 경우도 요괴로 취급하여 포함되어서 다소 특이하게 보일 만도 하다. 개인적으로 요괴가 문화적 현상이라고 봤을 때 현대에 존재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는 식으로 해석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요괴가 단순 과거의 산물이 아니라 현대에 새로 생겨나도 이상하지 않다는 의미라고 본다. 아직은 현대 괴담 영역을 포함하지 않는 경우가 많지만 나중에는 요괴 도감에 현대 요괴 항목이 생길 것이라 기대해봐도 좋지 않을까 싶다.

그림은 기대한 것 만큼 흥미롭다. 옛날 요괴 그림에 있던 형상을 그대로 따라 그린 듯한 것이 있는 가 하면, 작가 특유의 스타일이 돋보이는 그림이거나, 두 스타일이 섞여 있는 경우도 있다. 아무래도 묘사된 기록이 존재하는 경우면 최대한 비슷하게 나타내고, 그렇지 않은 경우나 다소 보충이 필요한 곳에는 작가의 상상을 반영해서 묘사한 걸로 보인다. 아기자기하거나 소소한 유형에는 익살스러움이 느껴지는 편이고, 제법 섬뜩한 유형에는 세밀한 표현이 돋보여 기괴하고 소름 끼치는 느낌이 살아 있다.

각 요괴에 대한 정보는 간략하게 서술된 편이다. 여기서 말하는 간략함이란 생김새와 특징, 자주 목격된 지역, 관련된 옛 이야기 정도의 내용이다. 딱 이게 어떤 요괴인지 파악할 수 있을 정도다. 그렇기에 더 상세한 분석이나 문헌 자료를 원하는 경우라면 맞지 않을 수도 있다. 다르게 말하면 간편하고 쉽게 보기 좋아서 조금 더 다양한 요괴를 알고 싶다면 딱 좋다. 익숙한 것이 많으면서 처음 보는 것도 많으니까. 한편으로는 이게 왜 없을까 싶은 부분도 조금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개인적으로 느끼는 인상 정도라고 알아두면 되겠다. 다른 이들에게는 아쉬움이 크지 않을 정도로 꽉 차 있다고 보여지니까.

듣기로는 세계의 요괴를 다룬 책도 있다고 하던데, 그것도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으면 좋겠다. 거기에는 또 어떤 스타일의 그림이 있고, 어떤 설명을 써놓았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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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원의 약속 매그레 시리즈 8
조르주 심농 지음, 이상해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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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 만이 아는 세상이란 것이 간혹 있다. 작은 사회, 닫힌 사회 같은 지역적인 특성과 비슷할 수도 있지만 어떠한 경험을 통해 공유되는 환경이라고 해야 정확할 것이다. 극한의 환경 속에서 버텨온 이들만이 가지게 되는 의리. 또는 그들만의 세계에서 돌고 돌며 함구하는 꺼림직한 무언가. 지역사회라면 그 지역의 분위기만 파악하면 그만이지만, 환경은 정해진 그 순간 밖에 느낄 수 없는 정취다. 그래서 이미 사라지고 없는 흐릿한 잔상 만을 단서로 추정해야 되기 때문에 어려울 수밖에 없다.

부인과 함께 여름 휴가를 가려던 매그레 반장은 지인이 보낸 편지를 받고 휴가지를 변경해 페캉으로 떠나게 된다. 페캉에 정박한 대구잡이 저인망 어선인 오세앙 호에서 선장 살해 사건이 발생했고, 용의자로 검거된 전신 기사이자 지인의 제자인 피에르 르 클랭슈의 결백을 밝혀 달라 했기 때문이다. 수감되어 있던 클랭슈가 노란 구두를 신은 누군가가 선장을 공격하는 순간을 목격했다는 증언을 해서 사건은 순조롭게 풀릴 것 같았다. 그런데 조작된 흔적이 전혀 없는 선장의 유서가 발견되면서 모두가 당황하고 마는데...

뱃사람들 만의 세계를 다루는 내용이다 보니 복잡한 면이 꽤 보인다. 사건 자체의 난해함이라기 보다는 속내를 알기 어려운 사건 관계자들의 모습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간단하게 해결될 일을 쓸 때 없이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는 인상도 있다. 동료 의식을 통해 나오는 의리나 도리 같은 건 아니다. 조직이 있으면 늘 대두되는 침묵의 규율이라 하는 오메르타에 가깝다. 하지만 하나 같이 신경질 적이고 불길한 인상만 가득한 분위기를 보다 보면 점차 알게 된다. 그들 역시 제대로 파악이 안 되는 대혼란이라는 걸 말이다.

겉으로 볼 때는 굉장히 사소한 사건처럼 보여도 장소가 장소다 보니 심각한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고 봐야 한다. 자연스러운 일상이 있던 육지가 아니라 출항을 떠나 바다 한가운데 있던 배라는 특수한 상황이라 그렇다. 거친 바다 위의 생활은 사소한 실수에도 목숨이 왔다갔다 하기에 늘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긴장감과 함께 한다고 어디서 들은 적이 있다. 이래서 규칙에 엄격할 수밖에 없다고. 그런데 이러한 분위기를 흩뜨리는 일이 생긴다면 어떨까. 언제나 한결 같은 규칙이 깨지고 질서가 망가지니 남은 건 이거다.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시간 속에서 계속되는 비정상적인 긴장감과 극한의 환경이 만들어낸 뒤틀린 감정들 뿐이다.

사람의 감정은 주변 환경에 따라 쉽게 휩쓸릴 수도 있다는 걸 여러 사례를 통해 알긴 안다. 그럼에도 멀쩡하던 사람이 이렇게 까지 분별력 없고 극단적으로 변할 수 있는지 이해하기 어려울 만도 하다. 한순간의 충동으로 이성을 잃었다고 보기에는 바다와 육지에서의 모습이 너무 달라서 그럴 것이다. 이건 양심이 없어서 그렇기 보다는 오히려 양심의 가책을 크게 느끼기에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방어기제이자 돌발 행동이라고 봐야 한다. 차라리 뻔뻔하게 모르쇠로 일관할 수 있었으면 모를까, 바다 위에서 잃어버린 이성이 육지에서는 다시 돌아오니 그만한 비극은 또 없을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정직하고 평판이 나쁘게 살아오지 않은 이들이라 더 그렇다.

결국 환경이라는 안개를 걷어내고 밝혀낸 진상은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나 다름 없다. 어느 누구를 탓하기도 어렵다. 의미를 잃어버린 선원의 약속 앞에서 모두가 미쳐 있었고, 모두가 피해자였으며, 누구나 가해자가 될 수 있었던 부조리 그 자체였으니까. 매그레 반장에게는 더 큰 파국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 최선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바다에서 일어난 일이 망령처럼 계속 남아 연이은 비극을 만들어내기 보다는 이대로 끝내야 모두를 위해 좋은 일이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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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주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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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아나는 물

미시마야에서 열리는 괴담대회 이야기를 듣고 찾아온 어느 가게의 대행수 후사고로와 어린 견습 점원 소메마츠. 후사고로의 말에 따르면 소메마츠가 있으면 물이란 물은 전부 달아나서 바싹 말라 버린다고 한다. 이걸 소메마츠의 장난으로 여기고 매우 화가 난 상황인데, 정작 소메마츠는 자신은 아무 짓도 하지 않고 그저 자신이 살던 마을에 있던 신이 들러 붙어서 저지른 것이라 주장한다. 실제로 소메마츠가 흑백의 방에 있던 사이에 주전자와 화병의 물이 순식간에 말라버리는 일이 발생하는데...

옛날에는 지금처럼 상수도 같은 것이 거의 없었기에 물이 귀해서 이와 관련된 일이라면 민감해질 수밖에 없다. 물이란 것이 과해도 문제긴 하지만, 없어도 문제가 생기는 점에서 자연과 미신에 의지하면서도 동시에 경계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렇기에 작중의 이야기 주인공인 소메마츠는 여러모로 곤란한 상황이다. 가끔 무섭거나 기묘한 이야기에 나오는 신기한 일을 몰고 다니는 아이 취급을 넘어, 민폐 그 자체로 여겨 지니까.

필요와 불필요의 문제가 작중 핵심이다. 이게 물건이 아닌 존재로서의 가치를 따지는 거라 더욱 복잡하다. 사람도 그렇지만 신과 관련된 이야기를 보면 이런 경우가 있다. 필요할 때 불러 놓고, 나중에 필요 없어지니까 소홀히 대하는 상황. 여기서 생각해 볼 점은 이거다. 왜 필요가 없다고 무조건 쓸모 없는 취급만 하는 걸까. 세상에 쓸모 없는 것이란 없다. 어딘가 쓰이는 일이 있고, 필요로 하는 곳이 있기 마련이다. 이걸 못 알아보는 이들이 나쁜 거나 마찬가지다. 필요로 하는 곳을 찾을 생각조차 하지 않으면서 멀쩡히 도움이 될 존재를 망가뜨리고 있으니 말이다.

다소 기괴한 면이 있으나 소메마츠와 함께 하는 신이 생각보다 귀엽게 묘사된 편이라 대체로 유쾌한 내용이다. 아무래도 필요에 대해 다루다 보니 사람이든 신령이든 외부의 편견과는 다르게 좋은 인상을 남기는 것이 중요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무작정 무서운 면만 돋보이지 않게 했다고 본다. 이해심 많고 좋은 사람들에게 유쾌함을. 이해심이 전혀 없는 고약한 사람들에게 벌을. 이렇게 정리가 되겠다.

덤불 속의 바늘 천 개

나막신 가게인 에치고야의 오타카와 세이타로와 함께 꽃놀이에 따라나선 오치카와 견습직원 신타. 도중에 미시마야 옆집에 있는 바늘가게인 스미요시야의 안주인 부부와 외동딸 오우메를 만나게 된다. 그런데 스미요시야 가족들과 거리를 두며 따라 다닌 얼굴을 가린 여자의 존재를 목격하면서 오치카는 신경이 쓰이게 된다. 이 부분에 대해 오치카의 숙모인 오타미는 무언가를 알고 있으면서 자세히 알려주지 않는다. 그저 곧 있을 오우메의 혼례가 끝나고 흑백의 방에서 스미요시야 안주인에게 물어보라고 한다...

자녀에 대한 문제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아무 탈 없게 잘 자라기 만을 바랄 뿐이지만, 언제 어떻게 위험에 처할지 모를 일이다. 옛날에는 이런 부분에서 더 힘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치료가 힘든 질병 같이 현실적인 것도 그렇고, 말도 안 되는 미신이나 설명하기 어려운 괴이한 일 같은 것도 있었으니. 여러 방면에서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미신으로 인해 벌어진 가족 문제이자 저주에 가까운 일이라 여러모로 복잡하다는 인상이다. 이 저주라는 것이 오컬트에 나오는 괴이한 것이라고 인식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근간을 따라가면 결국에는 사람이 원인이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을 어떤 방식으로든 나타낸 것이라고 보면 쉽다. 하지만 대부분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고 결국은 사람 아닌 존재의 짓으로 여기는 일이 많다. 살아 있는 누군가의 악의라 믿고 싶지 않아서 일까, 우연의 우연이 겹쳐서 그렇게 보이는 걸까. 아니면 의심 가는 사람이 있더라도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에 책임을 떠넘기는 걸까.

가까운 사람 간의 질투가 더 무섭다고 하던가. 겉으로는 잘 지내다가 어떤 식으로든 폭발하면 매우 무섭게 돌변한다고 하니까. 참으면 병이 되는 경우가 많다는 건 이런 뜻일 테다. 서로 조심한다고 하면서 무작정 참기만 하니까 이상한 형태로 표출되고 마는 것이다. 원인을 알 수 없이 어디가 갑자기 아픈 것부터, 생각지도 못한 음습한 짓을 벌인다던가 하는 일이 일어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고 본다.

어디까지나 표현의 문제나 다름 없다. 표현을 하지 않으니 어떤 생각인지 알 수가 없고, 표현을 하지 않으니 마음에 쌓아두게 되고, 표현을 하지 않으니 마음의 병이 된다. 무엇보다 가까운 사이던 아니던 간에 모든 걸 아는 듯이 여기는 것부터가 큰실수다. 사람은 겉만 봐서는 알 수 없는 부분이 많다. 속을 터 놓고 솔직하게 말을 해야 가까워지지, 숨기는 것이 많으면 가식만 늘어 멀어질 뿐이다.

안주

비가 내리던 어느 날, 미시마야의 견습직원 신타가 습자소에 갔다가 심하게 다쳐서 돌아왔다. 신타는 누구와 싸운 건 아니며 나오타로라는 아이가 관련된 일이지만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주장한다. 나오타로는 고용살이를 하던 아버지가 화재 사고로 돌아가신 이후, 어쩔 수 없이 사촌 집이자 비싼 값에 팔아서 악평이 많은 채소 가게인 야오노에 양자로 들어갔다고 한다. 그런데 급격한 환경의 변화 때문인지 나오는 이따금 엄청 사소한 일로도 갑자기 화가 나면 짐승처럼 날뛴다고 한다...

환경의 변화는 어른이라도 잘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경우도 많은데 어린 아이라면 오죽할까. 안 그래도 아직 의사 표현이 서툰 시기인데 이래저래 요구 사항만 늘어나니 돌발 행동으로 표출될 수밖에 없을 만하다. 그렇다면 무엇이 최선일지 고민해 봐야 한다.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해피엔딩 같은 것이라면 좋겠지만 현실은 언제나 냉혹한 타협의 연속이다.

작중에서 나온 안주라 지칭된 존재는 일종의 어린 아이에 대한 비유가 아닐까 싶다. 사람의 나이나 성장 정도에 따른 어리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어떤 만물에 있을 법한 때 묻지 않은 순수한 면 말이다. 어쩌면 요괴 같은 존재들은 어린 아이에 가까운 존재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하면 그저 성가시다 못해 때로는 무섭다는 인상이 생긴다는 점만 봐도 그렇다. 악의라고 할 것까지는 아니다. 어디까지나 서로가 서로에게 서툴다 보니 발생하는 오해라고 본다.

자연의 이치로 인해 가까워질 수 없는 안타까운 이야기를 보며 이런 생각이 든다. 어른에게도 어른만의 생각할 시간과 설명이 필요하듯이, 아이에게도 똑같이 필요하다고. 그냥 어린 애라서 이해하지 못할 게 뻔하니 받아들이라고 강요하거나, 그렇다고 일방적인 요구 사항을 들어주는 건 잘못됐다. 필요한 건 어떻게 해야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 스스로 깨닫게 가르침을 주는 것이다. 언제나 똑같을 수 만은 없다. 하지만 똑같지 않다고 모든 게 사라지는 건 아니다. 마음 깊이 남는 인연이 있다면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혼자가 아니라고.

비록 아이의 관점에서 다루긴 했지만, 이건 어른에게도 해당되는 문제다. 아이는 제대로 된 설명을 해주지 않기에 이해를 못하는 일이 생긴다. 반면 어른은 오히려 설명을 해줘도 무작정 단정 지은 결론 때문에 이해를 못하는 경우다. 이걸 보면 설명을 해줘도 못 알아 듣는 건 아이가 아니라 오히려 어른 쪽이지 않을까 싶다. 나이가 들어서도 사람이 바뀔 수도 있지만 쉽지 않다는 건 이러한 이유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무작정 꽉 막힌 사람이 아니라면 마냥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비록 시간이 걸리더라도 언젠가 해내는 법이다.

으르렁거리는 부처

최근 들어 흑백의 방에 시답지 않은 사람만 드나들어 뒤숭숭한 상황에서 오치카는 나오타로의 친구들이 알고 있던 가짜 스님 교넨보를 다음 손님으로 결정한다. 예상보다 사나운 인상의 교넨보는 이제는 정직하게 살고 있다면서, 가짜 스님 행색을 하던 시절에 겪은 일을 들려준다. 어느 산간 지방을 지나다가 발이 미끄러져 사고를 당했다가 근처 마을 사람들에게 구조됐다. 그 마을은 외관과 다르게 풍요로운 곳이었고, 가쿠넨이라는 스님이 사실상 마을을 대표하고 있었다. 그런데 교넨보의 몸 상태가 많이 좋아졌을 무렵에 우연히 마을의 비밀을 알게 되고 마는데...

외부와 고립되어 숨겨져 있던 마을의 비밀. 무서운 이야기나 영화에서 은근 자주 나오던 소재라 이제는 익숙하다. 하지만 이 작품의 경우는 처음부터 비정상적이라는 인상을 주지 않는다. 광신적인 요소가 나오긴 나와도 끔찍함을 돋보이는 요소가 아니라 사람의 어리석음에 대해 다루는 교훈적인 부분에 가깝다. 어떻게 보면 불교 설화 같다는 느낌도 있다.

단순히 집단 이기주의와 개인에 대한 사적제재 문제로 인한 인과응보를 다룬 내용으로 보일 수 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가짜 스님 행세를 하던 사람이고, 끊임없이 부처님의 존재에 대한 논쟁이 나오다 보니 종교에 대한 내용으로 생각될 수도 있고. 하지만 실제로 말하고자 하는 건 이거라고 본다.

자비.

남을 사랑하고 가엾게 여기며 도와주는 마음.

부처님이 곧 자비이기에 일종의 비유로 쓸 수도 있겠다. 그렇기에 작중에서 말하는 부처님이란 곧 자비에 대한 문제다. 부처가 없다는 건 자비가 없다는 뜻이고. 부처가 두렵지 않다는 건 자비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다는 거나 마찬가지다. 결국 자비 하나 없는 곳에 남은 건 무엇인가. 원망과 저주를 담은 냉소 뿐이다.

이 책의 작품 중에서 가장 무섭다는 인상이면서도 큰 의미를 주기에 마지막 에필로그까지 깊은 인상을 남기게 한다. 자비가 있는 아름다운 세상이란 바로 이런 것이라고. 부처님은 멀리 있다고 느껴지면서도 사실은 가까이에 있다고. 단지 그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고 아무렇지 않게, 또는 다소 매정하게 흘려 보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를 통해 사람과 사람이 인연으로 이어진 세상이 마냥 어둡지 않으며 밝은 곳을 찾을 수 있다고 느낀다. 미시마야에서 만들어진 인연들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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